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법신장 위태천 ‘날개투구’ 쓴 이유

‘스칸다’ 음차·한역해 ‘위태천’으로
시바 장남으로 ‘공작’을 타고 다녀
불교 신장되고 신앙 대상으로 숭앙
북송 이후 ‘날개 투구’ 도상 정형화
동방원정 후 “니케와 결합” 의견도

동인도 팔라시기(8~9세기) 제작된 스칸다의 모습. 위태천의 기원인 스칸다가 공작을 타고 왼손에 창을 들고 있으며, 뒤로 공작의 깃털이 광배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몇 해 전 겨울,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 학예사 키라 씨와 함께 조계사와 불교중앙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중앙아시아 불교미술 연구자인 그녀는 한국의 불교미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도상을 가리키며 그리스 신화의 전쟁과 승리의 신 니케(Nike)와 매우 흡사한 이 신상은 누구냐고 물었었다. 니케의 날개가 등이 아닌 머리에 쓴 투구에 달린 이 신은 과연 누구일까? 이미 독자들은 이 글을 읽으며 그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바로 ‘위태천(韋?天)’이다.

위태천은 범어인 ‘스칸다(Skanda)’를 음차해서 사건타(私建陀)·건타(建陀)·사건타제바(私建陀提婆)라고 하며, 한역하여 위천(韋天)·위천장군(韋天將軍)·위장군(韋將軍)이라고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하였다. 

위태천의 기원인 스칸다는 <마하바라타(Mahabharata)>와 <라마야나(Ramayana)>에 의하면 힌두교의 신 시바와 파르바티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전쟁의 신으로서 신들의 군대를 지휘한다고 한다. 스칸다는 머리가 여섯 개 혹은 머리 하나에 창이나 활과 화살을 지니며 공작을 ‘바하나(Vahana, 신의 탈것)’로 삼았고, 인도 전역에 그를 모신 사원과 신전에서 조각이나 회화로 발견된다.

스칸다가 불교의 신으로 차용된 설화를 살펴보면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드신 뒤 발이 빠른 귀신(疾足鬼)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훔쳐서 달아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스칸다가 무한한 힘으로 귀신을 순식간에 잡아 와서, 모든 왕과 신들이 그의 행동에 깊이 감격했다. 이후 스칸다는 여래의 사리를 되찾아 온 뒤 스투파의 도굴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처의 뜻을 받들어 출가인을 보호하고 불법을 보호하는 호법신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스칸다는 인도에서 쿠마라(Kumra)로도 불리우며, 음역하여 구마라천(鳩摩羅天) 혹은 위태천으로 한역되어 약 5세기경에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되었다. 경전에 기록된 이른 사례를 찾아보면 인도의 대승불교 승려인 용수(龍樹, 150?~250?)가 쓴 <대지도론(大智度論, K.0549, T.1509)>의 한역본(402~406년)이다. <대지도론> 제2권에는 “마라천은 진나라 말로는 동자(童子)이다. 닭을 높이 들어 올리고 요령을 잡고 있으며, 붉은 번을 쥐고서 공작을 탔다. 이들은 모두가 하늘의 대장”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북량(北凉)의 담무참(曇無讖)이 5세기 초 한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K.105) 권7에 “보살이 천신에게 공양하기 위하여 천신의 사당에 들어갔으니, 그 천신은 범천·대자재천·위태천·가전연천이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5세경에 처음 중국에 소개된 위태천은 아직 우리에게 익숙한 ‘신중도’ 속의 날개 달린 투구와 갑옷을 갖춘 특별한 천신의 모습은 아니었다.

파주 보광사 대웅보전 판벽의 위태천. 전각을 보호하는 호법신의 모습으로 위태천을 상징하는 ‘날개투구’가 인상깊다. ‘날개투구’는 북송 이후 도상이 정형화 됐다.

