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 속 숨겨진 ‘불교 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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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인도 수학자들은 空을 수학에 투사해 ‘0’ 발견
붓다가 머문 ‘실라벌성’, 韓서 서라벌→ 서울로 변화
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 신미대사 도움 있어 가능
붓다의 中道, 마음자리 ‘0’있을 때 행복하단 가르침

한국문화의 70%는 불교문화라고 하지만 많은 국민들은 실감을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 ‘쌀’의 어원은 고려시대의 ‘ᄇᆞᄉᆞᆯ(菩薩)’이 음운변화하여 ‘ᄇᆞᄉᆞᆯ→ᄡᆞᆯ→쌀’이 되었는데 햅쌀과 햇과일의 종성(終聲)에서‘ ㅂ’과‘ ㅅ’이 남아 어원을 방증한다.

쌀로 빚은 술 종류인 정종(正宗)은 ‘올바른 불법’이라는 뜻이다. 현대인의 필수품인 핸드폰의 010(공일공)과 수학의 0.1(영점일)에서 기호일 때는 ‘ 공’, 수학에서는‘ 영’으로 구분해 읽는다. 수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과학을 설명하는 언어이듯이 붓다의 공(空)사상은 학문과 생활을 증명하는 다양한 예로 틈입해있다.

空사상과 ‘0’의 발견
BC 6세기 붓다께서 깨달으신 공(空)사상이 만물의 실상이라는 사실은 인도사회의 상식이 되었고 AD 6세기 인도의 수학자들은 철학의 공(空)사상을 수학 세계에 투사(投射)해 ‘0’이 발견된 것이다. 대 수학자이셨던 김용운(金容雲) 교수께서 필자에게 서신으로 가르쳐주셨던 당신의 지론이기도 하다. 

인도인이 ‘0’을 발견한 후 아라비아 상인들이 사용하던 9개의 숫자에 ‘0’이 편입되는 바 이는 수학계의 대사건이다. ‘0’은 편입생인 셈으로 따돌림을 당하기 마련인데 ‘0’은 어떤 수(數)로도 나눌 수 없으며, 아무리 큰 수라 할지라도 ‘0’으로 곱하면 ‘0’이 된다. ‘0’이 숫자의 왕이 된 것은 법왕(法王)이신 붓다의 깨달음의 정수가 ‘0’에 담겨있는 까닭이 아닐까. 

대부분 불교의 교의(敎義)는 수로 표현되었다. △일련탁생(一蓮托生) △불이문(不二門)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오백나한(五百羅漢) △육바라밀(六婆羅密) △칠불(七佛) △팔정도(八正道) △구품(九品) △시방(十方) △108번뇌 △팔만대장경 등이다. 

사찰의 만(卍)과 히틀러 나치의 문장인 (swastica)는 어떤 관계일까. 팔랑개비 풍차모양으로 우측의 풍향으로 돌아가는 은 ‘우(右)만’, 사찰의 만(卍)은 ‘좌(左)만’이라고 한다. 이 문장의 유래는 세계 최고(最古)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유프라테스·티그리스·인더스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의 중앙의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듯한 역동적인 선으로 표현되었다. 원시 인류의 보편적인 태양숭배 의지처의 대상으로 세계 곳곳에서 그 흔적이 보인다. ①태양 ②길상(吉祥) ③윤회를 뜻하는 이 문장(紋章)에서 히틀러의 선조인 인도의 아리안족은 ①, 사찰에서는 ②, ③을 선택했다. 히틀러는 모든 독일 국민들이 자신을 태양처럼 숭배하라는 뜻에서 이 문장을 택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는 신라 때 들어온 산스크리트어로 발음은 이(伊), 뜻은 ‘기도로 얻다’이다. 오늘날 대웅전 지붕 옆면에 있는 삼각형 합각(閤閣)의 원이삼점(圓伊三點)으로 변형되었다. 또한 인도문화가 해상으로도 들어왔는데 백제에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가 불법을 들여온 포구(浦口)를 오늘날 법성포(法聖浦)라 부르고 있다. 

붓다가 45년의 설법 가운데 25년 동안이나 머무르셨던 곳이 사위성(舍衛城) 일명 실라벌성(室羅筏城)이다. ‘실라벌→서라벌(신라의 옛이름)→셔→서울’의 유래이다. 신라는 계(戒·SiLa)에서 비롯되었다. 본래의 불교용어를 기독교에서 차용(借用)해 쓰게 되어 불교계에서 바뀐 용어로는 선교→포교, 장로→큰스님, 기도→염불, 예배→예불 등이 있다. 

