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자유

‘반야오솔길’ 카페에 올린 시 1백여 편 모아
이번 시집은 ‘산중소식지’이자 ‘산중실록집’
시와 도, 세상과 산중 표현한 시법이자 시어

지안 스님 지음/사유수 펴냄/1만4천원
지안 스님 지음/사유수 펴냄/1만4천원

“살아간다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다” 〈귀로〉

“하늘은 자시에 깨고, 땅은 축시에 깨고, 사람은 인시에 깬다. 〈새벽은 불침번〉

통도사 반야암 회주 지안 스님은 통도사 강주와 조계종립 승가대학원장, 조계종교육원 역경위원장, 고시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전통적인 경전강의와 승가교육에 힘써왔다. 평생 경전 관련 강의와 글만 쓰시는줄 알았는데, 시집을 냈다고 껄껄 웃으시며 1주일전에 전화를 주셨다. 사실 지안 스님과는 10년전, 도반인 호진 스님과 함께 펴낸 〈성지에서 쓴 편지〉의 서평을 쓰면서 인연이 됐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살인적 더위와 숙소도 제대로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목숨 걸고 구법의 길을 나선 도반 스님간의 주고받은 진솔한 편지글을 통해 어떤 것이 부처님의 인간적인 참 모습인지를 잘 조명한 책이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집을 내셨다는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안 스님은 언제 뵈도 순수하시고 맑은 수행자의 기품이 넘쳐 충분히 시심(詩心)을 글로 옮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읽어보니 스님이 사시는 반야암의 주변 환경도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지안 스님은 책 머리말에서 “방 밖으로 나가면 숲속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있다. 매일 이 길을 걸으며 새소리를 듣고 다람쥐를 만난다. 오가는 이 길이 나의 사색로이다. 숲 속을 걸으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한다. 부질없는 망상이 떠 오를 때도 있고 어느때는 경전 구절이 떠올라 마음을 반조해 보기도 한다. 숲속을 거닐면서 정서적 순화를 느끼며 마음에 그윽한 회포가 서려올 때도 있다. 이 시들은 분수밖의 일을 하는 것 같아 주제 넘는다는 생각도 들지만, 내 사색의 길에 떨어져 다람쥐가 주워먹는 도토리 같은 내 생각의 언어들이다”고 시집을 낸 배경을 설명한다.

지안 스님의 이번 시집은 ‘산중 소식지’이자 ‘산중 실록집’이다. 스님은 이번 시집을 통해 뭇 사람들이 존재의 심연 속에서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며 찾아가고 싶어 하는, 덧나지 않은 오지(奧地)의 진실한 산중 소식들과 그 기록들을 봄날의 미풍처럼, 여름날의 해풍처럼 배달해 준다. 도대체 산중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번 시집을 보면 그곳에선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산중은 개산(開山)의 그 시절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사(無事)의 전통을 유지하고 언제나 적멸을 주인공으로 품어 안고 살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아무일도 되지 않는 묘용을 함께 공부하는 곳이다. 그러고 보면 뭇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며 귀를 기울이고, 때론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연인이라도 만나러 가듯 발길을 뜨겁게 내딛는 그 산중의 중차대한 소식은, ‘아무 일이 없다’는 그 단순하나 심오한 무사의 소식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산중서 불어오는 새소식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소식을 들음으로써 마치 잘 달여진 탕약을 먹은 것처럼 안심하고 일상을 다시 사는 힘을 얻는다.

저자인 지안 스님은 이번 시집에서 영축산과 운장산의 소식을 가장 많이 전한다. 그 산들은 누구도 편애하지 않는 ‘불인(不仁)’의 ‘평등성(平等性)’을 지닌 무심과 무위의 산이지만, 스님은 그 산에서 보배로운 소식을 법성게의 보배비를 받아 안듯 진정 큰 마음의 그릇으로 받아 지니고 산다. 이런 일은 지안 스님이 산과 깊이로 산 세월의 용량과 그 산과 한마음으로 산 세월의 무게와, 그 산과 도반이 되어 길을 걸어간 세월의 너비를 알려준다.

