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2월 25일 국립현대미술관장 재임명
미술한류 등 ‘새로운 3년 비전’ 제시
2005년 <불교평론> 발표 논문 통해
한국불교미술의 창조성 부재 지적해
“한류, 이제는 순수예술로 이어져야”

청년기 방황 때 오대산 찾아 삶 전환
‘깨달음’·‘아름다움’ 무엇인가 화두로

1988년 실크로드, 붓다로드에서 만행
붓다로드서 한국불미술 다시 보게 돼

本紙서 ‘윤범모의 불도기행’으로 연재
묻혀진 불모인 김복진 발굴한 업적도

윤범모 관장은…1951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1977년 동국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를 마쳤다. 1984~1986년 호암갤러리 큐레이터, 1993~1999년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1994~2016년 가천대 교수, 2007~2009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2011~2015년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2012~2016년 고암미술문화재단 이사, 2014년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큐레이터, 2015년 박수근미술상 운영위원장, 2016년 한국민화센터 이사장,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 2017~2019년 동국대 석좌교수, 2018년 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을 거쳐 2019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8년 〈시와 시학〉 신춘문예 등단했으며, 저서 〈한국현대미술 100년〉 〈평양미술기행〉 〈한국근대미술〉 〈나혜석, 한국근대사를 거닐다〉 〈한국미술론〉 〈백년을 그리다-김병기〉, 시집 〈노을 씨, 안녕〉  〈토함산 석굴암〉 등이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윤범모 관장은…1951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1977년 동국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를 마쳤다. 1984~1986년 호암갤러리 큐레이터, 1993~1999년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1994~2016년 가천대 교수, 2007~2009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2011~2015년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2012~2016년 고암미술문화재단 이사, 2014년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큐레이터, 2015년 박수근미술상 운영위원장, 2016년 한국민화센터 이사장,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 2017~2019년 동국대 석좌교수, 2018년 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을 거쳐 2019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8년 〈시와 시학〉 신춘문예 등단했으며, 저서 〈한국현대미술 100년〉 〈평양미술기행〉 〈한국근대미술〉 〈나혜석, 한국근대사를 거닐다〉 〈한국미술론〉 〈백년을 그리다-김병기〉, 시집 〈노을 씨, 안녕〉 〈토함산 석굴암〉 등이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미술로 감동과 영감을 주는 사회를 만드는 데 미술관이 앞장서겠습니다”

지난 2월 25일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재임명된 윤범모 관장의 ‘새로운 3년 비전’이다. 국립미술관의 관장으로서 이 시대에 제시할 수 있는 비전으로 이만한 것이 없을 것 같다. 이 사회가 미술의 힘으로 감동과 영감을 받아 지속되는 사회가 된다면, 즉 문화의 가치가 사회의 원동력이 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훨씬 긍정적인 사회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평소 “한국미술의 역사 절반이 불교미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불교미술과 불교를 모르면 우리 문화의 전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윤 관장이기에 그가 제시하는 비전의 전모에 관심이 모인다. 윤 관장의 비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의 비전속 ‘미술’에 오늘날의 불교미술과 불교의 총량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지론 속 ‘불교미술과 불교’의 시제가 ‘과거형’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그의 비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립현대미술관장이라는 자리는 우리나라 예술문화의 방향성에 깊게 관여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 중의 하나다. 우리 예술ㆍ문화의 근간에 불교가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 윤 관장이기에 그의 ‘앞으로 3년’이 불자들에게는 ‘불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윤범모 관장을 만났다.

한국불교미술의 미래를 묻다
“장르는 얼마든지 나눌 수는 있는데, 하여튼 생활 속에 함께 어우러지는 미술이 되어야합니다.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말고 생활 속에서 같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그 무엇이 되어야지 울타리 안에 갇혀 있으면 그건 박제된 거라고 생각해요.”

