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字’ 화두 완성시킨 선지식

南宋 이종황제에게 〈무문관〉 상진
‘無자’, 禪의 제1관문임을 강조해
선종 3대저서 평가… 韓서도 애독
한국 선지식들 무자 화두로 정각

중국 호남성 류양 석상사 무문관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의 모습. 스스로를 가둬 정각을 얻는 무문관 수행은 무문 혜개의 저서 '무문관'에 어원을 둔다.

“봄에는 꽃이 있고, 가을에는 달이 있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있다/ 망상에 사로잡히지만 않는다면 모두가 좋은 계절이다.(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무문관〉
 
이는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의 선시이다. 어느 선사가 ‘꽃잎은 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꽃잎은 떨어져도 꽃이라는 존재는 영원히 존재한다. 피고 지는 생멸하는 현상 속에 변치 않는 영원한 실재가 있다. 그 실재란 실상(實相)이요, 무아(無我)이며, 공(空)을 말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생겨나 잠시 존재하다가 파괴되어 사라지게 되어 있다(生住異滅). 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현상은 파괴되어 사라지지만 그 밑바닥에는 변치 않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참된 실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는 것, 분별심이 없이 실상을 관함이 깨달음의 경지이다.

혜개의 말대로 망상(생각)에 빠져 있지 않으면, 본질의 세계를 그대로 본다. 이에 소동파(1037~1101)도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라고 하였고, 도오겐(道元, 1200~1253)은 “눈은 옆으로, 코는 세로로 달려 있다(眼橫鼻直)는 사실을 알았다”고 읊었다. 

혜개의 행적 
위 선시의 저자, 무문 혜개는 〈무문관〉을 통해 무자 화두를 체계화한 대표 선사다. 무자화두는 거론하지만, 정작 혜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혜개는 남송 시대 절강성(逝江省) 전당(錢塘, 현재 항주) 양저(良渚) 출신이다. 처음에는 천용광(天龍曠)에게 출가해 가르침을 받고, 선지식을 찾아 다녔다. 이후 양기파 강소성 만수사(萬壽寺) 월림 사관(月林師觀, 1143~1217)의 제자가 되었다. 사관은 혜개에게 무자 화두를 참구하라고 하였다. 혜개는 스승 문하에서 무자를 6년간 참구하면서 ‘만약 수면에 빠지면 내 몸을 태워버리리라’라고 맹세하였다. 혜개는 수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선방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가며 정진하였다. 

신라의 자장 율사(590~658)도 깊은 산골에서 홀로 백골관을 닦으며, 작은 토굴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수행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가시를 둘러친 것이다. 또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고 수행했는데, 조금이라도 졸면 머리카락이 당겨져 바로 깰 수 있도록 자신을 경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혜개는 점심공양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 깨달았다(聞聲悟道). 

“청천 백일에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대지 위 삼라만상의 눈을 활짝 열어주었네./ 모든 만물이 모두 머리를 숙이니/ 수미산이 뛰어올라 어깨 춤(三臺)을 추는구나.(행天白日一聲雷 大地群生眼豁開 萬家森羅齊稽首 須彌勃跳舞三臺)”

혜개의 오도송 첫머리에 “청천백일에 천지를 진동하는 뇌성이 울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혜개의 정진이 북소리와 닿아 시절인연이 맞은 것이다. 혜개는 월림에게 오도송을 보였으나 월림은 ‘허튼 소리 하지 말라’며 내쫓았다. 혜개가 오히려 크게 할을 하자, 스승도 할을 하면서 스승과 제자가 정각의 도반이 된 순간이었다. 혜개는 사관에게 인가를 받고 법을 받았다. 

혜개는 스승이 입적한 다음 해 1218년 35세 때 호주(湖州) 안길산(安吉山) 보국사에 머물며 개당 설법을 하였다. 이후 혜개는 강서성(江西省) 천녕사·황룡사·취암사·강소성·초산 보제사·평강 개원사·건강 보령사 등지에 머물며 선풍을 전개했다. 혜개가 머무는 곳마다 승려들 이외 재가자들까지 찾아왔다.

