스리랑카 불교출판협회 창설자
불서번역으로 서구사회 큰반향
유대인핍박 극복한 불교수행자

냐나뽀니까 스님.
냐나뽀니까 스님.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매사 매 순간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故 냐나뽀니까(Nyanaponika, 1901~1994)

불교 인터넷 매체 부디스트도어(Buddhist door)는 7월 21일 유럽인 최초 비구이자 대학승인 故 냐나띨로까 스님(1878~1953)의 제자이자 세계 최대 불교문학 출판사 중 하나인 불교출판협회(BPS) 창설자 냐나뽀니까 스님의 탄신일을 기해 스님의 생전 삶을 조명했다. 

스님은 1901년 7월 21일 독일의 하나우 지역에서 유대인 부모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1921년 그의 가족이 베를린으로 이주했을 때 그는 불교 관련 서적을 접했고 단숨에 매료됐다.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그는 이 무렵 독일 승려 냐나띨로까 스님이 스리랑카의 한 섬에서 서양 승려들을 위한 불교 수도원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 집권 당시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도 오스트리아로 떠나자 스리랑카로 건너가 서품을 받았다.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군의 공격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그는 어머니를 스리랑카로 모셔왔고, 승려가 된 아들의 영향으로 어머니 또한 불교에 귀의했다.

그러나 전쟁 여파는 스리랑카에까지 미쳤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직후 영국은 동남아시아 영토에 거주하던 모든 독일인을 억류하도록 명령했다. 냐나뽀니까 스님도 수천명의 독일인과 함께 체포돼 투옥됐다. 이후 6년 간 영국 포로 수용소는 그의 수행터가 됐다.

스님은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포로 생활에 적응했다. 수감 기간 동안 책을 쓰고 아시아의 불교 문헌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스님이 〈아비담마 연구〉 〈선과 악의 뿌리〉 〈염처-불교 명상의 핵심〉 〈삼법인〉 〈업과 과보〉 〈내면의 자유로 가는 길〉 등 수많은 저서를 남기는 바탕이 됐다. 스님은 포로에서 풀려난 후 스리랑카 수도원으로 돌아갔고, 1951년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이후 스님은 스리랑카 불교와 서구 사회를 연결하기 위해 주력했다. 1957년 신도들과 함께 영어 불교 입문서를 제작, 유럽 등에 무료 배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초판을 발행했을 때 유럽인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불교출판협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스님은 무신론과 유신론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설명하며 서구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해당 매체는 “일생동안 냐나뽀니까 스님은 불교 출판 업계에 한 획을 긋고, 독일 동양학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며 “자신의 상황과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삶의 주도권을 갖고 선구적인 삶을 살았다. 유대인의 자녀, 서양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해 불교도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양 사회에 불교를 전한 1세대 승려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라바다 전통에 관한 권위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정현 객원기자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