훈민정음 창제와 신미대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글’은 어떠한가. 지난해 12월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된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중봉 성파 대종사께서 올해 한 법회에서 한글은 신미(信眉) 대사가 창제하셨다면서 못 박아 말씀하셨다. 이 이론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조선왕조실록〉의 특징은 방대함과 정확성인데 훈민정음 창제에 관련된 기록이 〈세종실록〉에 없다. 국시(國是)가 유교인 조선시대에 붓다의 일대기인 〈석보상절(釋譜詳節)〉과 찬양가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여기에다 합본인 〈월인석보〉의 서문에 세종께서 불교 교의에 맞는 108자로 글을 지으셨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신미 대사의 부친은 태종 때 영의정까지 지냈던 양반의 가문이었다. 신미 대사의 속명은 김수성(金守省)이며, 아우는 집현전 학자인 김수온(金守溫)으로 언어학에 두루 능통했던 형을 세종에게 소개하여 발탁되었던 듯하다. 논란이 있는 주장이겠으나 필자는 이 주장에 마음이 기운다.
이밖에도 인도에서 들어온 문화는 뜻밖에 많다.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팔꽃(morning glory)’은 인도의 귀화종이다. 인도의 놀이인 장기는 중국을 거치면서 변모되었으나 인도에 사는 코끼리(상·象)가 남아있다. 생선의 ‘아가미’, 부엌의 ‘아궁이’, ‘문지방 밟지마라 재수없다’ 그리고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놈’이라는 속언은 인도 카스트 제도의 4계급 아래인 불가촉천민(Untorchable)의 발에서 유래되었다. 

어두운 녹갈색인 카키색도 영국의 식민지 당시 인도병사의 제복에서 비롯되었다. 덕수궁의 건축양식인 건물 전면 둥근 기둥의 열주식(列柱式) 천개(天蓋·porch)도 인도 건축양식이다. 열대 나라에서 외부의 뜨거운 열기(熱氣)를 건축의 전면에서 미리 차단하기 위한 공법(工法)이다. 인도의 KAIST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의 모델이다.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문화에 대한 내용이 뜻밖이라는 독자가 많으실 듯하다. 이 세상에는 각자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구(警句)를 ‘그리하지 않을 듯한데 실제로 그리하구나’, 불연기연(不然其然)이라고 한다. 

지금까지의 생활 불교문화 외에 삼국시대부터 온 백성과 국민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불교의 핵심과 본질은 무엇일까.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적어본다. 

‘0의 행복’ 찾다
어느 해 병원의 회복실에서 느낀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은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안도감은 아니었다. 생각은 비약하여 고교 수학 시간의 X, Y 좌표평면이 떠올랐다. 나의 마음자리(불가에서는 염처(念處))가 음주 생활일 때는 에서 즐거웠고, 입원할 때는 로 괴로웠다. 지금의 마음자리는 0에 있는 듯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0의 행복’이라고 외쳤다. 회진을 돌던 의사는 회복기의 후유증으로 오해했다. 붓다 역시 마음자리가 태자 시절에는 , 고행 시절에는 , 득도하신 후에는 마음자리가 0(공(空)·중도)에 있으셨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즉, 인간의 시간에는 ①즐거움·좋음의 시간 ② 괴로움·싫음의 시간뿐 아니라 ③즐겁지도 괴롭지도, 좋지도 싫지도 않은 즐겁고 좋은 시간을 깨달으신 것이 ‘중도(中道)’였다고 다시 한번 확신했다. 

붓다의 깨달음은 없는 사실을 발명하신 것이 아니라 제3세계의 시간도 행복할 수 있다는 대발견의 명제(命題)일 것이다. 인간은 대부분 가장 풍부한 이 제3의 시간이 특별하지 않은 보통(普通)으로 여기기 때문에 대부분 놓치고 살게 마련이다. 병상은 나에게 보리수였던 셈이다.

붓다 득도의 실마리는 무엇이었을까. 싯달다 태자 왕가 이름의 돌림자는 농경 국가답게 ‘밥·반(飯)’이었다. 아버지 정반왕(淨飯王)을 비롯해서 백반(白飯), 곡반(斛飯), 감로반(甘露飯)이었다. 태자는 상품(上品)의 쌀밥 맛을 좋아하는 미식가였으며 수학에 비상한 천품을 갖고 태어났다고 〈불소행찬(佛所行讚)〉이라는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사회의 통념은 고행을 한 만큼 영혼의 세계는 높아진다고 본 것이다. 

붓다는 출가 후 5년 6개월 동안의 고행 수도가 무익(無益)함을 깨닫고 중도(中途)에서 중단하였기에 중도(中道)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 계기는 수자타라는 처녀의 쌀 우유죽 공양으로 몸을 추스르시게 된 사건이 아닐까. 

