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 평전

탄신 101주년과 입적20주기 맞아 출간
“공부하다 죽는일이 가장 수지 맞는일”
1947년 성철스님등과 봉암사결사 참여
​​​​​​​1981년 해인사 원당암에 달마선원 개설

박원자 지음/벽산원각 감수/조계종출판사 펴냄/3만원
박원자 지음/벽산원각 감수/조계종출판사 펴냄/3만원

“공부하다 죽어라.”

제자들은 혜암 선사가 세상에 남긴 이 금과옥조와도 같은 말을 경남 합천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 옆 대형 석조 죽비에 새겨 놓았다. 길다란 돌에 새겨진 이 촌철살인 같은 말씀은 현재까지도 길이길이 후학들에게 수행의 지표로 전해진다.

그래서 ‘혜암’이란 두 글자는 기억 못하더라도 ‘공부하다 죽어라’는 말은 불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법호보다 그 말씀이 더 유명하다면 혜암 스님이 생전에 얼마나 수행을 강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자들은 혜암 선사가 남긴 이 감로 법문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며 오늘도 정진한다. 공부하다 죽는 일이 가장 수지맞는 일이라며 죽는 날까지 수행을 멈추지 않았던 가야산 정진불, 그가 바로 혜암 스님(1920~2001)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대 종정, 해인사 해인총림 제6대 방장으로 ‘혜암’이라는 법호보다 ‘가야산 정진불’ ‘두타수행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평생을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후학들과 함께 용맹정진했던 스님의 모습이 대중들의 기억에 무섭도록 깊게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산중 방장으로 있던 70대 중반일 때도 안거 중 7일 철야 용맹정진에 반드시 참여해 단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정진에 임한 철저한 수행자, 사람이 갖는 최고의 능력이 곧 깨달음임을 선언하며, 본래의 마음을 깨치라고 항상 부르짖던 수행자인 혜암 스님. 평생 시종일관 우리 스스로가 부처임을 확인하는 길을 설한 혜암대종사 탄신 101주년과 입적 20주기를 맞아 한국불교의 지남이 된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고자 혜암문도회가 중심이 돼 〈혜암 평전〉을 출간했다. 박원자 불교 전문작가가 쓴 이 책에는 20세기 후반 한국 불교 정신세계를 이끌던 혜암 스님의 삶과 가르침을 비롯해, 10대 때 일본 유학 도중 불교에 첫발을 딛고 출가한 이후 성철 스님 등과 함께 수행하는 과정이 오롯이 담겼다. 제자들에게 ‘공부하다 죽어라’며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스님은 출가한 날부터 50년간 하루 한 끼 식사만 하는 ‘일종식’과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 ‘두타고행’ 등을 실천하며 수행자로서의 진정한 행복을 설파한다.

〈혜암 평전〉의 또 다른 재미는 혜암 스님 일상을 기억하는 이들의 입을 통해 대쪽처럼 한결 같은 수행자이면서도 한없이 따뜻하게 만물을 대한 스님의 맑은 일상을 눈앞에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주위를 정화하고, 시간 나면 호미 들고 밭을 일구고, 일체중생을 꽃이라 하며 항상 미소 짓고 계신 청정수행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책을 들여다보면 사진으로 남은 스님의 생전 모습과 당시 사찰 근황도 생생히 볼 수 있다. 여기에 변화가 있는 곳은 현재의 사진을 함께 실어 근현대 한국불교 역사에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

책을 집필한 박원자 작가는 “여든둘의 연세로 입적하기 한해 전까지 재가자들에게 법문하고 원당암 선원에 함께 앉아 정진하셨다고 한다”며 “몸이 쇠약해져 선방에 앉을 수 없을 때는 정진이 끝나는 새벽 3시에 나와 선방 밖을 한번 둘러보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쓸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며 “한사람이라도 더 깨우쳐 주려했던 허공보다 드넓은 사랑 앞에 삼배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큰 스님의 그 자비로움으로 인해 불교 입문 40여 년 만에 비로소 ‘이뭣고’ 화두를 가슴에 품게 되었으며, 그 천금같은 가치를 알게 해주신 혜암 선사와의 인연에 깊은 감사를 올린다”고 법열감을 피력했다.

혜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며 해인사 선원을 비롯해 남해 용문사, 각화사 동암, 하동 칠불암,실상사 백장암 등에서 혜암 스님을 모시고 정진한 해인총림방장 벽산원각 스님은 “혜암대종사의 1백년은 한국불교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수행자로서 치열한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후학들에게 남기셨다”며 “시대적 아픔 극복과 개인적 번뇌 소멸 그리고 사회구제를 위해 선종적 방법으로 그 해결책을 제시한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혜암평전〉 기자 간담회서 만난 혜암 스님 제자 대오 스님(前 고양 흥국사 주지)도 “사시공양 후에는 바로 밭으로 호미들고 나가 일해야지 방에서 쉬면 불호령이 떨어졌으며, 스승께서도 시간만 나면 밭에서 울력하시는 등 몸소 모범을 보이셨다”며 “수행자는 무엇을 하든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고 기억을 되새겼다.

