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3년동안 우리 사회 혼란스러워
누군가 행복의 길 밝혀주는 등불 켜줬으면
부처님, 모든 애욕에서 벗어나는 길 설파해
비난보단 칭찬, 의지하되 서로 겨누지 말자

그림= 최주현
그림= 최주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마음의 번민이나 생활의 불편함은 견딜 만하신지요.”

부처님이 제자나 신도들에게 문안을 갔을 때에 질문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같은 안부를 여쭙니다. 아침에 하루의 눈을 뜨는 순간에 정신이 돌아오면서 어제의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우리 사회는 한동안 코로나로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전에 없던 일이지만 그래도 적응해 나가면서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가고 있습니다. 한 동안 긴 잠을 자듯이 멈추었던 우리는 이제 어디로 발걸음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마치 벌판에 수많은 소들이 누군가가 뛰면 그곳을 향해 뛰어가듯이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습니다. 사찰도 마찬 가지입니다. 대중들의 관심이 움직이는 곳을 향해 함께 뛸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같은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느 곳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 스스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나도 그 가운데에 움직이는 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절에 누군가가 길을 밝혀 주는 큰 등불을 켜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이 길이야! 여기로 가면 행복으로 가는 길이 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곳을 향해서 신나게 달려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류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몸소 찾아내 그 길을 45년간 우리에게 일러주고 가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길을 찾지 못해서 답답해하던 인류에게 안내자가 돼주고 불을 밝혀서 길을 열어 주신 스승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후 숲에 계실 때에 야사라고 하는 청년이 괴로움에 빠져 뛰어다니며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밤사이 즐겁게 놀다가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엉망이 된 파티장과 아름다웠던 여인들의 헝클어진 모습을 보고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청년은 “아! 이 무슨 재앙인가”라며 탄식합니다. 이를 보고 부처님은 “야사야, 여기에는 재난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야사는 이 말을 듣고 기뻐서 그때부터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도 매일 고통과 번뇌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침이면 신문에서 갈등과 고통의 글과 사진이 나오고 방송에서는 그 장면과 목소리들이 들립니다. 야사의 괴로움이 매일 아침 우리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때 이 고난이 없는 길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반가운 말인가요. 

부처님은 고난이 없는 길을 “보시를 실천하고 계율을 준수하면 하늘에 태어나게 된다. 애욕에는 환난과 공허가 있기 마련이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난다”라고 안내해 줍니다. 

우리가 아는 단순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부처님이 제시한 길은 분명합니다. 보시는 ‘나의 고집과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고, 계율은 ‘내 행실과 언어를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저마다 건강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건강의 개념을 몸과 정신 그리고 영성의 건강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한 번 더 살펴본다면 마음의 고통은 누군가의 태도나 말에 의해서 상처를 입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나의 친절한 말과 태도는 나와 상대를 건강한 삶으로 안내하는 길잡이입니다.

아프리카의 누우 떼들이 대이동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밀치고 밟아서 죽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적을 방어하고 서로가 힘이 되기 위해서 함께 모여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서로를 해치는 경우가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찾는 길은 함께해서 행복한 세상입니다. 그런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나의 고집과 집착은 소의 뿔과 같습니다. 그 뿔을 나를 겨눠도 크게 상처가 되지만 남을 향해 겨눠도 서로에게 큰 상처가 됩니다. 부처님이 말한 하늘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주변의 인연들과 서로서로 힘들 때는 힘이 되어주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하는 사회가 우리가 하늘에서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애욕은 날카로운 뿔입니다. 그것을 향해서 달리는 한은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자칫하면 상대에게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자신의 선택이 결국 우리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며칠 전에 가까운 분에게 화가 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친절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몸에 열이 나고 화가 일어났지만 지나고 나니 진정이 됩니다. 다시 그 분을 만났습니다. 막상 얼굴을 보니 그 모습도 그 마음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자칫 뿔을 들이 밀 뻔 했습니다. 상처는 순간이지만 치유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했습니다. 

한편, ‘남의 잘못은 왜 꼭 고치려고 하고 기억해 두려고 애를 쓰는지 모르겠다’는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남에 대한 칭찬은 가볍게 지나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경책보다는 칭찬이 더 소중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허물은 남이 덮어주면 고마워하고, 칭찬은 누군가가 더 해줬으면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그것을 바라면서도 남에게는 인색합니다. 칭찬은 아무리 들어도 넘치지 않습니다. 

비난은 이상하게 영향력이 큽니다. 열 마디 칭찬을 들어도 한 마디 부정적인 말에 걸려서 괴로워하는 자신을 봅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두려움이 있어서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은 해침을 당할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생명 있는 존재 모두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입니다. 백번 평화롭다가도 한 번의 위험에 목숨을 잃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혼자가 되면 약해집니다. 이런 저런 불안과 우울감의 공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누우 떼처럼 함께 의지하되 서로를 겨누지 않아야 안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70대 노부부가 어둠이 내린 해변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차로 지나가다가 얼핏 보니 잘 아는 신도였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기까지 오기에는 여러 난관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두 분의 걸음에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어내고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어느 삶의 길로 가야 행복한 사회가 기다릴지 찾고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이 우리에게 “여기에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이 있다”라는 큰 울림으로 다가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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