지안 스님이 전하는 산중 새 소식은 이렇다. ‘아무 일이 없는’ 이곳엔 봄이 오니 산천의 축제가 벌어진다, 날마다 산간의 새벽은 천지인의 깨어남을 지키고 있다, 불어난 계곡물 위의 꽃잎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고 또 묻는다, 나뿐만 아니라 꽃들도 나를 붙들고 얘기 좀 하자고 그런다, 눈(雪)이 내려 일색이 되니 눈(眼) 밖에 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눈 내려서 백화도량이 되니 감로의 향기만이 가득하다, 산물을 다 내려 보낸 골짜기는 혼자서 쉴 수 있는 은신처이다…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런 ‘아무 일이 없는’ 산중의 소식은 그야말로 상대(相對)의 문법에 갇혀서 아프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絶對)의 실상세계를 알려줌으로써 그들을 일깨우고 안심시키는 양약이자 치유제이다.

첫 시집을 펴낸 지안 스님은 경전 공부를 하거나 매일 아침 영축산 산책을 하면서 떠오른 시상을 글로 적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 공부입니다. 나는 평생 경전을 보고 살아왔습니다.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하는 〈화엄경〉이나 〈법화경〉 경문 속에는 반드시 운문으로 된 게송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입니다. 실제 불경을 많이 보면 저절로 시심이 생기지요.” 지안스님은 100여 편의 시 가운데 ‘별을 보는 밥’을 예로 든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이때 어둠은 중생의 어두움 즉 탐욕과 무지를 뜻하고 반짝이는 별은 부처님의 깨달음과 지혜의 광명이다. 사람은 누구나 번뇌의 하늘에서 무명을 밝혀나가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집 〈바람의 자유〉는 ‘산창의 풍경’ ‘달을 보는 부처님’ ‘돌의 자화상’ ‘동백꽃 연기’ 총 4장으로 구성되었다.

지안 스님의 시 속엔 아주 인간적인 면모들이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깃들어 있다. 시라는 세속 적 양식에 어울리는 언어와 그 구체화 과정을 거치는 데서 나타난 하나의 모습이다.

또한 스님의 시에선 인간적인 소리와 각성의 소리가 늘 이중주처럼 흘러나온다. 전자의 소리가 뭇 사람들 감성에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면, 후자는 그들로 하여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낯설지만 신선하고 편안한 본래 자리를 만나게 한다. 가령 지안 스님은 당신의 시 〈살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에서 ‘살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열거한다. 그때 삶은 현실의 언어처럼 구체적이고, 그런 경험은 뭇 사람들과 함께하는 동질감의 요소이다. 그러나 그 살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의 ‘삶’에 대한 각성된 통찰은 보통 사람들의 삶이 지닌 상대성을 초탈하게 한다.

저자인 지안 스님은 “시는 결국 운문인데,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 대승경전의 거의 절반은 운문”이라며 “따지고 보면 옛 선사들도 한시를 쓴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지안 스님은 “이번 시들은 ‘반야 오솔길’이라는 내 카페에 올린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사유적인 글들이 많아 독자들에게 한 번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며 “시란 결국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피력했다.

지안 스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김재원 시인(여원뉴스 회장)은 스님의 시집을 읽고 이렇게 평했다. “시로 전한 메시지는 스님의 법문보다 더 무겁고 날카롭게 그러나 절절하게 가슴을 긋고 지나갔다. 짧은 시구(詩句)마다 담겨 있는,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거의 용광로라 할 만큼 뜨겁고 겁나는 에스프리가 서늘하고 맑은 시어(詩語)로 정리되어 있어서다”라고. 그리고 김 시인은 한마디 더 덧붙인다. “스님의 시들은 잠 안오는 밤마다 꺼내서 다시 읽고 싶은 시어들로 가득하다”고.

문학평론가인 정효구 충북대 교수도 시 해설을 통해 “지안 스님의 시집을 청취하는 동안 산중과 사하촌을 연결하는 불가의 많은 다리들을 떠올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불가의 다리들은 이쪽과 저쪽을 표나지 않게 하나로 이어주는 신비의 길”이라며 “스님의 이번 시집도 이런 든든하고 편안한 불가의 다리와 같다. 시와 도를, 세상과 산중을 한 자리에 무사히 앉힌 고승의 무르익은 시법(詩法)이자 시어(詩語)”라고 극찬했다.

책속에 소개된 100여 편의 시들을 읽고 나면 깨달음의 사유가 가득한 작은 소경전을 읽은 것 같은 기분좋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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