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금강경〉과 선 下

마음지혜를 바로 깨치는
언어도단의 참된 가르침
​​​​​​​선의 근간으로 전해지다

중국 광동성 남화선사 조전에 있는 육조 혜능 선사 진신상.

산 중에 산이 금강산이고, 경전 중의 경전이 〈금강경〉이다. 〈금강경〉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이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이다.

이 무주(無住)의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中道)이다. 앞서 우리는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중도를 깨달았노라 한 ‘중도대선언’을 기억할 것이다. 부처님이 첫 설법에서 말씀하신 중도가 바로 〈금강경〉에서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이다.

우리 마음이 ‘나-너’ ‘있다-없다’ ‘선-악’ 등의 양변에 머물지 않는 마음을 지(止, 사마타)라 하고, 그 머무름 없는 마음에서 관(觀, 위빠사나)이 나온다. 이 지관, 사마타 위빠사나를 〈금강경〉에서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이 양극단을 버린 중도이고 천태종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 화엄종에서는 적광(寂光)이라 하고 선종에서는 정혜(定慧), 살활(殺活)이라 말한다.

부처님의 많은 경전과 불교의 다양한 사상이 있지만, 모두 근본은 중도이고, 〈금강경〉의 말씀도 중도가 근본이다. 그동안 불교 연구자들이 〈금강경〉의 핵심 사상이 공이라거나 반야라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중도 사상이다. 물론 알고 보면 공과 반야가 곧 중도이니 불법은 하나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장로가 ‘깨달음으로 가는 중생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는 물음에 대해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나는 삶’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반야 지혜’로 다이아몬드 같이 단단하고 빛나는 마음이다. 부처님은 ‘내가 있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말고, 내가 사람이다, 중생이다, 영혼이 있다는 상(相)에도 머물지 말라’고 하신다. 더 나아가 남을 돕고 보시할 때도 집착과 머무름 없는 마음을 이르시며, 이렇게 하면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있을 것이고 마침내 궁극적인 깨달음을 성취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금강반야바라밀행이다.

코로나 대유행 시대에 금강 지혜를 밝힌다면, 코로나의 두려움에도 머물지 않게 된다. 평상심으로 방역지침을 잘 지키며 남을 배려·존중하는 삶이 바로 그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탐욕으로 빚어진 지구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에 따른 문명사적인 위기와 경제적, 정치적 양극화에 대하여 정견을 굳건히 해 여와 야, 갑과 을, 노와 사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고 다 잘 살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금강경〉과 혜능 선사의 깨달음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금강지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원하다. 이 〈금강경〉을 듣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들이 깨달아 영원한 대자유를 누렸다.

그 중에 유명한 이가 선종의 6조 혜능 선사다. 〈금강경〉이 설해진 지 약 1000여 년이 지나 동아시아 당나라에 무지랭이 나뭇꾼 혜능이 있었다. 그는 우연히 여관에서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는 문득 발심 출가하여 동산으로 간다. 당시 동산에는 오조 홍인 대사가 〈금강경〉 한 권으로 부처되는 설법을 하고 있었다. 혜능이 오자 홍인 대사는 글자를 모르니 방앗간 일을 시킨다. 8개월 동안 방앗간에서 일만 하던 행자 혜능은 어느 날 교수사 신수대사가 지은 게송이 아직 깨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게송을 하나 지어 글 아는 이에게 부탁하여 써놓았다.

이것을 본 홍인 대사는 야밤에 방앗간 행자를 몰래 불러서 〈금강경〉을 읽어준다.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대목에 이르러 혜능이 확철대오한다. 오조 홍인 대사는 혜능의 깨달음을 인가한다. 이 소설 같은 이야기는 선종의 바이블로 불리는 〈육조단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선문에 전해오는 역사고 전설이다.

당시 동산에는 오조 홍인 대사 문하에 상수제자 신수를 비롯하여 1000여 수행자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문자도 모르는 무식한 행자 혜능이 불교 경전에 해박한 신수 대사를 제치고 깨침을 인가 받았을까?

“나의 설법은 뗏목이다”는 가르침

여기에 불교와 선의 깊고 미묘한 뜻이 있다. 그 깊은 뜻이 잘 드러난 경이 바로 〈금강경〉이다. ‘응당 머무는 바 없이’란 문자를 안다와 모른다, 학식이 있다와 없다는 양변에 집착을 떠난 중도의 마음을 말한다. 혜능은 문자를 몰랐고 학식도 없었지만, 마음을 바로 깨친 것이다. 혜능은 오직 방앗간에서 일만 하다가 오조 홍인 대사의 〈금강경〉을 읽어주는 말을 듣고 깨친 것이다.

