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닦음의 길 23

불교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수련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프로그램 가운데 〈반야심경〉을 사경(寫經)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날 저녁 절을 한 번 할 때마다 한 글자씩 종이에 베껴 쓰는 수련을 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270배를 하면서 〈반야심경〉 전체를 쓰고 읽은 셈이 되었다. 난생 처음 해본 경험이었지만, 산란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왠지 모를 고요함이 느껴졌다. 이전에도 경전을 공부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정성껏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왜 사경을 수행이라 생각하고 실천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경(寫經)이란 글자 그대로 경전을 베껴 쓰는 것을 의미한다. 사경은 본래 경전을 널리 유통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있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경전을 널리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직접 종이에 베껴 쓰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쇄술의 발달로 경전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유통 목적으로서의 사경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대신 사경은 공덕을 쌓는 행위라는 새로운 의미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붓다의 말씀인 경전을 정성껏 베껴 쓰면 공덕이 쌓여서 미래에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경은 수행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다시 말하면 사경을 통해 불교의 목적인 깨침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글자만 베껴 쓴다면 수행으로써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寫)’란 글자만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담긴 붓다의 가르침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기는 행위다. 즉 경전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정성껏 새기면서 붓다를 닮아가야겠다고 발원(發願)하는 성스러운 의식인 것이다. 이러한 수행이 무르익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면, 사경은 깨침을 향한 수행으로써 충분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실제로 사경을 해보면, 마음집중이 되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많이 난다. 글씨만 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일념으로 사경을 하면 글자가 매우 가지런하지만, 마음에 번뇌가 일어나게 되면 글자가 고르지 못하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기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은 것이다. 사경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키고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수행을 하면 경전에 담긴 붓다의 진리와 글을 쓰고 있는 내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사경 삼매(三昧)에 이르게 된다. 사경이 보조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수행체계가 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화엄경〉의 결론이라 불리는 〈보현행원품〉에는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오기까지 발심하고 끊임없이 정진하였는데,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았으며, 피를 뽑아 먹물을 삼고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했다”고 하였다. 〈법화경〉에서도 “이 경전을 수지독송하여 바르게 기억하고 익히며 베껴 쓰는 중생이 있다면, 이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직접 만나 경전을 들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만큼 사경이 중요하며 공덕이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경은 단순히 경전을 베끼는 행위가 아니라,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경은 붓다의 말씀을 사색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사색이 무르익어 일상으로 이어질 때, 듣고(聞) 사색(思)하며 실천(修)하는 불교 공부의 세 박자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전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글자만을 베껴 쓴다면, 이것은 올바른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경전에 먹히고 굴림을 당할 뿐이다. 아무리 사경을 많이 해도 삶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다운 사경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경전을 굴릴(轉經)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다름 아닌 문제의식을 갖고 간절한 마음으로 사경하며 일상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사경하기 전에 절을 하는 것도 이를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내가 경전을 굴리고 있는지, 경전이 나를 굴리는지 한번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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