위태천이 특별한 천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당나라의 승려 도선율사(道宣律師, 596~667)가 저술한 <도선율사통감록(道宣律師感通錄)>에 의해서이다. 이 책에서 도선율사는 위태천을 ‘위장군’이라 칭하며,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의 여덟 대장 중의 하나이자 사천왕의 32장군들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라고 서술하였다. 도선율사가 이처럼 위태천을 불교의 중요한 신으로 묘사하면서 중국 불교에서 호법신으로서 뿐만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도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도선율사에 의해 7세기경부터 불교의 중요한 호법신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위태천은 송대에 들어서 유행한 천태종에서 중요하게 꼽은 신중들에 포함이 된다. 나아가 사리와 사찰의 수호뿐만 아니라, 천태종의 기본 경전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법화경)> 사경이나 판본의 첫머리에 수호 신장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도 고려 후기부터 경전의 앞부분에 위태천이 위풍당당하게 등장을 하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종파와 경전의 종류에 상관없이 배치되게 되었다. 

송대 이후 종파와 관계없이 위태천이 널리 숭상되었다고 하지만, 현존하는 유물은 많지 않다. 남송 시대(1127~1279)의 작품으로 일본 지온인(知恩院)소장의 ‘육도회(六道繪)’ 중 천도(天道)를 묘사한 장면에 위태천이 그려져 있으며, 조각으로 일본 초류지(長瀧寺)에 위태천상이 있다.

지온인 소장 불화에서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무장형 위태천이 묘사되어 있으나, 날개 달린 투구와 무기류는 갖추고 있지 않다. 반면에 초류지의 위태천상은 갑옷을 입고 새 깃털 장식이 있는 투구를 쓴 채 합장한 양 팔뚝 위에 보봉(寶棒)을 얹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남아있는 작품을 통해서 볼 때 위태천의 상징인 날개 달린 투구와 보봉이나 칼, 금강저 등을 든 모습이 남송 시기에는 완전히 정형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위태천의 날개 달린 투구는 어디에서 왔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견이 있다.
첫 번째, 북송(北宋, 960~1127) 초에 군대의 법제화를 위해서 편찬된 <무경총요(武經悤要)>에 “장수들은 갑옷을 입고, 새 깃털 장식이 있는 투구와 흉갑을 두루 갖춘다”는 복장 규칙이 있는데, 이러한 세속의 복식이 위태천 도상의 형성에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두 번째, 위태천의 기원인 스칸다의 바하나가 공작일 뿐만 아니라, 바람보다 빠른 군신이었던 원래의 모습을 잊지 않고 공작의 날개가 투구에 그리고 신들의 군대를 통솔했던 과거가 무장형 갑옷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다.

세 번째, 기원전 3세기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그리스의 전쟁과 승리의 신 니케와 힌두교의 전쟁의 신 스칸다가 만나서 불교에 유입된 후 동쪽으로 이동한 결과라고 하는 의견도 있다. 

위태천의 도상 형성과 관련된 위와 같은 추측 이외에 명확히 글로 기록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판본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의 서두에는 위태천을 묘사하고 행장을 상세히 적고 있다. 그 내용은 이와 같다. 

“용과 하늘이 공경하고 찬탄하는 3주의 불법을 옹호하는 위태존천께서는 (중략) 석가여래 계신 때에 성도하여 호를 동진보살이라 받으셨다. 손에 팔만 사천 근의 금강보저를 들고 큰 서원 발하기를 만약 금강보저가 무너지면 동진의 몸도 부서지리라 하셨다. 석가여래께서 큰 서원 발하기를 부처께서 세간에 출현하실 때 불법을 구하고 보호하리라. 머리에는 봉황 깃 투구를 발에는 검은 신을 몸에는 황금 갑옷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송대에 갑옷과 날개 달린 투구 그리고 무기류를 갖춘 위태천 도상은 원(元)을 거쳐 명대(明代)에는 확실히 정립하며, 천왕전(天王殿)의 입구나 내부에 반드시 안치하였다. 

한국에서도 고려 시대의 목판화인 <소자본묘법연화경(小字本妙法蓮花經, 1286년)> 등에서 사경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등장하여, 조선 후기에는 위에서 살펴본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행장의 내용처럼 신중들의 대장격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인도에서 날아온 스칸다가 부처님의 가피 안에서 천신에서 호법신으로 그리고 신중들의 주존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신중도 속에서 위태천을 보면 잘생긴 대장부가 날개 달린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모습이 멋져서 사경의 앞머리를 장식하거나 전각의 외벽에 그려지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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