혜개는 1246년 64세에 황제의 명에 의해 호국인왕사를 개산하고, 이곳에서 선풍을 진작했다. 그런데 선객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선사가 이를 피해 서호(西湖) 언덕에 은거했으나 학인들이 여기까지 찾아왔다. 어느 해 이종(理宗) 황제가 선사를 초청했는데, 마침 가뭄이 들어 법을 설해 마친 뒤에 비가 내리는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 황제는 혜개에게 금란가사를 하사하며, ‘불안선사(佛眼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혜개는 1260년 78세에 탑을 세우게 하고, 감실을 완성한 뒤에 스스로 찬탄하며 말했다. “허공은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다. 이런 허공의 이치를 체득하면, 허공은 별 것이 아니다.”

선사는 ‘지수화풍 4대가 꿈·환상·물거품·그림자와 같아서 78년 세월이 손가락 한번 튀기는 사이와 같다’고 하였다. 이렇게 게를 설해 마치고, 좌탈입망하였다. 

〈무문관〉은 어떤 어록인가?
1228년 남송 이종황제의 즉위를 기념해 〈무문관〉을 상진하였다. 〈무문관〉은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고도 한다. ‘무문관’이란 ‘무(無)’ 자의 정확한 탐구만이 선문(禪門)의 종지(宗旨)로 들어서는 제일의 관문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총론에 해당하는 제1칙이 ‘오로지 이 하나의 무 자가 종문의 일관(一關)’이라고 하였다. 〈무문관〉은 조주 무자를 드러내기 위함이고, 1칙 이외 47칙은 조주 무자를 철저히 투과했는지를 다시 점검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도 다름없다.


혜개는 제자를 제접할 때, 제자들의 근기에 맞는 공안을 3~4개씩 부여했다. 그런 뒤에 제자의 수행을 점검해주었는데,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46세(1228년) 때 동가(東嘉)의 용상사에서 선객들에게 강의하고, 집성해 모은 것이 〈무문관〉이다. 참 노사(老師)로서의 기량이 원숙기에 접어든 것을 집결한 것이 〈무문관〉이라고 볼 수 있다. 혜개는 옛 선인의 공안 48칙을 선별해 본칙과 혜개 자신의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48개 화두에 평창(評昌)과 송을 붙였다. 

선사는 〈무문관〉 서문에 ‘납자들이 내게 찾아와 고인(古人)의 공안을 가지고 진리의 문을 두드리는 기와조각과 같은 수행의 방편으로 삼도록 하여 근기에 따라 학인들을 지도하였다’라고 하였다. 편자는 혜개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미연 종소(彌衍宗紹)라고 하는데, 그에 대해 알려진 기록이 없다. 이 책은 1245년에 맹공이 다시 간행하여 남송 때 널리 유포되었다. 〈무문관〉은 〈벽암록〉·〈종용록〉과 함께 선종의 3대 저서요, 우리나라 선객들도 애독하는 선서이다. 

무자 공안의 선종사적 의의
무(無)자는 간화선 선자들이 가장 많이 들고 있는 화두이며, 요긴한 화두이다. 선종사 측면에서 무자 화두를 살펴보자. 오조 법연은 〈법연어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대들은 오롯이 ‘무(無)’자를 생각하라. 그대들 가운데 이를 일삼아 공부하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있다면 누구 하나 여기 나와서 대답해보라. 나는 그대들이 ‘있다(有)’고 말하는 것도, ‘없다(無)’고 말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있는 것도 아니요(非有)’, ‘없는 것도 아니다(非無)’라고 말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또한 대혜 종고도 〈서장〉의 ‘강급사(江給事)에게 답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無)’라는 한 글자야 말로 분별을 타파하는 몽둥이다. 그것에 ‘있다’, ‘없다’라는 판단을 하지 말라. 또한 이론적인 해석을 해서도 안된다. 오직 일편단심으로 걸을 때도 멈춰 있을 때도 누워 있을 때도 앉아 있을 때도 모든 정신을 집중하라.” 