선종 역사는 분명 혜능 행자의 깨달음을 증명하고 있고, 선종의 6조로 확증되어 〈육조단경〉이라는 선종의 교과서로 전해지고 있다. 더구나 우리 한국불교의 장자 종단 대한불교조계종과 조계사의 ‘조계(曹溪)’가 바로 육조 혜능대사의 사상을 받들고 수행하는 종단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혜능 행자의 깨달음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혜능이 〈금강경〉을 듣고 깨쳤고, 후학들에게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아 가르쳤으니 우리는 〈금강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충격적인 말을 한다.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내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다. 바른 깨달음을 얻은 법이 실제로는 없다.”

이런 설법에 많은 불자들이 혼란스러워 불교가 어렵다고 한다.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은 거룩한 분이고, 그 말씀은 진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불교는 그런 가르침의 종교가 아니다. 성스럽고 고귀한 것이 실제로는 없다는 무상(無相)과 나라고 할 것도 없다는 무아(無我)를 설한다. 그러니 내가 중생이고 영혼이 있다는 견해도 착각이니 떠나라 한다. 심지어 깨달을 법이 있다는 생각도 부처도 집착하지 말라 한다.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어떤 법도 깨달음도 설법도 집착하지 말라 하면서 마침내 당신의 설법도 마음을 깨치는 뗏목일 뿐이라 한다. 부처님의 설법은 결국, 경전의 글자와 말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바로 깨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마음을 바로 깨치는 禪

〈금강경〉의 이런 가르침은 선의 ‘살불살조(殺佛殺祖)’ 정신으로 이어진다. 부처도 조사도 법에도 집착하지 않고 오직 자기 마음을 깨쳐 부처되는 길이 최상승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다양한 깨달음의 길 중에 선은 마음을 바로 깨치고 행하는 불교다. 선의 종지라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바로 그런 뜻이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 함은 〈금강경〉의 “불법이 불법이 아니라 이름이 불법”일 뿐,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 이름이 부처”라는 그 마음을 바로 깨치는 길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은 문자를 알고 모르고, 배움이 있고 없고 하는 분별을 떠나 마음을 깨치고 행하는 길을 제시한다. 오직 부처가 되고자 발심 출가한 혜능 행자는 문자도 몰랐고, 경전 공부도 없었지만, 그것이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었으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단박에 깨칠 수 있었다.

선종의 육조가 된 혜능 대사는 〈금강경 해의(解義)〉라는 주옥같은 법어를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한글(언해)로 가장 먼저 역경 편찬된 경전이 바로 〈금강경〉이다. 조선 세조가 지시하여 당시 대학자들이 역경 편찬한 〈금강경 언해〉에는 흥미롭게도 〈금강경〉 한문과 언해 외에 〈육조 해의〉가 수록되어 있으니 조선 초기까지도 〈금강경〉과 육조 혜능대사의 가르침을 둘로 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禪과 〈금강경〉에 대한 오해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이 시대에 가장 유명한 철학자 도올 선생은 〈금강경 강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금강경〉이야말로 선종의 기초경전인 것인냥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건대, 〈금강경〉과 선종은 역사적으로 일푼어치의 직접적 관련도 없다.…禪이란 본시, 중국의 당대에나 내려와서, 이전의 일체의 교학불교를 부정하는데서 생겨난 不立文字, 直指人心의 아주 래디컬한 토착적 운동이고 보면, 禪은 문자로 쓰인 모든 경전을 부정하는 일종의 반불교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도올 선생은 〈금강경〉을 ‘인류 최고의 지혜서’라 하여 그 가치를 높이 보는 것은 불자들과 인식이 일치한다. 하지만, 〈금강경〉이 선종의 소의경전이라는 사실은 부정한다. 도올이 〈금강경〉과 선종의 관계를 저토록 부정하는 이유는 禪을 중국에서 탄생한 ‘모든 경전을 부정하는 반불교운동’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禪은 불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인식이라 하기엔 안타깝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도올만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계 안에도 남방 상좌부승가에서 공부하고 온 일부 스님과 재가불자들조차 선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 중국에서 도교와 만나 탄생한 변종 불교라 폄하한다.

동아시아 불교 사상문화의 중심이고 한국불교의 유구한 선 사상을 이렇게까지 부정하는 것은 곧 자기 부정이 아닐까? 이런 견해를 가진 분들은 자기 안의 빛나는 보배를 보지 못하고 밖으로 귀한 것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까지 초기경전인 〈초전법륜경〉과 〈가전연경〉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이 중도라는 것과 〈금강경〉의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말씀이 회통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선은 이처럼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마음으로 체험하고 행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나의 설법이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 한줄 요약

뗏목과 같은 불법, 선으로 전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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