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잔해진 중국禪을 되살리다?

淸代 선종, 쇠락의 길 걸어
허운, 철저한 수행으로 오도
강학·계율 정통했던 선지식
쓰러지던 中불교 부활 초석

중국 운남성 축성사 조당에 모셔진 허운 스님의 좌상.

청나라는 명대의 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당시 불교 모든 종파가 그러했지만, 더 이상 불교는 발전되지 못했다. 거의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선종의 쇠락은 외부적 요인만은 아니다. 선의 활발발한 생명력은 사라졌고, 새로운 선이 창출되지 못했다. 청말의 선은 교종의 여러 종파와 융합하는 속에서 본연의 선을 잃어버렸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허운 선사가 활동하였다. 

허운(虛雲, 1840~1959)의 선은 우리나라 선객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후대 중국 선객들은 그의 법력은 흠모하고 있다. 한국에도 <방편개시> <참선요지> 등 허운의 선사상이 번역되어 있으며, 필자는 수년전 평전을 저술한 바 있다. 그는 당신 스스로나 중생을 제도할 때, 참선뿐만 아니라 참회·발원·염불을 겸하였고 계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였다.  

허운의 생애- 출가
허운은 1940년 복건성 천주(泉州)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소옥당은 당시 현의 관리였고, 불심이 돈독했던 양무제의 후손으로서 본래 고향은 호남성 상향이다. 어머니는 허운을 낳자마자 사망했고, 양모에게 양육되었다. 허운이 17세 무렵, 사촌동생과 함께 호남성 남악산 상봉사로 몰래 출가했으나 허운의 아버지의 권유로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허운의 출가를 막고자 도교 서적을 권하고, 도인을 불러다 도교 수행법을 배우도록 하였다.   

19세에 허운은 복건성 고산 용천사(湧泉寺)에 출가해 묘련(1824∼1907)화상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고암(古巖)이라고 하였다. 20대에 용천사에서 여러 소임을 보고 있는 와중에 부친이 출가한 아들을 찾아 수백 곳을 다니다 용천사로 들어오자, 허운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고행하였다.  

허운은 3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였고, 경론을 두루 보았다. 이 시기에 행각하던 중, 관음도량 절강성 보타산으로 들어갔다. 2년여 간 보타산에서 경을 읽다가 43세에 발심해 보타산을 출발해 산서성 오대산까지 3보1배 배행(拜行)을 결심했다.

허운의 생애- 오도          
허운은 3년간의 배행을 마치고, 49세에 아미산에서 티베트·부탄을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스리랑카·미얀마 성지를 순례했다. 미얀마를 통해 운남성으로 들어와 계족산을 찾았다. 스님은 계족산이 불교 명산이라고 하여 순례를 왔는데, 계족산 승려들의 모습은 청정하지 못했다. 각 사찰의 승려들이 첩을 거느리고 술과 고기를 먹으며 계족산 승려가 아닌 사람은 사찰 내에 하루도 머물 수 없었다. 

이때 스님께서는 이런 서원을 세웠다. “불연(佛緣)이 사라지는 계족산에 불법을 일으키고 운남성을 불국토로 만들어야겠다.” 

이후 허운은 천태산을 거쳐 지장도량 구화산에 머물렀다. 허운이 구화산에 3년간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고민사(高旻寺) 주지 월랑을 만났다. 월랑은 허운에게 이렇게 간곡히 청했다.  

“고민사에서 곧 법사가 있을 예정인데, 옛날 사칠(四七)에 이어 십이칠(十二七)을 합니다. 적산(赤山) 노스님은 먼저 절로 되돌아갔습니다. 허운 스님께서도 법을 호지(護持)해 강소성 고민사에 오셔서 함께 동참해주기 바랍니다.” 

이 인연으로 허운은 고민사에 머물렀다. 선사가 56세 동짓달, 팔칠(八七, 56일) 셋째 날 밤에 6번째 향이 타오를 때, 사미가 다관으로 따라 주는 차를 받다가 뜨거운 찻물이 손에 튀어 찻잔을 떨어뜨렸다. 이때 잔이 깨지는 소리에 깨닫고, 다음 오도송을 읊었다.

잔이 바닥에 탁 떨어져/ 깨지는 소리 분명하고 뚜렷하니/ 허공은 산산이 부서지고/ 허황된 마음 그 자리에서 고요히 쉬었네.// 끓는 물이 손에 튀어 잔을 깨뜨리니/ 집이 부서지고 사람은 죽은 듯 입이 있어도 할 말을 잊었네/봄이라 꽃향기 곳곳마다 가득하니/ 산하대지가 그대로 부처로세.

허운의 생애-교화 및 열반  
63세의 허운은 10여년 전 ‘계족산을 청정 도량으로 만들겠다’는 서원을 지키기 위해 제자 계진과 함께 계족산으로 들어가 석문(石門) 앞에 초막을 지었다. 초막을 짓기 시작한지 며칠 후, 계족산 승려들이 몰려와 ‘계족산은 대대로 승려 자손들 땅인데, 이곳 자손이 아니면 절을 지을 수도 없고, 생활할 수 없다’며 초막을 불태웠다.  

허운은 그들과 대립하는 것보다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곤명 서산 복흥사(福興寺)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63세부터 65세까지 3년간 폐관(閉關, 무문관) 수행하였다. 이후 스님은 운남성 일대 여러 곳에서 설법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법을 설했다. 

