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박상우 ‘비밀 문장’

자아 실현보다 자아초월
에고의 강한 지배 벗어나
내 안의 순수의식 깨워라

박상우 소설가는…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오래도록 ‘삶’의 근원과 ‘문학’의 존재 의미를 화두로 품어온 작가는 ‘인간’, ‘영혼’, ‘자유의지’ 등의 철학적 주제를 우주적 상상력을 통해 속도감 있는 이야기로 펼쳐낸다. 최근 픽션과 논픽션이 교차하고 본격소설과 SF, 판타지가 어우러지는 장편소설 〈운명 게임〉(전2권)을 펴냈다. 

 

어떤 채널링의 시작

사주팔자가 가리켜 보이는 인간의 운명은 크게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나, 그리고 재(財), 관(官), 인(印). 운명이란 결국 ‘나’라는 주체가 이 세 가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 부자가 되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직업인이 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운명론에 따르면 인간은 결국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살아간다. 운명은 ‘내가 나’인 것을, ‘있는 그대로의 벌거벗은 나’를 가장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다. 

박상우의 소설 〈비밀 문장〉은 소설가가 ‘되려고’ 꿈꾸고 애써온 젊은이가 ‘등단’이라는 제도적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것에 절망하여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마음먹는 장면에서부터 출발한다. ‘조용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몇 가지 의약품’을 은밀하게 구입하여 ‘자살 칵테일’을 제조한 주인공은, ‘낮이 끝나고 대지에 소리 없이 어둠이 내려앉은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지구라는 이름의 3차원 세계에서 소멸’되고 싶어 한다. 어느 날 안개 속을 헤맨 끝에 자신이 최후의 장소로 점찍어 둔 곳에 도착한 바로 그때, ‘뇌가 모두 녹아버리고 텅 빈 해골 껍데기만 남겨진 것 같은’ 이상한 기운 때문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문득 고개를 들고 허공을 보니 십대 후반의 소녀로 보이는 일종의 ‘에너지체’가 보이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쿄쿄… 쿄쿄… 쿄쿄…”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에너지로 전달되는 메시지였고, 그때부터 다른 차원에서 온 ‘쿄쿄’와의 채널이 열리게 된다. 

에고의 역할과 인생 프로그램

순수 에너지 인격체인 쿄쿄와의 대화를 통해, 주인공 문필수의 인생관은 그때부터 몰라보게 가벼워지고 밝아진다. 쿄쿄는 ‘인간에게 주어진 인생은 프로그램’이며, 그 프로그램은 스토리로 전개되고 ‘무한 스토리코스모스’를 이룬다고 말한다. 3차원 우주에 갇혀서 현실과 꿈에 대해 왜곡된 관념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을 실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차원의 영체가 반영된 투사체로서 10퍼센트 정도의 뇌와 10퍼센트 정도의 표면의식을 사용하는 제한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당신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을 향해 터무니없는 화를 내고 있어요. …이원성의 덫에 치여 있기 때문이죠. 태어나고 죽는다는 믿음, 너와 나는 다르다는 믿음, 오직 이곳만이 현실이고 다른 모든 것은 비현실이라는 믿음,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나뉘어 있다는 믿음, 가르침과 배움이 따로 있다는 믿음…. 그 모든 게 3차원 세상의 주인인 에고의 지배하에 놓여 있기 때문에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고통에 시달리는 거예요.”

쿄쿄에 따르면, 에고는 ‘3차원 우주에만 존재하는 이원성의 산모’이다. 에고는 있지도 않는 것을 있다고 여기는 자아의 거짓된 정체성이다. 이 거짓 정체성 때문에 실제로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데, 끝도 없이 다시 환생하고 다시 죽는 꿈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자작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지금 이곳의 모든 것이 꿈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을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3차원의 꿈은 학습 도구일 뿐인데 그것을 실재라고 믿으니 본말이 전도된 고통에 시달리며 자업자득 자작자수의 생을 사는 거예요.” 

“지구인들이 말하는 ‘나’는 전체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전체 중의 지극히 일부가 반영된 환영이에요. 당신들이 밥 먹듯 사용하는 ‘나’라는 말도, ‘자아’라는 말도, ‘영혼’이라는 말도, 3차원 우주에서는 완전히 왜곡되어 있어요. 왜곡된 게 아니라 없는 걸 있다고 믿는 에고의 망상에 사로잡혀 사는 거죠.”

