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정치의 선악과 과보

선악 행함으로 쌓이는 공업
업으로 현실 과보 돌아와
좋은 말과 행동이 현실에서
???????이익으로 실제 다가옴 알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정치학상 불후의 명저로 간주된다. 마키아벨리는 작은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이태리 통일의 염원을 달성할 이상적인 군주로 체사레 보르지아를 염두에 두고 ‘군주론’을 집필했다고 한다. 군주는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해야 하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구절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격렬한 민심 이반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 신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고 처형함으로써 신뢰를 얻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아버지였던 교황의 후광으로 추기경에 이어 군주의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이태리 통일은 체사레 보르지아 같은 냉혹하고 교활한 군주가 아닌 이태리 통일의 3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상주의자이며 애국자이고 난세의 영웅이었으며 진보적 자유주의자였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는 작은 국가들이 강대국에 의해 병합되는 전쟁의 시대였다. 부처님은 석가족 카필라국 출신인데 카필라국은 작은 나라로서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면 큰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부처님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꿰뚫어보시고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출가하여 법계의 왕이 되신것일까? 결국 카필라 왕국은 코살라국에 의해 멸망한다.

당시에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은 양대 강국이었다.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 왕과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존경했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상가에 대해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인연으로 두 왕은 서로 사이가 좋았다. 두 왕의 시절에는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아자타사투르가 아버지인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왕이 되자 두 나라 사이의 평화가 깨진다. 아자타사투르는 부처님의 사촌인 제바달다와 더불어 부처님을 괴롭힌 왕이기도 하다.

아자타사투르 왕이 프라세나짓 왕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전쟁에 패하고 프라세나짓 왕에게 잡힌다. <잡아함경>을 보면 프라세나짓 왕은 아자타사투르를 데리고 부처님 앞으로 간다. 프라세나짓 왕은 아자타사투르가 자신의 친구인 빔비사라 왕의 아들인데 자신에게 원한을 맺어 못된 짓을 하였으나 풀어주어 마가다 국으로 되돌아가게 하겠다고 말한다. 부처님은 프라세나짓 왕을 칭찬한다.

프라세나짓 왕에 의해 풀려난 아자타사투르 왕은 기회를 엿보다가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 이번에는 프라세나짓 왕이 패하여 겨우 수레 한대를 타고 되돌아온다. 이 전쟁의 여파로 코살라국은 궤멸하고 나중에 마가다국에 의해 병합된다. 한 번 전쟁에 패했어도 굴하지 않고 다시 만회의 기회를 엿본 아자타사투르 왕은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한 왕이다. 만약 프라세나짓 왕이 아자타사투르 왕을 풀어주지 않고 여세를 몰아 마가다 국을 완전히 정벌하였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비록 프라세나짓 왕이 자비의 마음으로 아자타사투르 왕을 풀어준 것은 부처님의 칭찬을 받은 선한 행위지만 정치의 냉혹한 현실에서는 패배를 자초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했지만 실패했다. 아자타사투르 왕은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하였고 성공했다. 정치의 세계에서 권모술수만이 성공의 요인은 아니다. 다른 수많은 인과 연이 필요하다. 아자타사투르 왕은 다른 인과 연에 의해서 권모술수가 성공으로 이어졌고 체사레 보르지아는 다른 인과 연에 의해서 권모술수도 별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정치인은 항상 고민할 것이다. 권모술수로 정치를 할까 아니면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이 될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권모술수 못지 않게 신뢰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여우처럼 교활해도 국민이 믿어주지 않으면 그 군주는 더 이상 여우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권모술수와 신뢰를 동시에 강조했으니 이 모순을 어떻게 조화할 수 있을까?

오늘날 스위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전세계의 최상위권이다. 과거 농경시대에 알프스 산맥에 자리잡은 스위스는 가난한 나라였다. 가난하다보니 먹고 살기 위해서 용병으로 해외에 나가 돈을 벌어 고국으로 보냈다. 그렇게 보내온 돈을 관리하기 위해 은행업이 발달했다. 스위스 용병은 아주 유명하다보니 대를 이어 용병을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용병을 하고 아버지가 용병을 하고 그 자식이 용병을 했다.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의 왕궁을 지키던 군인은 프랑스 군인이 아닌 스위스 용병이었다. 파리 시민의 공격으로 루이 16세는 패배를 예견하자 자신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에게 승산이 없으니 도망가도 좋다고 허락한다. 하지만 그때 스위스 용병들은 모여서 회의를 한다. 도망갈 것인가 최후의 1인까지 남아서 싸우다 죽을 것인가?

