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에서 나오는 거 근본에다 놓는다면 자기가 자기 죽이는 법 없어요

밖의 상대로 인한 것이나 안에서 나오는 것 등
모든 점에 있어서 주인공이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수행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또 내가 여기에서 가르치는 거는, 안 되고 되는 것을 어떻게 놓느냐 하는 겁니다. 자기 카세트에서 나오는 거 자기 카세트에다 되놔라. 안 되는 거는 ‘아, 나를 성숙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나를 다지기 위한 과정이다. 이건 고가 아니다. 나한테 부딪쳐 오는 이것이 나를 성숙하게 하고 물리를 터지게 해서 지혜를 얻게 해 주는 과정이다.’ 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감사할 거고, 또 ‘거기서 일체 만법을 다 해 나가니 감사하고, 또 잘됐으니 감사하고 이러니까 모든 게 다 감사해.’ 그렇게 그 감사함을 알고 가는 겁니다.

또 그렇게 감사하더라도 이 내 마음 깊은 속에 감사함을 놓고, 바로 맡겨 놓고 사신다면 나가서 일을 해도 편안하고 또 집에 들어와도 편안하고 따뜻하고 또 화목하고 조화를 이루게 되니까 뭐든지 좋죠. 몸 건강하니 좋고 내 마음 편안하니 남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고, 내 마음이 편안하니까 말도 편안하게 나오고 또 말이 편안하게 나가니까 화목을 도모하고, 이러니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이 절간 살림이나 바깥의 살림이나 살림이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마는 우리 스님네들은 결코 절을 운영하고 살림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들어온 게 아닙니다.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바로 원심력을 얻어서 그 원의 항아리를 굴리고, 여러분의 살림살이와 자기 살림살이가 둘이 아니게끔 보고, 둘이 아니게 나투고, 둘이 아니게 나투는 까닭에 둘이 아니게 모든 일을 해 나가고, 죽은 세상 산 세상을 같이 껴잡고 나갈 수 있는 여건을 가지면서 여러분도 이렇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한테 한 가지 묻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손은 이 ‘공’ 안에 꽉 찼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관세음보살의 진짜 손입니까? 또 여기 눈들이 참 많습니다, 눈! 여기 여러분의 눈만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백 명이 있다면 백 명의 눈이 또 있는데 그 백 명의 눈이 수천수만 가지의 눈으로 되어 있으니 눈이 그렇게 많다면 어떤 것이 진짜 눈일까요?

또 다른 걸 얘기해 볼까요? 지금 저, (화분을 가리키시며) 이파리가 많습니다. 이게 소나무 이파리라면 어떤 것이 진짜 이파리겠습니까? 내가 여직껏 말씀드린 거를 잘 생각해 보시면 여기에도 그 의미가 나옵니다. 바로 우리는 뿌리와 이파리와 가지를 다 보고 있습니다. 근데 이 이파리들은 말입니다, 자기 뿌리를 못 보거든요, 흙에 가려서. 인간이 무명에 가려서 자기의 참자기를, 자기 뿌리를 못 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잘 음미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공동묘지에 가 보십시오. 남녀노소를 막론해 놓고 모든 물질은 없어져 버렸죠. 사대(四大)로 태어났다가 사대로 흩어지고 말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남았을까요? 보니까 전부 늙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애나 어른이나. 애가 죽었으니까 천도를 안 해도 된다고 그러는데…, 천도를 하라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천도라는 거는 내 밥 먹을 때도 천도가 되니까요. 이 도리를 알면 뭐 떠 놓고 할 것도 없어요, 사실은. 그런데 모두 모르니까 그래요. 그래서 애가 죽었거나 한다면 애라고 업신여기죠. 그런데 그 애는 먼저 늙었기 때문에 애가 됐다는 걸 아셔야죠.

그래서 우리가 대의적으로 본다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여자가 남자로 될 수도 있고 남자가 여자로 될 수도 있고 짐승이 사람으로 될 수도 있고 사람이 짐승으로 될 수도 있으니, 또 어른이 애가 되고 애가 어른이 될 수 있으니 어떤 거를 세워서 어른이라고 하며 어떤 거를 세워서 애라고 할 수 있으랴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 몸이라는 집이, 물질이 다 없어졌다면 그대로 물이자 흙이고 흙이자 바람이고 바람이자 바로 불입니다. 그렇다면 다 늙었죠. 백(白)이에요. 흙이에요. 그냥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갔을 뿐이에요. 그런데 뭐가 남았느냐구요? 우리 지금 마음을 내놓으시라면 내놓으실 수 없겠죠? 그 내놓을 수 없는 바로 그것이 뿌리죠. 우리 마음! 내놓을 수 없는 거, 볼 수 없는 거….

