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보리수(菩提樹)와 무명수(無明樹)

“대덕들이여,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색신(色身)은 무상한 것이니라. 지라, 위, 간, 쓸개와 머리카락, 털, 손톱, 이빨 따위도 오직 모든 법이 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니라.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쉬어진 곳을 보리수(菩提樹)라 하는 것이고, 한 생각 마음이 쉬지 못한 곳을 무명수(無明樹)라 하는 것이니라. 무명은 머무는 곳이 없고, 무명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니라. 그대들이 만약 생각 생각 마음이 쉬어지지 못하면 문득 무명수 위에 올라가 4생6도에 들어가서 털 나고 뿔 달린 축생이 되고 말 것이니라. 그대들이 만약 쉬어버린다면 그대로 청정법신의 세계니라. 그대들이 만약 한 생각도 나지 않는다면 바로 보리수에 올라가 삼계에 신통을 변화시켜 마음대로 화신의 몸을 나타내어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누릴 것이며, 몸의 광명이 저절로 빛날 것이니라. 옷을 생각하면 비단옷이 천 겹으로 걸쳐지고, 밥을 생각하면 온갖 맛이 다 갖춰져 차려지며, 다시는 횡액병사하는 일도 없을 것이니라. 보리는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얻는 자도 없느니라. 여러분, 대장부가 다시 무엇을 의심하는가? 눈앞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 잡아 쓰면 그만이니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그윽한 지취(玄旨)라 하느니라. 이렇게 보아버리면 더 이상 꺼려할 법이 없느니라.”

옛사람이 말했다.

“心隨萬境轉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 움직이니 / 轉處實能幽 움직이는 경계가 실로 그윽하여라 / 隨流認得性 작용하는 곳을 따라 성품을 알고 나니 / 無喜亦無憂 기뻐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도다.”

불교의 수행을 ‘무상(無常)을 뛰어넘어 영원으로 가는 것’이란 수사적(修辭的)인 표현을 하기도 한다. 열반의 네 가지 덕(德)을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이라고 말하니 상(常)이 무상(無常)의 반대 영원이다. 임제는 무상한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쉬라고 한다. 마음이 쉬어진 것을 보리수(菩提樹)라 하고 마음이 쉬어지지 못한 것을 무명수(無明樹)라 한다 하였다. 마음이 쉬는 것을 식심(息心)이라 한다. 〈치문(緇門)〉에 수록된 망명(亡名)법사의 ‘식심명(息心銘)’에 생각이 많거나 아는 것이 많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많으면 일이 많으니 뜻을 쉬는 것만 못하고, 생각이 많으면 잃는 것이 많으니 하나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多知多事 不如息意 多慮多失 不如守一)”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에 도(道)가 자리하려면 생각이 쉬어지는 것이 필수란 말이다. 심지어 지적(知的)인 활동마저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이 며칠인지 내 알바 아니로되 봄이 왔는지 산천이 푸르구나(年代甲子總不知 春來依舊草自靑)”는 송구가 있다. 마음이 쉬어진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이는 곧 선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쉬면 청정법신의 세계가 되고 쉬지 못하면 육도윤회의 세계가 된다 하면서 오계(悟界)와 미계(迷界)를 쉬고 쉬지 못함으로 구분하였다.

왜 이처럼 식심(息心)을 중요시 여겨 강조하고 있는가. 깨달음(覺)에는 망념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무명의 바람 때문인 것이, 바다나 호수에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에 “마음의 바탕에 망념이 떠나간 것이 깨달음(所言覺者 心體離念)”이라 하였다. 헛된 생각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 본래의 마음이라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도심(道心)이다. 그러나 도(道) 곧 보리는 있는 데가 없어 얻을 수가 없다 하였다. 마음이 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사구게의 송(頌)은 서천 22조 마라나존자의 게송이다. 제자 학륵나에게 전해준 전법게(傳法偈)이자 자신의 열반송(涅槃頌)이다. 〈선문촬요(禪門撮要)〉에는 학륵나에게 학(鶴)들이 따라다녔는데 그 이유를 마라나에게 묻자 학륵나가 옛적에 용궁에 있을 때의 제자들이었는데 복이 얕고 덕이 적어 우족(羽族)에 떨어졌다 하자 학륵나가 어떻게 하면 학들을 해탈시킬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설해 준 게송이다. 이 게송을 설해주자 학들이 떠나가고 마라나존자는 바로 좌탈(坐脫)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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