걱정은 예상대로였다. 윤 관장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이 알고 있는 ‘불교미술’과 ‘불교’는 최소한 ‘한국의 미술’이라는 영역에서는 ‘과거형’에 가까웠다. ‘근간’이었던 것이 이제는 전 방위적으로 쓰이지 않는 모티브이고 오브제가 되었다. ‘불교미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불사’라는 의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불교적 소재나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미술이나 예술 활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미술’이라는 커다란 그림 속에서의 불교미술과 불교의 총량은 미미한 것이다. 불보살의 상호를 그려내는 것만으로 ‘미술’이라는 커다란 스팩트럼 속의 한 색깔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 형식과 내용이 신라, 고려, 조선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는 것이다.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작된 불교미술이 오늘날의 우리 현대미술의 근간이 되기 위해선 불교미술과 불교가 우리의 생활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제인 것이다.

“미술과 예술이라는 말 자체에는 창의성이라는 개념이 포함돼 있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건축을 하던 불상을 새기든 불화를 그리든 넓게 보면 모두 미술활동인데, ‘불사’라는 의미에 갇혀 신라·고려시대 작업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운 것이죠. 신라시대의 미술은 신라시대의 정신이 반영된 미술이기 때문에 ‘신라미술’이라 부르고 당시에는 당당히 ‘미술’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럼 이 시대에서 ‘미술’로 불리려면 이 시대의 생각과 정신이 반영된 미술이어야 하는 것이죠.”

윤 관장은 2005년 불교평론을 통해 발표한 논문에서 ‘한국불교미술의 창조성 부재’를 이야기한 바 있다. 윤 관장은 한국불교미술이 한국현대미술의 한 축이 되기 위해선 사부대중의 의식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라시대에 ‘미술’이었던 것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도 지금은 미술이 아닌, ‘불사’로 불리는 것은 현대화 내지는 동시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그 이유 중에는 사부대중의 생각이 ‘신라’에 멈춰있다는 것이다. 불교 안에 살고 있는 사부대중이 그 시대를 건너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 관장이 새롭게 제시한 3년의 비전은 크게 4가지이다. △확장과 연결 △미술한류 △생태미술관 △디지털혁신이다. 그 4가지 비전 중에서 ‘미술한류’가 불교미술의 미래와 연결된다.

“전시나 출판, 교육 등 미술관 고유 업무로 연결해서 우리 문화를 튼튼히 하는 데 국립현대미술관이 일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K-pop 등 대중문화가 한류를 이루었다면 이제 순수예술이 그 뒤를 이어가야죠. 미술이 그 첫 번째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술 한류’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올해를 원년을 삼으려고 합니다. 해외에서 우리 현대미술 특별전이 여러 군데서 열릴 예정입니다.”

윤 관장이 이야기하는 ‘미술 한류’에 한국불교미술이 함께할 수 있을까. 한국의 미술 자체가 국제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못한 상황에서 ‘미술 한류’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있어야 할까. 윤 관장은 우선 국제시장에서 우리 미술의 이해도를 높이는 게 우선 과제라고 했다. 그 노력에는 우리 전통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채색전통’이다. 그리고 그 채색전통의 중심에는 불교미술이 등장한다.

“우리 민족이 원색을 좋아해요. 건축(단청)만 봐도 알 수 있죠. 완전 오방색 중심으로 쓰잖아요. 그 채색문화를 다시 조명하는 것이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고구려 고분벽화부터 고려와 조선시대 불화 궁중회화 이른바 민화까지, 우리 생활 속에서 늘 함께해왔던 ‘채색’을 다시 연구하고 재조명해 부활시키면 우리만의 독자성을 부각시킬 수 있고, 우리 미술에 대한 정체성을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채색전통을 이야기하려면 탱화를 비롯한 많은 불교미술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화가 만들어내고 써왔던 그 채색전통의 보루는 사찰입니다. 사찰에는 화승의 계보가 이어지잖아요. 그래서 사찰이 가지고 있는 채색전통에 대한 체계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신 성파 스님 같은 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져오는 전통과 새로운 창조를 쉼 없이 모색하고 있는 성파 스님은 전통 미술의 재료와 기법을 다 꿰고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채색화 특별전이 열릴 예정입니다.”