66세의 허운이 계족산 서쪽, 잡초만 무성한 후미진 곳에 움막을 지었는데, 이곳이 훗날 축성사이다. 서산 화정사(華停寺)는 허운이 81세에서 89세까지 머물며 불사했던 곳인데, 스님이 이곳에 머물게 된 연유가 있다. 80여세의 스님이 계족산 축성사(祝聖寺)와 곤명(昆明)을 오가면서 법을 설하던 무렵, ‘서산의 화정사가 프랑스인에게 팔려 외국인의 별장과 오락장으로 사용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스님은 운남성 도독 당계요에게 화정사에 승려가 상주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이런 인연으로 스님은 퇴락해가는 화정사를 중건하게 되었다. 

허운은 95세∼103세까지 육조 혜능 사찰인 광동성 남화사(南華寺)·대감사(大鑑寺)를 수행도량으로 만들었으며 1943년 운문종 근본도량인 대각사(大覺寺)를 복원 불사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감시하에 있던 허운은 1954년 115세에 강서성 영수현 진여사(眞如寺)에 주석하면서 허물어진 당우를 불사하고 도량을 정비했다. 허운은 이곳에서 1959년 120세로 입적하였다.

허운의 삼매  
허운은 율사요, 강사이기도 하지만 선사로서 법맥을 받은 분으로, 수행에도 철저했던 선지식이다. 스님께서 삼매에 들었던 두 가지를 보자. 

허운 스님이 계족산 축성사를 불사하던 무렵, 태국을 방문해 화교 사찰 용천사에서 한달간 <지장경>과 <보문품>을 강독했다. 어느 날 허운은 가부좌한 채 경전을 독송하다가 입정에 들었다.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살짝 감고 두 손을 포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께서 열반했는지 세심히 살피다가 허운이 삼매에 든 것을 알고 한 승려가 주위에 고요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무더운 여름, 스님이 삼매에 들어있는 동안 태국의 황제와 황후가 다녀갔고, 수많은 이들이 귀의했다. 스님이 삼매에 들어 있는 동안 절 주변에는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 찼고, 경찰까지 대동해 질서를 유지시켰다. 8일째 되는 날에는 외신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가 영국·프랑스·일본 등 해외에서도 스님의 사진과 기사가 실리는 일이 있었다. 결국 9일째 되는 날, 허운의 건강이 염려되어 선사를 흔들어 출정(出定)토록 하였다. 

허운이 장시간 삼매에 들었던 일은 광동성 대각사에 머물 때이다. 1951년 112세에 공산당 병사들이 스님을 구타했을 때, 가부좌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병사는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고, 땅에 내던졌다. 병사들이 떠나고, 제자들에 의해 허운은 가부좌한 채 입정에 들었다. 6일째 되는 날, 몸은 점차 길상와(吉祥臥)의 모습이 되었고, 9일째 되는 날에 허운은 선정에서 일어났다. 제자들이 9일이 지났다고 하자, 허운은 ‘몇분 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꿈을 꾼 것 같다.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의 유심식정(唯心識定) 법문을 들었다’고 말했다.  

허운의 선사상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화두참선과 정토에 대한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이와 같다. 

“선종은 참선을 위주로 하고, 참선이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는 바로 자기의 본래면목을 참구하는 것이니, 소위 ‘자성을 밝게 깨쳐, 본래 성품을 사무쳐 지혜로 관(觀)하는 것’(明悟自心 徹見本性)이다. 옛적에는 공안이 많았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오로지 화두를 보라(看話頭)고만 가르치고 있다. 즉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자는 누구인가’(才死屍的是誰),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父母未生前如何是我本來面目)라고 하는 화두를 보라는 것이다. 이 모두는 각각의 화두이지만 모두 동일한 것을 내포한다. 즉 ‘누가 경전을 암송하는가?’, ‘누가 진언을 수지하는가?’, ‘누가 식사를 하는가?’, ‘누가 가사를 수하는가?’, ‘누가 길을 걷고 있는가?’, ‘누가 자고 있는가?’,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에 주시하다면 모두 같은 이치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心卽是佛], 부처를 염하는 것[念佛]이 곧 부처를 관하는 것[觀佛]이고, 부처를 관하는 것이 마음을 관[觀心]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보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念佛是誰]라는 화두를 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를 염하는 자기 마음을 관하라’는 것이다. 마음이 곧 성품이고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 <허운화상법휘(虛雲和尙法彙)>
                                        
“선이든 정토를 향한 염불이든 본래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도에는 본래 둘이란 없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한 것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8종의 종파로 나누어진 것도 당시 세상의 추세에 따라 대기설법한 것일 뿐이다. 만약 자기 본성을 체달한 사람이라면 어느 문門이든 모두 도에 들어가는 오묘한 문이요, 높고 낮음이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모든 법이 본래 서로 통하여 원융 무애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망상 없이 오롯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한다면 그것이 어찌 선을 참구하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겠는가. … 선은 정토 속에 있는 선이고, 또한 정토는 선 안에 있는 정토이다. 본래 선과 정토는 상호 보완하는 작용을 한다.” - <허운화상법휘(虛雲和尙法彙)>

허운이 남긴 것들
허운은 20세기 초, 쇠잔해 가던 중국의 선풍을 중흥시킨 거목이다. 허운이 없었다면 현 중국(대만·홍콩 등)의 선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로 치면, 구한말 꺼져가는 불교를 살려낸 경허 선사에 해당한다.

허운은 묘련(임제종 42세)화상으로부터 임제종, 요성(조동종 46세) 화상으로부터 조동종 법맥을 받았다.

한편 당나라 말기에 끊겼던 위앙종·법안종·운문종의 종지를 드러내고, 법맥을 되살렸다. 현재까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 선이 면면히 흐르는데, 대체로 허운의 법맥이다. 2대손인 정혜·일성·본환·불원·도륜·관정 등이며, 손상좌에 해당하는 선사들이 대만과 홍콩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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