그런데 여러분은 꿈에, 꿈이자 생시고 생시이자 꿈인데, 자기 몸을 뉘어 놓고 나가서 온통 다니다가 오거든요. 지금도 여기 앉으셔서 그렇게 하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집에 지금 뭐를 내려놓지 않고 왔거나 올려놓지 않고 왔거나 세워 놓지 않고 왔거나 하여튼 뭐, 급한 일을 안 해 놓고 왔다면 집 생각을 하실 겁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벌써 집에 가고 있는 겁니다. 가고 오고 온통 야단난 거죠, 마음이 말입니다. 체가 없으니까 마음만 갔다가 왔다가 그러다가 보니까 체 있는 놈을 붙들어다가 그거를 치우게 하거든요. 내가 걱정을 하면 자연적으로 벌써 딴 식구가 와서 그걸 해 놔요.

그러니 그 몸이 내 몸이고 내 마음이 그 마음이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에요. 이렇게 에너지가 그냥 자가발전소에서 가설이 된 데로 전력이 다 나가서, 여러분이 가정마다 회사마다 모두가 용도대로 다 쓰는 그 전력과 같다 이거예요, 우리 마음이. 그렇게 광대무변한 겁니다. 여러분도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을 충만하게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 도리를 배우셔서 가정에 이익 되고 공덕이 되고 복덕이 되고, 여러분의 우환과 가환을 다 자기 스스로 없애고 화목을 도모하면서 정답게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하십시오. 죽 한 그릇을 놓고 숟가락을 셋이든 넷이든 같이 꽂아 놓고 먹어도 그렇게 즐겁고 좋을 수가 없는 그러한 넓은 마음으로, 이 손을 쫙 벌리면 우주가 다 담겨 올 수 있는 그런 심력(心力)을 가지고 보람 있게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중략)

언젠가 한번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님, 제가 꼭 개를 잡아서 약으로 써야 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했습니다. 딴 약은 먹기 싫고 개를 폭 삶아서 먹으면 자기 병이 낫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으로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옳을까요? 어떻게 말을 했겠습니까? 잡아먹지 못하게 했을까요, 잡아먹게 했을까요?

대중 가운데서 잡아먹게 했을 겁니다.

큰스님 잡아먹게 하긴요. 허허허…. 난 잡아먹게 하지는 않습니다. 또 못 잡아먹게도 안 합니다. 단 이런 게 있습니다. 만약에 소의 그 모습이, 그 살이, 그 고기가 내 고기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고 그 생명이 내 생명이라면, 그거는 먹은 것도 없고 안 먹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역력하게 먹어서 그건 약이 된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시겠죠? 만약에 고기 한 점을 놓고 말입니다, 고기 한 점을 놓고 이게 소 한 마리라고 그런다면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그런데 이 몸뚱이가 큰데…, 마음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지구가 몸뚱이라면 마음이, 그 지구도 탁 내놓고 지구 바깥으로 나가니까 말입니다, 지구가 콩 알갱이만도 못하게 보이는 거죠. 그런데 그 고기 한 점이 어째서 소 한 마리가 아니 된다는 얘깁니까? 마음은 체가 없다고 그랬죠? 그 마음 하나가 수십 마리의 마음이 될 수 있다고 그랬죠? 수십 마리를 낳을 수도 있어요. 쓰레기통에 따뜻한 기가 도니까 생명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걸 보시죠?

이해가 안 가시는 모양 같은데 나 말할 기운이 없어졌습니다. 하하하. 소 한 마리가 한 점도 될 수 있고 한 점이 소 한 마리가 될 수도 있어요. 이 도리를 아셔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내가 정말 인간으로서 큰소리하고 다닐 수 있는데, 또 큰소릴 해서 큰소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큰소리를 할 사람은 큰소리를 안 해요.

