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가시를 뽑아주려면…

저마다 가슴에 가시를 품고 살지 
정후도 무언가 괴로운 게 아닐까
그 아이를 자세히 살펴보려무나 
가시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림= 강병호
그림= 강병호

앗 따가워!

가윤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후가 또 샤프로 등을 찔렀다. 짧고 얕게 콕.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다시 찌를 것이다. 길고 깊게 꾹. 정후가 뒷자리에 앉은 후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선생님께 자리를 바꿔 달라고 말씀드려야 할까.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대차게 쏘아붙여 줄까. 

그렇지 않아도 가윤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수업 시작 전 30분. 이 시간은 독서 시간이었지만, 가윤이네 반에서는 자유롭게 보냈다. 책을 읽는 아이들도 있었고, 종이접기나 마방진 같은 걸 할 수도 있었다. 가윤이는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 영어학원 과제를 하고 있었다. 어제 과제 하는 시간에 열심히 종이접기를 한 덕분이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어서 단어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는 단어 때문에 한숨만 푹 쉬던 중에 정후가 등을 콕 찌른 것이다. 

정후가 하는 행동은 분명 괴롭힘이 맞는데, 그렇다고 학교폭력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샤프심으로 찔러서 ‘하지 마’하고 소리치면 ‘뭘? 뭘 하지 말라는 거야? 난 가만히 있었는
데’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복도에서 마주 걸어오다가 가영이와 눈까지 마주쳤는데도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고는 ‘아유 오케이? 잘 보고 다녀야지’하며 싱긋 웃었다. 정후가 하는 거의 모든 행동과 말이 가윤이를 불쾌하게 했지만,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가윤이는 정후가 다시 찌르기 전에 뒤를 돌아봤다. 

“……피비어……”
“뭐라고? 피비?”
“지금 풀고 있는 문제 말이야. 답이 앰피비언스라고. 앰. 피. 비. 언. 스! 단어를 무조건 외우려고 하지 말고 뜻을 생각해봐. 앰피(amphi-)는 둘이라는 뜻이야. 비(-bi-)는 바이오, 라이프, 살다, 라는 뜻이니까 물과 땅 두 곳에서 살 수 있는 동물 앰피비언스.”

정후는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 쓰면서 한참을 더 지껄였다. 정후가 영어를 쓸 때는 너무 빨리 말해서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그중에서 또렷하게 귀에 박힌 말이 있었다. 스투피드. 이 자식이 진짜! 가윤이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일생일대의 폭력을 행사해야 할 시기가 가까워졌음을 가윤이는 직감했다. 가윤이는 눈을 감고 맘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며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좋아. 그럼 대답해봐. 앰피비언스가 우리말로 뭐지?”
정후의 잘생긴 얼굴이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다가 파랗게, 파랗게 질렸다가 다시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다. 

“양서류야. 두 양, 살 서, 무리 류. 양. 서. 류. 그럼 스투피드는 우리말로 뭘까? 여긴 한국이야, 정후야. 네가 여기서 잘 살아가려면 스투피드가 한국어로 뭔지, 그 말에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거야.”

정후가 전학 왔을 때 정후에 대한 아이들의 감정은 극호감에 가까웠다. 

정후는 가윤이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더 컸고, 길쭉한 다리로 달리기도 잘하고 공도 잘 찼다. 가만히 있어도 웃는 것 같은 눈과 살짝 올라간 입술 끝이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정후는 다섯 살 때부터 캐나다에서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말도 꽤 잘했지만 영어가 더 편하다고 했다. 정후 주변은 아이들로 북적였다. 캐나다 날씨는 어떤지, 오로라를 봤는지, 정말 주택가에 곰이 출몰하기도 하는지, 학교생활은 어땠는지, 캐나다 친구들과는 자주 연락하는지 아이들은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곧 시들해졌다. 아이들은 다시 일상의 관심사로 돌아왔다. 신비아파트 새 시즌에 대해서, MMORPG의 베타테스트에 대해서, 최애 아이돌의 생파(생일파티) 이벤트에 대해서 아이들은 이야기했고, 정후는 그 화제 어디에도 끼지 못했다. 

게다가 정후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정후는 도움을 받는 상황이 되는 걸 참지 못했다. 피구 하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다쳤을 때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쳐버렸다. 어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설명해주려고 하면 인상을 쓰면서 영어로 빠르게 씨부렁거렸는데,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조차도 말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헬이라든지 왓더라든지 F로 시작하는 단어 같은 것은 잘 알아들었다. 아이들은 점점 정후를 피했고, 그 무렵부터 정후는 가윤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정말 괴로운 게 뭐냐면요.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그 애랑 같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학교에선 바로 뒤에 앉아 있고, 학교 끝나면 피아노부터 방과후 바이올린, 미술학원, 수학학원까지 그 애랑 일정이 겹쳐요. 영어학원 가는 시간만 빼고요. 그 시간에 그 애는 합기도를 가는 것 같더라고요.”

