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깨침의 길 3

붓다의 깨침은 언어의 길이 끊어진 종교적 체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서는 깨침의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45년 동안 자신이 깨친 진리에 대해 수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팔만대장경으로 대표되는 불교의 경전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깨침의 세계가 언어를 넘어서있다고 하지만, 언어 이외에 그 소식을 전할 마땅한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직접 종교적 체험을 한 이들에게 언어는 필요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붓다는 자신이 깨친 체험을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였다. 그렇게라도 해야 사람들이 깨치고자 하는 마음을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붓다의 깨침을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원로 불교학자 강건기 교수는 〈부처님 생애〉라는 저서에서 붓다의 깨침을 지정의(知情意), 즉 사람의 마음에 있는 지성과 감정, 의지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먼저 붓다의 깨침을 감정적(情)인 측면에서 설명한다면 그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한없는 기쁨’이라고 하였다. 불교식 표현을 빌린다면 이는 곧 법열(法悅), 즉 진리를 깨달은 기쁨이다. 마치 우물 안에 있던 개구리가 밖으로 나갔을 때의 황홀한 감정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물 안과는 너무도 다른 신세계와 만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아!’하는 감탄사만으로 충분하다. 붓다는 우물 밖 실재와의 만남에서 느낀 한없는 기쁨, 법열을 몇 주간 즐겼다고 한다.

깨침을 지성적(知)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되는 것이라 하였다. 우리는 나와 남, 나와 세계가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 욕심내고(貪),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성을 내며(瞋) 어리석은(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삼독(三毒)에 찌든 중생들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깨침은 나와 세계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깨지는 체험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남, 나와 세계가 서로 소통이 되고 하나가 된다. 깨침은 곧 ‘깨짐’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깨침을 의지적(意)인 측면에서 표현한다면 ‘자비로운 삶’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자비는 나와 남, 나와 세계가 하나 되는 체험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 동체자비(同體慈悲)라고 한다. 너와 내가 한 몸(同體)이라는 실상을 깨치게 되면 저절로 자비를 실천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한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나와 이웃이 먼저 ‘하나’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깨침은 자비와 사랑이 나오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공명(共鳴)이라는 단어가 있다. 글자 그대로 함께(共) 운다(鳴)는 뜻이다. 누군가 아파할 때 나도 함께 우는 것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공명현상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주파수가 맞을 때 일어난다고 한다. 예컨대 피아노 건반에서 ‘도’ 음계를 치면서 입으로 ‘도’ 소리를 함께 내면 손가락을 떼더라도 피아노에서는 계속 ‘도’음이 울린다. 피아노와 내 입에서 나오는 주파수가 서로 맞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입에서 ‘도’가 아니라 ‘파’나 ‘솔’ 소리를 낸다면 진동수가 맞지 않아 피아노에서 울림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공명현상은 일상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세월호 참사에서 아이들이 죽어갈 때 많은 이들은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 마음의 주파수가 서로 맞았다는 뜻이 된다.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울었던 것이다.

깨침은 너와 나의 벽이 깨져서 서로 하나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인 지혜의 샘에서 사랑과 자비의 샘물이 솟아 나온다. 진리의 세계, 깨침의 세계, 우물 밖의 세계가 이런 곳이라면 한없는 기쁨이 나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우리가 깨침을 향하여 한 걸음 내딛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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