그리고 자비라는 건 뭘 자비라고 하는가. 이거 들떼기로 쬐끔쬐끔 얘기하는 것 잘 들으세요. 자비라는 건 악하고 선하고, 더럽고 깨끗하고, 낮고 높고, 평전하고 평전치 않고, 가난하고 가난치 않고, 못나고 잘나고가 둘이 아니고, 남과 여, 동서남북이 둘이 아닌 까닭에 바로 자비입니다. 저 강물이 구정물이든 핏물이든 똥물이든 고름물이든 수많은 물이 다 들어와도 여여하게 그냥 받아들이면서 그냥 흐르죠? 마음은 그와 같은 겁니다. 마음 쓰기에 달렸습니다.

여기 제주도에서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마는, 의학적으로도 그렇고 사람을 수술하든 생선을 칼로 자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큰 생선을 갖다가, 펄펄 뛰는 거를 한번 칼로다가 탁 잘라 보십시오. 그 탁 자르는 순간 모든 혈맥의 피는 그곳으로 뭉칩니다. 피만 뭉치는 게 아닙니다. 거기 피가 뭉침으로써 이 마음, 의식이라는 자체가 딱 몰리게 되는 거예요.

그럼 그걸 먹었다 하면 병나는 거예요. 언제나 탁 자른 그 자리는 제거해 버리고 다 씻어 버리고 피를 다 긁어 버리고 요렇게 해서 먹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이 마음이라는 한 점! 한 점도 없는 게 마음인데 어찌 고기 한 점이 소 한 마리가 안 된다는 얘깁니까? 마음이라는 이 자체가 물 한 방울도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는데 어째서 소 한 마리가 안 되느냐 이겁니다, 한 점이. 그래도 한 점이나 되는데요. (중략)

질문자1(남) 간화선이 공부가 더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큰스님 아까도 얘기했듯이, 고정됨이 없는 데다가 고정되게 붙들고 늘어지는, 이게 끊어질까 봐 붙들고 늘어지는 마음이 있다면 영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게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에, 간화선이면 간화선에 매이고 묵조선이면 묵조선에 매이고 조사선이면 조사선에 매이고 와선이면 와선에 매이고 좌선이면 좌선에 매이고 참선이면 참선에 매이기 때문에 그 매인 끝에 고만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것을 놓고…, 앉게 되면 그냥 앉는 것이 좌선이고 누웠으면 누웠으니까 그냥 와선이고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착을 두지도 말고 개의치도 말고 그대로, 앉으려고 시간을 냈으면 그냥 앉는 겁니다. 시간을 내서 앉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고 눕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고, 자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고 다니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고 다 그놈이 하는 거니까 참선 아닌 것이 없어요. 딴 놈이 해야 참선이 아니죠. 참선이라는 그 이름도 이름인데요.

질문자1(남) 그렇게 인식을 하고 공부를 할 적에 그 주처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큰스님 주처가 있지 않습니까? 이 몸이 있으니까 화두고, 몸속에 내가 지금 말을 할 수 있는 그 근원이 있으니까 말을 하죠. 그 하나의 주처에 의해서 천 가지 만 가지 말이 나오고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나고, 천 가지 만 가지 보고 천 가지 만 가지 듣고, 천 가지 만 가지 냄새 맡고 천 가지 만 가지의 맛을 알고, 천 가지 만 가지로 부대끼게 되는 건데요. 그리고 상대성에 의해서 천 가지 만 가지로 서로 왕래하면서 온갖 것을 그 주처에서 다 하죠. 자기가 있으니까 화두고 자기가 있으니까 ‘자기’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있다. 자기가 자기 아닌 자기를, 참자기를 발견한다 하는 겁니다. 찾는 게 아닙니다, 본래 있기 때문에.

질문자1(남) 그러니까 생각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큰스님 생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생각이 그렇게 자동적으로 들었으면 그냥 생각이라는 생각도 말고 그냥 거기서…. 그 뜻, 뜻이 있지 않습니까? 무거운 뜻! 그 무거운 뜻이 있다면, 그냥 그 뜻을 알면 되지 생각은 무슨 생각입니까.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이고 우리는 바로 뜻으로 해 나가는 거죠, 그 뜻! 그 뜻으로 관한다 이겁니다.