‘붓다로드’서 한국불교미술을 다시 보다
“길 위에서 길이 어디냐고 묻는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고 있다. 길이 어디예요? 길 위에서 길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래서 행장을 꾸렸다. 그동안 참 많이도 걸었다. 많은 곳을 다녔다. 아니 더 정확한 표현은 방황이었다. 방랑이나 산책과 같은 단어는 하나의 사치였다. 아, 길은 어디에 있는가.”

윤 관장은 2017년 本紙에 ‘윤범모의 불도(佛道)기행’을 연재한 바 있다. 그는 1988년 실크로드와 인도의 붓다로드를 걸으며 ‘깨달음’과 ‘아름다움’에 대해 깊어간다. 부처와 미술에 대해 깊어간다. 연재는 윤 관장이 길 위에서 그 두 가지에 깊어가는 이야기다.

그는 부처의 흔적을 지닌 길, ‘붓다로드’를 걸으며 우리미술을 다시 보게 된다. 아니 정확한 표현으로는 한국불상을 다시 보게 된다.

“불상은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도 속인의 눈으로 ‘최고의 불상’ 단 하나만을 골라보라 한다면, 나는 토함산 석굴암을 꼽을 것이다. 만약 한반도가 침몰되어 단 하나의 아이템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토함산 석굴암을 건질 것이다.”

그는 불상을 보러 다니면서 많은 의문들을 품게 됐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길은 어디에 있는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깨달은 이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불상이 깨달은 이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그는 불상들을 바라보다 또 다시 생각한다. 불상을 누가 만들었을까. 그 많고도 많은 지구상의 모든 불상을 누가 만들었을까. 불상을 만든 이들을 불모(佛母)라고 부른데, 그들은 모두 깨달았단 말인가. 그는 이어지는 자문을 발자국삼아 걷고 또 걸었다.

“불교 전래의 길, 아니 불도, 그 깨달음의 길, 노상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래서 나의 화두는 깨달음과 아름다움이 되었다. 미술이라는 단어 하나에 담기에는 무언가 아쉽게 하는, 물론 절에서는 미술 역할을 ‘장엄’이라고 한다. 나는 이 ‘장엄’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찰은 불교미술관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절을 세울 때, 미술관을 건립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사찰은 미술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사찰 순례는 미술관 탐방의 길이었다. 바로 깨달음의 길이면서 아름다움의 길로 안내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윤 관장은 하나의 길에서 두 개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길을 ‘방황’이었다고 했다. 그 ‘방황’의 시작은 스무 살 청년 윤범모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대산에서 다시 태어난 스무 살 윤범모

“무슨 인연이었을까. 우연히 나는 어떤 장소로 잠입해 들어갔다. 거기가 바로 강원도 오대산이었다. 오대산, 그렇다! 오대산. 거기서 나는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그것은 죽음이어도 무관했고 새로운 탄생이어도 무관했다. 무엇인가의 변화가 절실했다.”

삶의 무게는 어느 날 갑자기 무거워지는 것일까. 갑자기 불어난 물살처럼, 거대한 파도처럼 스무 살 윤범모의 삶은 스무 살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스무 살의 윤범모는 삶을 ‘매일같이 살아남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실패’라고 불렀다. 그런 그를 끌어당긴 것은 오대산이라는 거대한 숲이었다. 그리고 그 숲은 불문의 내력이 가득한 곳이었다.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인연’뿐이었다.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 섰던 스무 살 윤범모는 다시 살기로 했다.