혜개도 〈무문관〉에서 “360골절 뼈마디, 8만 4천의 털구멍, 온몸, 온 정신에 똘똘 뭉쳐 하나의 의문 덩어리를 만들어 이 무자 화두를 참구하라”고 하면서 해탈의 대자재를 얻으라고 하였다. 혜개는 사량분별심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무자 화두를 강조하였다. 또한 “참선하는 데는 모든 조사들이 경험한 바를 그대로 하는 것이 좋다. 무엇이 조사의 관문인가(?) 하면 ‘오직 무자’ 뿐이다. 이렇게 하면 역대의 조사들과 손을 잡고 듣거나 볼 수가 있게 된다. 이보다 유쾌한 일이 어디 있는가”라고 하였다. 곧 혜개는 대의(大疑)의 응결(凝結)과 이 의단(疑團)을 타파하는 두 단계의 수행구조를 강조하고 있다. 

다음 고봉 원묘는 〈선요〉에서 “의심은 믿음을 본체로 삼고, 깨달음은 의심을 작용으로 삼는다. 믿음이 충분하다면 의심도 충분하다. 참선하려면,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 대신근(大信根)·대분지(大憤志)·대의(大疑)”라고 하였다. 

대체로 무자 화두에 대한 선사들의 공통된 점은(혜개도 그러지만) 무자에 큰 의심을 하고, 타파하는 2단계로 통일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오조 법연에게서 무자 공안이 비롯된 이래 손자뻘 제자인 종고에서 발전되었고, 다시 혜개에 의해 완성되었다. 무자 화두는 인도선이 중국으로 유입된 이래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자 화두로 정각을 이루다 
우리나라 선사들도 무자 화두로 정각을 이룬 선지식들이 많다. 고려 말기로 접어들면서 강화도 선원사를 중심으로 몽산 덕이(1231~1308)의 선풍이 수입되어 간화선이 토착화되었다. 덕이는 무자 화두 위주의 간화선 수행법과 깨달은 후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 받는 전통을 강조하였다. 이 점이 우리나라 조계 선풍의 큰 골격인데, 이는 덕이의 선풍에 영향을 받아서이다. 

고려 말기, 태고 보우(1301~1382)는 무자 화두가 간화선 수행 중에 최고이며, 이 무자 화두가 간화선의 출신활로이며, 선이 지향하는 유일한 길이자 최고의 경지라고 강조했다. 보우와 같은 시대 인물인 나옹 혜근(1320~1376)도 네 가지(萬法歸一 一歸何處·父母未生前本來面目·是什投·無字) 화두를 강조했는데, 이 가운데 무자 화두가 포함되어 있다. 

서산 휴정(1520~1604)도 〈선가귀감〉에서 ‘조주 무자’를 중시하였다. 휴정과 사형제 간인 부휴 선수(1543~1615)도 “조주 무자에 의단을 일으켜 12시중에 오롯하여라. 물이 다하고, 구름이 다한 자리에 이르면 곧 바로 조사의 관문을 파하리라”라고 하였다. 〈선문수경〉의 저자 백파 긍선(1767~1852)도 임제의 3구에 입각해 선문을 판석했는 데, 마지막에 무자화두 드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또한 경허의 제자인 만공(1388~1463)은 무자로 정각을 이루었다. 만공은 공주 마곡사 토굴로 옮겨와 2년간 보림을 한 뒤에 스승 경허선사를 만났다. 만공이 자신의 수행 경지를 말하자, 경허 선사가 말했다. “아직 너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다. ‘만법귀일’ 화두로는 진전이 없는 것 같으니, ‘조주 무자’를 들어라. 무문관을 통하여 다시 정각을 얻도록 하여라. 반드시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어보도록 하여라.” 

이렇게 스승이 다시 준 무자 화두를 붙잡고 씨름하던 중에 새벽 종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아 경허 선사로부터 ‘만공’이라는 법호와 전법게를 받았다.

이와 같이 살펴본 대로 송나라 때, 오조 법연-대혜 종고-무문 혜개-몽산 덕이-고려-현대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위한 최고의 기와조각이 무자 화두였다. 바로 이런 점에서 ‘무’자를 종문(宗門)의 일관(一關)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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