회의의 결과는 우리를 눈물 짓게 한다. 루이 16세와 왕궁을 포기하고 도망가면 자신들은 살겠지만 스위스 용병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자기 자식들은 용병으로 오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 회의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결론은 끝까지 싸우다 죽자였다. 스위스 용병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멸하고 이를 애도하는 조각상이 스위스 루체른에 가면 ‘빈사의 사자상’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져 있다. 사자는 죽어가는 스위스 용병을 상징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유럽의 여러 왕들은 혁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왕정이 무너질까 걱정한다. 이에 프랑스를 침공하였지만 나폴레옹이 혁혁한 공을 세우고 여세를 몰아 황제의 위치에 오른다. 프랑스 혁명은 루이 16세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나폴레옹에게 바친 격이 된다. 베토벤은 유럽 민주주의를 지키는 영웅으로 나폴레옹을 존경하는 마음에 교황곡 3번을 나폴레옹에게 바치려고 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민중을 배반한 나폴레옹에 실망하여 교황곡 3번의 악보를 찢어버렸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교향곡 3번이 ‘영웅’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이러한 일화 때문이다.

스위스 용병은 신뢰를 잃지 않았기에 나폴레옹 때에도 원래의 계약에 의해 용병이 된다. 스위스 용병은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할 때 같이 진군한다. 프랑스군이 패배해도 전장을 이탈하지 않고 나폴레옹이 철군한 뒤에야 스위스로 돌아온다. 스위스 용병의 신뢰는 이렇게 계속 된다. 오늘날 로마 교황청에 가면 아주 멋진 복장의 근위병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탈리아 사람도 아니고 로마 시민도 아니다. 그들은 스위스 사람이다. 스위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할까? 한 연구에 의하면 여성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와 연애 상대를 선택할 때 끌리는 남성형이 다르다고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배우자로는 인기가 좋을지 몰라도 연애 상대로는 인기가 없다.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보다 매력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인간은 나쁜 남자, 나쁜 여자에 끌린다. 이게 바로 나쁜 남자, 나쁜 여자 신드롬이다. 국민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을 좋아할까? 우리는 혜성처럼 나타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매력 있는 정치인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나쁜 정치인에 끌릴 위험이 다분하다.

체사레 보르지아와 아자타사투르 왕의 사례에서 보듯이 권모술수만이 성공의 요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국민의 신뢰는 어떨까? 국민의 신뢰도 성공의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권모술수와 신뢰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어도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요인 이외에도 수많은 요인과 조건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가다국은 인구가 더 많고 경제적으로 더 부유한 나라였기에 전쟁에 이겼을 수도 있고 우연히 좋은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이겼을 수도 있다.

모든 군주는 성공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무기를 동원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권모술수는 나쁜 무기이고 국민의 신뢰는 좋은 무기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무기만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나쁜 무기든 좋은 무기든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우는 사람을 이기기 어렵다. 아무리 불교의 관점에서 좋은 무기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아자타사투르 왕의 사례에서 보듯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이길 확률이 더 높다. 세상이 험할수록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이긴다. 하지만 좋은 세상에서는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을 이긴다. 또한 두 사람이 가진 나머지 무기가 동일하다면 착한 무기는 악한 무기를 이긴다. 인간은 모두 선과 악을 행하며 공업을 짓는다. 악한 세상도 선한 세상도 우리가 만든 세상이다. 신뢰가 권모술수를 이길 수 있는 세상이 바로 불국정토다.

좋은 수단과 방법으로 싸우는 사람이 싸움에는 지지만 좋은 수단과 방법을 선택한 보상이 있을까? 불교는 좋은 업을 지으면 좋은 과보를 받는다고 말한다. 좋은 업은 어떤 과보를 받을까? 경전에는 추상적으로 쓰여 있지만 현실 속에서 과연 어떤 좋은 점이 있을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부처님은 아자타사투르 왕을 풀어준 프라세나짓 왕에게 편안한 삶을 살 것이며 이익을 거둘 것이라고 하셨다. 아자타사투르 왕은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악인이니 자기 자식이나 주변을 몹시 괴롭혔을 것이 틀림없다. 아자타사투르 왕은 제바달다와 모의하여 부처님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지옥이었을 것이다. 최근 과학의 연구에 의하면 트라우마에 유전자가 변형되고 후세에 전달된다고 한다. 좋은 말과 행위도 트라우마의 사례처럼 유전자를 변형시키고 후세에 전달된다면 착한 일은 분명 이익을 가져온다.

한 연구에 의하면 착한 사람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고 한다. 마음이 편안하고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며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면 선한 행위는 한번 해볼만한 일이다. 불교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종교이다. 무조건 착한 일 하면 복 받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지옥 같은 세간을 사는 중생에게 설득력이 없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 것인가? 좋은 생각, 말, 행동이 분명 현실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부처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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