질문자1(남) 저도 질문을 받습니다. “좌선을 할 때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느냐?” 이렇게 질문 받으면 과정이 어떻다는 것을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큰스님 예. ‘어떻게 관하고 앉아 있느냐’ 하는 거죠? 똑같이 관하라는 게 아니에요, 원칙으로는 똑같은 거지만. 여러분이 일체가 한군데 주처에서 나고 든다는 것만 알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뜻으로 무겁게…. 왜, 이런 게 있죠? 뜻으로 ‘아, 참 광대무변하고 뭐하고도 바꿀 수 없고, 참 신비하구나!’ 하는 그 즐거움이 있죠? 네.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만 알면 내가 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알아서 다 할 거라는 거죠. 참 이거, 여기에서는 천차만별로 돌아가면서 갖은 짓 다 하기 때문에 어떠한 힘만 있다고 할 수가 없죠. 그게 원심력이죠, 원동력이고. 그게 주처고, 그게 바로 오신통을 굴릴 수 있는 능력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이름 지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러한 묵직한 뜻이 있다 이겁니다. 그 뜻이 있으면…. 그전에는요, ‘이 뭣고?’ 하고서 관했는데 지금 세상에는 너무 아는 게 많아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무, 정말이지 훌쩍 뛰어 넘어가리만큼 아주 머리가 선명해지고 지혜가 많아지고 물리를 많이 깨쳤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이 뭣고?’ 한다면 빈 맷돌 돌아가는 거와 같다는 얘기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뜻으로 본다면 이게 들이고 내는 데, 들어갈 문도 없고 나올 문도 없이 나고 든다는 걸 안다면…, 이거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잘하든 못하든 자기가 하는 거지 누가 하는 겁니까? 근데 자기가 아니라 자기예요. 그러니까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나, 지금 현실의 나에게 내놓을 수 없는 나가 있어요. 거기서 다 들이고 내는데,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든 보이는 세계든 천만 가지를 다 이 육신과 더불어 같이 그냥 회전하면서 하고 있는 거죠. 그걸 알고 있다면 그 알고 있는 묵직한 심력이 있단 얘깁니다. 그럼 그 심력을 딱 인정하고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 관한다 하면 마음의 눈으로 거기를 지켜보는 겁니다. 언제나 거기만 보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지금 더 뜨지도 않고 내려뜨지도 않고 이러고 있는데 이 마음의 눈은 (가슴을 짚으시며) 여길 향하고 있습니다, 그죠? 마음의 눈이 여길 향하고 그 너무나….

그래서 지장이라고 그랬거든요, 지장. 지장은 땅속에 묻혀 있는 보배를 말한 겁니다. 이 몸속에 묻혀 있는 보배를 말한 겁니다, 지장이. 그러니까 그 보배가 바깥으로 나와서 광을 내면 바로 관세음입니다. 그러니까 관세음이 따로 있고 지장이 따로 있고 뭐가 따로 있고…. 이거 어지러워서 종교를 어떻게 믿습니까, 귀찮아서요.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야, 산신 찾으러 가라. 칠성 찾으러 가라.” 이런다면 나 못 믿어요. 내가 피곤해서 죽겠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여기 가야 되고 저기 가야 되고, 여기 놔야 되고 저기 놔야 되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아예 다 타파하고 부처님 한 분 모셔 놓고, 그 몸이 내 몸이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고 그 생명이 내 생명이고 둘이 아닌 그 도리를 아시라 이겁니다. 그러면 일체 만물의 근원과 물질, 모든 이름과 이치, 허공, 유생 무생(有生無生)을 다 알 수 있고 다 말할 수 있고, 이런 풀잎하고도 같이 말할 수 있고 송장하고도 말할 수 있고 말 없이도 말할 수 있고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의 눈으로, 눈은 이렇게 건성 뜨고 마음의 눈으로 (가슴을 짚으시며) 여기를 지켜서 관하면서 하시라 이겁니다. 마음의 눈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의 눈!

질문자1(남) 스님, 저희들이 잠자리에 들어가기 직전 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일체의 육신이 하는 거는 다 주인공이 하기 때문에 ‘주인공! 당신이 하는 거니까 당신의 뜻대로 운영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마음으로 하든지 말로 하든지 이렇게 기도를 하는 습성이 있거든요.