바로 이 대목에서 2500여 년 전 샤카무니 붓다의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무아 사상이 소환되지만,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다. 소설가 박상우는 물질의 기본 단위인 양자는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는 양자 물리학의 새로운 틀을 적용하여 붓다의 팔정도를 적극적으로 확대 증폭시킨다. 사실 현대 과학은 붓다의 철학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시스템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과학이 불교의 대변인’은 아닌지 착시 현상을 일으킬 정도이다. 양자 물리학에 따르면, 우주가 물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어떤 고정된 상태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물리학은 이미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온(五蘊)이 실체 없이 텅 비어 있다’는 불교 사상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제 다른 스토리를 쓰고 싶다면

쿄쿄는 ‘3차원의 세계는 물질적 경험을 통해 의식적 진보를 도모하는 훈련장’이라고 말하지만, 주인공 문필수는 강력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훈련장이라는 것에는 수긍한다고 할지라도 왜 그렇게도 수없이 되풀이되는 반복 학습을 해야 한단 말인가? 

윤회 학습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비효율적이고 비능률적인 뺑뺑이’에 불과하다. 아무리 학습을 위해서라고 해도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으면서 과거 생의 기억들을 깨끗이 삭제당한 채로 다시 태어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문필수의 강력한 항의에 쿄쿄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다른 모든 지구인들처럼 결과만 중시하는군요.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학습은 결과를 전혀 중시하지 않아요.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나중에는 누구나 다 원천 의식과 하나가 될 테니까요. 우주 학습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시작부터 끝까지 과정이에요. 스토리 전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과의 잉태, 그리고 그것의 성장과 승화 과정을 가장 큰 결실로 보기 때문이지요. 절망을 통해 희망을, 추락을 통해 상승을, 폭력을 통해 자비를, 멸시를 통해 명예를, 증오를 통해 사랑을… 그리고 그 반대에로의 윤회까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반복 학습장을 왜 그토록 지루하게 오가야 하는지, 프로그램을 주관하는 자는 그런 지루하기 위한 싸움을 ‘자유의지’라는 알량한 이름으로 왜 지켜보고만 있는 것인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문필수에게 쿄쿄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우주에 가혹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프로그램은 원천 에너지의 보살핌과 배려 속에서 진행되고, 그와 같은 운행은 육체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비육체적인 상태로 돌아가자마자 누구나 곧바로 알게 되죠.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비로소 깨어났다는 것, 깨어나면 그때부터 다시 새로운 스토리를 구성하고 싶어 하죠. 이전 스토리의 부족함을 넘어설 수 있는 보다 높은 단계의 스토리, 그러니까 스토리 작업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원하는 단계를 설계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보다 높은 단계의 영적 존재들로부터 스토리에 대한 지도를 받게 되죠. 우주의 모든 것은 창조적이지만 그것의 원천이 하나에서 열까지 스토리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있는 그대로 다시 보고, 다시 쓰기

대부분의 인간은 생물학적 상태의 스토리로 태어나 생물학적 상태의 스토리로 죽는다. 생물학적 스토리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스토리를 쓰고 싶다면, 자신이 쓰고 있는 스토리에 강력한 의문부호를 제기해야 한다. 지금 자기 자신은 가짜를 진짜로 알고 있는 스토리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물학적 스토리로 태어났다가 정신적인 스토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탄생’이다. 

3차원 지구에 와서 인생살이를 경험하는 동안 헛된 고정관념을 만들고 그것을 위해 과다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깨닫게 되면, 관념화되지 않은 순수의식 상태를 일컫는 ‘있는 그대로’라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자각하게 된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면 마음이 집착하지 않고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스토리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이다.

‘3차원 시공간은 물질화된 스토리 세계이다. 그 반대쪽에는 잠재적 스토리 세계가 존재한다. 잠재적 스토리 세계는 발생 가능한 모든 사건들의 가능태를 보존하고 있는 정보 저장 공간이다. 정보 저장 공간에는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스토리, 그리고 우주적인 지식과 새로운 우주 창조에 필요한 프로그램 언어가 저장되어 있다.’

‘진동하는 우주의 스토리 저장고’, 이것을 아카식 레코드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3차원의 잠에서 깨어나 ‘눈이 열려’ 의식의 파동을 맞출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아카식 레코드를 열람하여 다양한 스토리를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주어지는 메시지도 제대로 수신하지 못해 자기 스토리 전개에 엄청난 애로를 겪곤 한다. 3차원 세계의 인간들은 온갖 다차원적인 신호를 받고 있지만 무절제하고 불안정한 뇌파가 그것들을 차단하고 왜곡하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에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한다. 

3차원의 세계에 갇힌 상태에서 에고로 살면서 자기 존재를 뚜렷이 나타내 보이기 위한 욕망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상태라면, 이제는 ‘자아실현 욕구’에서 ‘자아초월 욕구’로 옮겨가야 할 때라는 푸른 신호등이 켜진 것이다. 

▶ 한줄 요약

3차원 세상과의 만남을 인식하면, 현재 에고의 집착이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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