“강원도 산자락에서 우두커니 한 철을 보냈다. 그리고 하산을 했다. 그냥 세속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부끄러움만 주머니를 가득 채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열병과 같았던 통과의례는 퇴색되었다. 오대산은 새로운 세월을 안게 해주었다. 어쩔거나 스무 살 언저리의 오대산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청년 윤범모는 한 철 머문 오대산에서 새로운 윤범모로 깨어난다. 자신이 한 철 머문 곳이 부처들의 산이었다는 사실, 적멸보궁, 월정사, 탄허, 자장법사 이야기…. 오대산에서의 이야기를 묶어 낸 저서 〈아하! 절에 불상이 없네〉에서 그는 “오대산. 상처. 나의 비밀. 나의 그리움”이라고 적고 있다. 깨달음과 아름다움의 길이었던 붓다로드, 어찌 보면 그 만행의 불씨는 오대산에서 채화된 것이 아닐까. 오대산이 없었다면 그 길이 ‘깨달음’과 ‘아름다움’이라는 화두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때, 아름다움에 대해 깊어질 수 있었던 윤범모는 훗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된다.

불상에 근대 옷 입힌 불모, 김복진
한국불교미술사에서 근대사라고 할 수 있는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역사가 없었던 것인지, 역사는 있었지만 묻혀버린 건지 알 수 없다. 하여튼 기록으로 남아있는 역사는 많지 않다. 결과적으로 한국불교미술의 근현대사의 연구가 활발하지 않았다. 그 기근 속에서도 빛나는 기록이 있다.

윤 관장의 많은 이력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미술평론가’이다. 윤 관장은 1982년 동아일본 신춘문예에 미술평론가로 등단한 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미술평론가로서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는 근현대 예술가 발굴과 재평가일 것이다. 윤 관장은 나혜석과 김복진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미술사에서 누락됐던 두 작가를 찾아냈다. 특히 김복진의 연구는 좀 더 주목된다.

약 30년 동안 김복진의 뒤를 쫓았던 윤 관장은 2010년 펴낸 〈김복진 연구(동국대 출판부)〉을 통해 예산 정혜사 관음보살상과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과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미완성)이 김복진의 작품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김복진(1901~1940)은 일제강점기에 한국 근대미술의 토대를 이룩한 선구적인 작가로 평가된다. 그는 일반 조소작가와는 달리 전통적 불상예술에도 일가를 이루어 근대기 불상조각의 새로운 양식을 선보인 근현대 불모(佛母)라고 할 수 있다.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김복진은 짧은 생에서 5년 반 동안의 옥중생활까지 하면서도 10년 정도에 불과한 짧은 기간 동안 근대기 조소작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윤 관장은 책에서 “일제강점기에 한국 근대미술의 토대를 이룩한 김복진이 미륵상을 주로 조소하면서 신라불상의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고 근대미술로서의 가치를 부여했다”고 평가했다. 김복진은 조소예술계에서 ‘정관파’를 형성할 만큼 한국미술사에 선명한 업적을 남겼지만 전해지는 작품이 전혀 없어 그의 존재와 가치를 알 수 없었다. 사라졌던 불모 김복진의 발굴은 미술사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한국불교미술의 역사를 넓힌 불사라고도 할 수 있다. 불모를 찾아내는 일 역시 또 다른 불모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윤범모, 그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면 지금의 이름이 있기까지 많은 소임의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임과 소임 사이사이에는 적지 않은 불사의 업적이 있었다. 이제 그의 새로운 소임에 더욱 커다란 불사를 기대해본다.

2021년 전국 국공립미술관장 회의에 참석한 윤범모 관장(우측 네 번째).
2021년 전국 국공립미술관장 회의에 참석한 윤범모 관장(우측 네 번째).
1980년 중반 뉴욕 백남준스튜디오에서 백남준 등과 함께 기념촬영. 좌측 두 번째 윤범모 관장.
1980년 중반 뉴욕 백남준스튜디오에서 백남준 등과 함께 기념촬영. 좌측 두 번째 윤범모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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