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교와 선

동아시아 사상흐름서 탄생
인류보편 가르침에 기반해
부처의 깨달음에 주목해야
​​​​​​​선의 근원은 ‘중도 대선언’

육조 혜능대사 진영. 〈육조단경〉을 통해 선에 대해 알 수 있다.
육조 혜능대사 진영. 〈육조단경〉을 통해 선에 대해 알 수 있다.

 

禪이란 무엇인가?

선이라 하면, 흔히 조용히 앉아서 하는 참선을 떠올린다. 참선하면 좌선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선종의 바이블로 불리는 〈육조단경〉에는 ‘좌선’을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라 한다. 이를 보면, 좌선은 앉아서 하는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류 문명사에서 선(禪)만큼 어려운 말도 없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은 말과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어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한다. 말의 길이 끊어진 것이라니...이 무슨 황당한 말인가?

하지만, 선은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금강산을 본 사람이 금강산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아무리 훌륭하고 멋진 말을 하더라도 금강산을 직접 본 것과는 천지 차이다. 이처럼 선은 말과 문자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언어도단의 선을 글자와 말로 표현한다면 동쪽으로 가야 할 사람이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선이 언어도단의 세계라 할지라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 가치를 누가 알겠는가? 선에 대하여 무슨 말이라도 해야 그것이 좋은 줄 알듯이 달 찾는 이에게는 손가락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뜻에서 선이 무엇인지 말해 보자. 먼저, 동아시아에 선을 처음 전한 분이 달마대사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달마대사 어록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근거가 약하다. 더구나 선의 종지, 돈오의 입장에도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아 선사들은 일반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종의 최고 어록은 6조 혜능대사의 〈육조단경〉이다. 선종의 교과서, 바이블이라 한다. 〈육조단경〉 전체가 선의 입장을 담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선(禪) 관련하여 두 가지 말이 나온다. ‘좌선’과 ‘선정’이다. 좌선은 앞서 말했듯이 앉아서 하는 참선이 아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안정된 것이다. 선정(禪定)이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라고 육조스님은 말한다. 즉, 선이란 마음이 내 밖의 모양에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 육조스님 말씀으로 선을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참 대단하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알쏭달쏭할 것이다. 그래서 선을 알기란 참으로 어렵다. 우리 초조 도의스님이 선을 말하자 ‘마구니말’이라 배척받은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선은 노장사상에 영향 받은 중국 조사불교?

불교계 일부에서 “선은 불교가 중국에 와서 노장사상과 만나 탄생했다”는 〈선의 황금시대〉와 같은 주장을 검증 없이 받아들여 그런 인식이 상당하다. 심지어 불교학자와 선의 전문가라는 분들도 그런 주장을 한다. 근래에는 ‘선불교’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였다. ‘선불교’라는 말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처럼 새로운 흐름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모양이나 과연 그런 개념이 합당한지 의문이다.

근래 남방에서 공부하고 온 분들이 ‘초기불교’라 표현하는 것도 의문이다. ‘초기경전’이라면 몰라도 초기불교란 부처님이나 부처님 직제자들이 가르침을 펴는 시대를 일컫는 말인데,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2600년이나 지난 지금에서 ‘초기불교’라니? 초기경전이라 하는 것이 합당하다.

초기불교란 표현만큼이나 ‘선불교’도 의문이다. 선불교라는 표현은 혼란을 조장한다. 왜냐하면, 선도 불교 안의 한 사상이지, 불교를 떠나거나 선불교라는 또 다른 가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강조한다면 불교 선, 또는 불교의 선사상이 좋을듯하다.

또 남방에서 공부하고 오신 분들이나 교학을 전공하신 분들이 더러 “선은 부처님 가르침에 없는 중국불교다”하거나 “선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이것도 오해다. 불교를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만으로 고정시켜 보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금강경〉에 “내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다”라거나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 이름이 부처다”라고 까지 하셨다.

한 때 한국불교계에도 ‘대승비불설’이 전해져 혼란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승불교가 부파불교시대의 편향을 극복하여 부처님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운동으로 정리한다(물론 남방 상좌부승가에서는 부파불교시대의 전통으로 대승 경전을 부정하고 북방 불교의 승가를 부정하는 분들도 있다).