이렇듯 스승으로서 수행자로서 혜암 스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대중들의 가슴을 적시고 울렸다. “용맹정진하다가 죽는 놈 봤어? 그러다가 죽는다면 그보다 수지 맞는 장사는 없어. 정진하다가 죽을 수만 있거든 죽어버려. 내가 화장해 줄테니까” “내가 여기 원당암서 20년 동안 한 말이 이것입니다. 쉼 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쉬세요, 한 생각 내지 않는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져주세요, 그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등등.

입버릇처럼 ‘늘 깨어 있어라’ ‘공부만이 살길이다’는 말을 만나는 이들마다 되뇌이며 수행의 중요성을 평생 강조한 혜암 스님. 스님은 1947년 문경 봉암사서 성철 자운 우봉 보문 도우 법전 일도 스님 등 20여 납자와 더불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다. 당시 속가 나이 28세로 출가한지 1년도 안 된 학인 신분이었다. 이후 태백산 동암, 오대산 서대와 동대, 설악산 오세암 등 전국 주요 암자와 사찰에서 용맹 정진했다. 이후 1981년에는 해인사 원당암에 재가자 선원인 달마선원을 개설하고, 매 안거때마다 1주일 철야 용맹정진을 지도하며 대중 수행 문화를 선도했다.

이렇듯 혜암 선사는 수행자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해서 맡은 바 일을 성실히 하면 바로 그것이 자기를 지키는 일이요 도인의 삶이라고 했다. 이러한 당부가 그저 수행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면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따라야 할 삶의 수칙이 아닐까. 매일 아침 눈 뜨면 어제의 나는 죽은 것,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오늘 밤 눈 감을 때까지 목숨 걸고 자신의 시간을 소중히 보내야 한다. ‘목숨을 내놓고 정진하라’ ‘공부하다 죽어라’ 등 혜암 선사의 서슬 퍼런 일갈은 문득 돌이켜보면 우리가 일상서 매일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혜암 선사가 전하는 용맹정진의 가르침이 시공간을 넘어 생생히 이어지도록 〈혜암 평전〉은 씨줄과 날줄로 튼실히 엮었다. 이 책을 읽은 후라면 공부하다 죽을 수 있는게 불자로서 얼마나 영광스럽고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게 해준다.

한편 합천 해인사는 5월 3일 대적광전서 근현대 한국불교 선지식 혜암당 성관 대종사의 생전 발자취와 가르침이 오롯이 담긴 〈혜암 평전〉 봉정식과 혜암 대종사 탄신 101주년 기념 법회를 봉행했다.

혜암당 성관대종사 행장
혜암 선사께서는 시간만 나면 호미를 들고 밭에서 직접 울력하는 등 후학들에게 몸소 모범을 보였다.
혜암 선사께서는 시간만 나면 호미를 들고 밭에서 직접 울력하는 등 후학들에게 몸소 모범을 보였다.

△1920년 음력 3월 22일=전남 장성군 장성읍 덕진리 720번지서 출생

△1933년(14세)=장성읍 성산 보통학교 졸업

△1936년(17세)=일본 유학중 출가 결심 귀국

△1946년(27세)=합천 해인사로 입산 출가. 인곡 스님을 은사로, 효봉 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하고 ‘성관’이라는 법명 받음. 출가한 날로부터 평생토록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 두타고행(頭陀苦行)으로 용맹정진.

△1947년(28세)=문경 봉암사서 성철 자운 우봉 보문 도우 법전 스님 등 20여 납자와 함께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결사에 참여.

△1948년(29세)=해인사서 상월 스님 계사로 비구계 수지하고, 한암 스님 회상서 안거.

△1949년(30세)=범어사서 동산 스님 계사로 보살계 수지하고 범어사 동산 스님 회상과 가야총림 선원서 안거.

△1952년(33세)=범어사 동산 스님 회상서 하안거 대중 88명 가운데 유일하게 안거증 받음.

△1967년(48세)=해인총림개설됨에 첫 유나.

△1970년(51세)=대중 요청에 따라 잠시 해인사 주지를 역임.

△1973년(54세)=해인사 극락전서 철조망 치고 결사 정진.

△1979년(60세)=해인사 조사전에서 3년 결사를 시작으로 1990년(71세)까지 총림 선원 대중과 함께 정진. 유나·수좌·부방장으로서 수행 가풍 진작 위해 진력.

△1981년(62세)=해인사 원당암에 재가불자 선원(달마선원)을 개설해 매 안거마다 1주일 철야 용맹정진을 지도. 매월 2회 토요 철야참선 법회 개최해 약 500여 회에 걸쳐 참선 법문.

△1987년(68세)=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선출.

△1993년(74세)=해인총림 제6대 방장에 추대.

△1994년(75세)=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

△1999년(80세)=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추대.

△2001년(82세)=12월 31일 오전,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서 문도들을 모아놓고 ‘인과(因果)가 역연(歷然)하니 참선 공부 잘해라’고 당부한 후 임종게를 수서(手書). 편안히 열반에 드니 세수는 82세요 법랍은 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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