붓다는 재수(再修) 끝에 밥맛을 통해 이 세상에는 ‘제1세계인 맛있다’(+)와 ‘제2의 세계인 맛없다’(-),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0) 제3의 보통 행복의 세계를 발견하신 인생의 ‘콜럼부스’다. 고승(高僧)들이 제자에게 의발(衣鉢, 옷과 밥그릇인 바리때)을 전하는 전통은 밥그릇이 붓다 깨달음의 기념물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중도’가르침은
붓다 이전의 많은 선배 스님들은 왜 득도하지 못했을까. 이들은 세속에서의 맛을 출가 후에도 같은 쓴맛만 보았기 때문이다. 붓다 깨달음인 중도(中道)는 수학의 좌표평면에서 마음자리가 0에 있을 때 행복하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말이 마음자리를 중도(0)에 두는 것이 중심(中心)이며 모으는 것이 집중(集中)이요, 마음자리를 0에 정(定)하는 것이 ‘선정(禪定)’이다. 이 또한 불교문화에서 전해진 오늘날 우리 생활 속의 언어들이다. 

사람의 괴로움은 지나간 일과 아직 오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생긴다. 불교의 대명사인 염불(念佛)의 ‘염(念)’은 ‘지금(今)+마음(心)’이다. 즉 염불은 마음자리가 양극단()을 피하고 ‘지금 마음(0·zero mind)’에 두는 중도(中道)이다. ‘역전(驛前)앞’에서 ‘전(前)’은 ‘소리’이며 ‘앞’이 뜻이듯이 중(中)은 ‘발음’이며 도(道)가 ‘뜻’이다. 도(道)를 파자(破字)하면 ‘首(처음·0)’와 ‘(쉬엄쉬엄 갈 착, 일명 책받침)’의 합자(合字)이다. 즉 마음자리가 처음으로 간다는 뜻으로 곧 도(道)는 ‘0’을 뜻한다. 

불가(佛家)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진공묘유(眞空妙有) 그리고 노자(老子)의 명구(名句)인 ‘도생일 일생이이생삼 삼생만물(道生一 一生二二生三 三生萬物)’에서 도(道)를 0으로 해석해야 올바른 뜻이 가능해진다. 

붓다의 중도(中道)와 공자의 중용(中庸)은 쌍둥이 말이다. 용(庸)을 ‘평상야(平常也)’라고 하여 일상(日常)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평범(平凡)+일상(日常)’의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물리지 않는 쌀밥맛과 물맛 같은 ‘중도 행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중도(中道)와 중용(中庸)은 같은 개념어인데 영역(英譯) 또한 복수인 ‘Happy midium’과 ‘golden mean’으로 흥미롭다. 여기서 ‘mean’은 뜻의 의미가 아닌 ‘절묘한 중간’이다. 그러나 초보의 해석으로 ‘인간이 발견한 금쪽같은 뜻’이라는 의미도 살리고 싶다. 

난해하게 인식되는 불교 사상들은 사실 상식의 철학으로 자신의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의지한다고 하여 ‘의자종교(依自宗敎)’라고 한다. 즉, 종교란 근본(宗)으로 돌아가라는 가르침(敎)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많은 불자들은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방편(方便)불교를 믿고 있다. 

당나라의 운문(雲門) 선사께서 불교를 쉽지만 정수(精髓)를 깨우치게 창안하신 것이 일자관(一字關)이다. 한 제자의 불교에 대한 질문에 ‘보(普)’라고 하셨다. 선(禪)불교의 개창도량(開創道場) 가운데 보통사(普通寺)라는 절이 있다. 불교는 ‘보통의 시간’을 행복으로 깨닫는 심교(心敎)이다. 불교의 정수(精髓)인 선(禪)을 일명 무사선(無事禪)이라고 한다. 무사(無事) 역시 불교에서 온 말로 ‘무사하시죠’라는 인사말은 일상어이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구촌 사람들은 ‘무사한 보통의 시간’이 곧 행복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이규항 前 KBS아나운서는
서울 출생. 고려대 2학년 때 학년을 4학년으로 올려 KBS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규정에 어긋나 졸업하던 해 다시 KBS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야구, 씨름, 유도 전문 캐스터로 활동하며 35년 동안 KBS 아나운서로 봉직했다. 퇴직 후에는 일본 프로 야구의 주니치로 이적한 선동렬, 이종범, 이상훈 선수의 활약상을 중계했다. 저서로 〈부처님의 밥맛〉 〈0의 행복〉 〈한국어 발음사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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