큰스님 안 됩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벌써 둘이 되죠? 둘이 되지 않습니까? 자기와 자기가 둘이 되죠? 그건 누구더러 뜻대로 하라고 그랬습니까?

질문자1(남) 그건 표현상 ‘하십시오’ 하는….

큰스님 예. 그런데요, ‘뜻대로 하십시오.’하는 것도 좋은데요, 이렇게 하시란 말입니다.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것대로 ‘나를 성숙시키기 위한 수련 과정이다.’ 하고선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되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그러니 양면이 다 감사하죠? 그러니 그렇게 그냥, 오늘도 그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서 사는 겁니다. 모든 게 거기서 나고 든다는 걸 알면 그 뜻으로다가 감개무량하고 감사한 거죠. 오늘도 또 감사, 오늘도 또 감사…. 만날 오늘이죠, 오늘! 그렇게 해 나가시는 거지 기도드린다든가 ‘당신 뜻대로 하시오.’라든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뜻대로 하긴 뭘 뜻대로 해요?

예를 들어 수없이 고리가 달린 기계가 지금 막 돌아가고 있다고 합시다. 나는 이 고리에다가 지금 (수건을 들어 보이시며) 이 물건을 달아 줘야 됩니다. 지금 고리가 자동적으로 수없이 돌아가는데 거기에 물건을 달려고 하면 그걸 들어서 착착 걸어 줘야 이게 함께 돌아가죠? 근데 만약에 정성을 아주 지극하게 한답시고 잘하려고 하다 보면 벌써 빈 고리만 저만치 지나가 버려요.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했다고 하면 그 생각한 거는 벌써 뒤로 가 버리고 말아 버립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뭐든지 발견했다 하거나 생각했다 하면 그거는 벌써 지나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녁이든 아침이든 잠시 잠깐이라도, 단 오 분이라도 앉아서 마음을 착 가라앉히고 일체 만법을 주인공에 둥글리면서 관하세요. ‘당신을 믿어! 당신을 믿어!’ (가슴을 가리키시며) 이게 그대로 당신이니까요, 이게. 이렇게 밖의 상대로 인한 것이나 안에서 나오는 것 등 모든 점에 있어서 주인공이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수행의 기준이 되어야 하죠.

질문자1(남) 예를 들어서 몸이 아프다 이겁니다. 그럼 이것도 당신이 아프게 한 거니까….

큰스님 ‘당신이 몸을 형성시켰으니까 그 형성시킨 몸이 아프다면 당신이 해결을 해야지. 당신밖엔 해결 못 해!’ 하고 믿고 놓는다면 되죠.

질문자1(남) 저는 그 말이거든요. 그것이 바로 기도가 아닌가? 그것도 기도로….

큰스님 근데 지금 기도라고 그런다면 ‘아이고, 되게 해 주시오.’ 하고 비는 거를 기도로 압니다. 그러니까 말을 좀 바꾼 겁니다. 그 말은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즉 ‘기도’ 하면 아니 되니까 ‘관하시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기도라고 하는 것은 직접 자기가 자기한테 하는 게 아니라 타의에서 구하는 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인식이 돼 가고 있습니다, 기도라는 그 말 자체가. 그게 좋긴 좋은데 지금 진짜로 그렇게 하지를 않기 때문에, 상대방에 비는 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관하는 걸로 바꿨습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는 한 기도가 아닌 관을 하세요. 하여튼 관하는 것에는 일체 만법이 다 적용될 수 있다고 그랬죠. 몸이 아프든지 뭐든지 간에요. 지금 여기 내 몸속에 공장장들이 여간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선장이 회장이죠. 그 회장이 사장과 더불어 같이 그 공장장들을 죄 이끌고 나가는 선도자인 것입니다, 내 마음 하나가. 그러니까 그 선도자가 한생각에 의해 다 한마음으로 돌려서, 거기에서 나오는 거 거기에다 놓는다면 자기가 자기 죽이는 법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아마 생활과학인지도 모릅니다. 이거를 하나하나 체험해서 돌아간다면 그대로 천체물리학과 둘이 아님을 짐작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줄 아시고, 오늘은 이것저것 얘기해서 듣기에 어수선했겠습니다마는 그저 거기서 한 가지만 터득해도 만 가지를 터득할 수 있습니다.

※위 법문은 1987년 11월 19일 국내지원법회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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