가윤은 포교 동아리 ‘맑고 향기롭게’ 동아리방에서 종이접기를 하며 정후에 대해 연신 투덜거렸다. 동아리 활동은 토요일 어린이 법회가 끝난 후에 있지만,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여는 전시회 준비로 요즘은 주중에도 틈틈이 동아리방에 오곤 했다.

“그래? 이거 정말 문제인걸?”
혜원 스님이 빙긋이 웃으셨다. 가윤이는 혜윤 스님의 웃음이 좋았다. 혜원 스님의 맞장구 한 번에 웃음 한 번이면 복잡하고 괴롭게 느껴졌던 온갖 문제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리스본을 여행할 때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갔어. 수도원 벽에는 성 제롬의 생애가 조각되어 있었단다. 성 제롬 앞에서 발을 들고 있는 사자를 봤어. 제롬께서 사막에서 고행하고 있을 때 사자를 만났단다. 사자는 사납게 으르렁거렸지. 제롬은 두려움에 떨었어. 그런데 사자를 가만히 살펴보니 어딘지 이상했어. 사자는 앞발을 들고 있었어. 무척 고통스러운 것 같았어. 제롬께서는 두려움과 싸우며 사자에게 다가가 발을 살펴봤단다. 단단한 가시가 발바닥에 박혀 있었지. 길고 날카로운 가시를 뽑아내자 사자는 온순해졌어. 사자는 고통과 두려움 때문에 울부짖었던 거야. 그 후 사자는 제롬께서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했단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가시를 품고 살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잘 보살피며 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 정후도 무언가 두렵고 괴로운 게 아닐까. 그 아이를 자세히 살펴보려무나. 그 아이의 가시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정후는 가시를 뽑아주려고 하면 화를 낼 거예요. 아이들과 어긋난 것도 그런 문제 때문인걸요.”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그 가시의 존재를 알아차릴까 두려워서 으르렁거리기도 해. 그걸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니까. 굳이 가시를 뽑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알아봐 주고, 귀 기울여 들어 주고, 같이 아파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

종이접기가 재미있는 건 평면의 종이로 입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종이접기는 어렵다. 동아리방에서 혜원 스님과 함께 접을 때는 입체를 보고 입체를 만드는 거라 쉬웠지만, 책을 보고 접는 건 어려웠다. 책은 평면으로 입체를 설명하니까. 

점심시간에 가윤이는 사자의 엉덩이를 몇 번이나 접었다 다시 풀었다. 아무래도 포기하고 버려야겠다. 사자의 엉덩이가 너덜너덜해져서 어디가 선이고 어디가 면인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아까부터 정후가 종이 접는 걸 흘깃거리고 있었다. 화를 돋우려면 어느 지점에서 끼어들어야 할지 기회를 엿보는 거겠지. 아니다. 그러기엔 정후의 시선이 진지했다. 가윤이가 틀릴 때마다 안타까움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혹시 사자 접어본 적 있어?”
“아니. 기린은 접어본 적 있어. 엉덩이 접는 법이 비슷한 것 같아.”

“좀 도와줄래? 여기 이 부분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좀 헷갈리지. 여기는 안으로 접고 이쪽은 밖으로 접고, 15도 기울기로 접는 것보다 22도 기울기로 두 번 접는 게 더 잘 표현되는 것 같아. 무조건 책대로 따라 하려고 하지 말고, 머릿속에 먼저 그려보면 도움이 돼.”

“너 좀 하는구나.”
“좋아하니까. 그런데 종이접기는 재미있으려고 하는 거잖아. 가윤이 너는 종이접기 할 때 재미보다는 짜증을 더 많이 내는 것 같아. 그러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접어?”

“종이접기 전시회를 열거든. 기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마음처럼 안 되니까 자꾸 짜증만 내게 되네. 동아리 아이들이랑 공동작품을 내기로 했거든. 지금 드넓은 초원 위에 나무는 접어서 세워놓았는데, 동물이 턱없이 부족해. 초원이 텅 비었어.”
“동아리? 전시회?”

정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관심 있으면 같이 할래?”

종이접기를 하는 동안에는 자연스럽게 수다를 떨게 된다.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 속에 가끔 속마음이 비치기도 했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영어를 못해서 힘들었어. 나는 차츰 혼자 지내는 게 더 편하게 됐어. 내가 있었던 곳은 북부의 작은 마을이라 한국 사람들이 거의 없었거든. 그곳 생활에 겨우 익숙해지고 친구도 사귀었는데, 이젠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거야. 내 머릿속에는 두 개의 폴더가 있는 것 같아. 캐빈 폴더와 정후 폴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는 자꾸 잘못된 폴더를 여는 것 같아.”

가윤이는 정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잠깐 정후의 가시가 반짝 빛난 것 같았다. 

우승미 작가는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빛이 스며든 자리’가 당선되었고, 장편소설 〈날아라, 잡상인〉으로 제33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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