선(禪)도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기원한다. 선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대 현실에 인연하여 나타난 사상이다.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선의 시원은 달마대사로 보는 것에 특별한 이견은 없다. 달마대사가 전한 선은 6조 혜능대에 와서 완전히 정착되며 창조적인 특색이 나타나는데, 〈육조단경〉에 잘 드러나 있다. 보편적으로 부처님 말씀을 모은 것에 ‘경(經)’자를 붙이는데, 유일무이하게 부처님 제자, 그것도 1천년이 넘는 후대에 중국 혜능스님이 말한 어록에 ‘경’자를 붙여 예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비록 선이 중국 당나라시대에 출현하였다 하더라도 한반도 통일신라와 고려, 그리고 일본까지 한자문화권이었고, 당대 불교사상문화가 광범하게 공유되던 시대인바 선은 동아시아 불교의 특색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육조 혜능대사를 비롯하여 마조, 임제, 대혜, 고봉, 중봉 스님이나 우리나라 도의, 보조, 태고, 나옹, 서산 대사 이래 한국불교와 동아시아 어느 선사도 부처님을 교조로 받들었지 노자와 장자를 스승으로 받든 이는 한 분도 없다.

특히, 서산대사는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라 하셨다. 더 나아가 ‘선은 중국 조사불교’라 폄하하며 한국불교가 왜 중국불교를 따라가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논리라면 부처님은 인도 사람인데 왜 인도불교를 배우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니 불교를 모르는 주장이다.

불교는 예수교나 유교처럼 인류 보편 종교이다. 민족과 인종, 국가와 지역, 계급을 초월하여 인류 보편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 불교다.

같은 이치에서 불교의 선도 인류 보편의 가르침인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지, 동아시아에서 출현하였다고 지역에 한정된 가르침이 아닌 것이다.

불교란 무엇인가?

선이란 부처님 가르침에서 인연한 것이니 불교를 모르면 선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선을 바르게 알려면 불교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는 누구인가? 깨달은 분이다.

인도 말로 ‘붓다(buddha)’라 하는데, ‘깨어난 자’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깨치면 부처라 하니 붓다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보통 명사다.

그럼 부처는 무엇을 깨쳤는가? 이것이 문제다. 부처가 깨어난 자, 깨달은 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무엇을 깨달았는가? 깨달음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선 이견이 적지 않다. 그러니 부처님의 깨달음을 알려면 말씀인 경전을 봐야 한다. 그런데, 불교의 경전은 8만4천이라 할 정도로 방대하고, 또한 너무나 다양한 말씀을 하여 공부가 쉽지 않은 것이 문제다. 더구나 경전을 전하는 언어도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한문, 한글 등등 너무나 다양하고, 또한 남방과 북방으로 전하는 경전의 가지 수와 내용도 상당히 다른 것도 있다.

성철스님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졌던 것 같다. 1967년 해인총림 동안거에서 행한 〈백일법문〉은 “불교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시작한다. 이를 근거로 불교란 무엇인가를 정리해 보자.

〈초전법륜경〉의 중도대선언

부처님이 깨치고 처음 설한 것을 초전법륜이라 하여 불교사에선 가장 중요한 설법으로 평가한다. 깨치고 첫 설법이니만큼 방대한 불교 사상에서도 그렇다. 남방불교 일부에서는 초전법륜경을 외우게 한다고 들었다.

이 초전법륜을 기록한 경전은 남전 팔리어 〈마하박가(율장)〉와 〈쌍윳다니까야〉, 한역(漢譯) 〈율장〉과 〈아함경〉에도 보인다. 내용은 비슷하나 〈마하박가〉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다. 이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깨친 뒤고 오비구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쾌락과 고행의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다.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중도란 무엇인가?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생각, 바른 삼매이다. 그리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으니, 괴로움과 괴로움이 일어남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이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은 없다’ ”

부처님의 이 말씀을 성철스님은 ‘중도대선언’이라 한다. 부처님은 이 중도를 깨침으로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영원히 해탈하여 ‘불사(不死)의 문’을 열었다고 선언한다. 부처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속박된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영원히 해탈하는 중도를 발견하고 우리 인류에게 처음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부처님은 이 〈초전법륜경〉에서 생사의 괴로움에서 영원한 해탈을 선언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중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중도는 곧 팔정도이고 사성제인데, 누구든지 이 중도를 깨치면 생사의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고 하셨다.

초전법륜 당시 부처님께 직접 이 중도 법문을 들은 교진여(남방에서는 꼰단냐)는 그 자리에서 돈오(頓悟)하여 부처님 이후 첫 깨달음을 성취하고 인가를 받는다. 나머지 네 비구도 차례로 깨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니 이것이 불교의 출발이다.

 

▶ 한줄 요약
부처님이 남기신 가르침의 의미를 살피면 ‘선’의 가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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