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고려시대 차 문화

관료계 문인들 중심으로
차 향유층 새롭게 부상
차문화 주도한 승려들과
교유하며 귀한 차 경험
지겸 스님·임춘 대표적

12세기 문인 임춘의 시 '희서겸상인방장'이 수록된 '서하집' 2권. 수행이 깊고 차에 밝았던 지겸 스님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고려 후기 차 문화는 다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전기의 차 문화와 무신 정권기, 그리고 원의 간섭기의 차 문화의 흐름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관료 문인들이 차의 향유층으로 부상한다. 무엇보다 고려 후기 차 문화의 흐름 중에서 문인들이 차 문화를 주도했던 승려들과의 교유를 통해 사원이 주관하는 명전(茗戰)에 참여하거나 귀한 차를 접할 수 있었던 창구였다. 따라서 사원과 승려들은 실제 고려 시대 차 문화를 생성해낸 그룹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런 정황은 12세기 인물 임춘(林椿 1148~1186)의 〈기차향겸상인(寄茶餉謙上人)〉에서 확인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래 몽산차 한 움큼을 얻었는데
(近得蒙山一社春)
붉은 도장 찍힌 백니차는 색과 향이 싱그럽네
(白泥赤印色香新)
징심당의 늙은이 명품을 아시기에
(澄心堂老知名品)
더욱 기이하고 진귀한 자순차를 보냈구려
(寄與尤奇紫筍珍)

윗글에서 임춘이 말한 겸상인(謙上人)은 어떤 인물이기에 송 황실에 공납되는 극품의 자순차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마 겸상인은 고려 왕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로, 승려임이 분명하다. 상인이란 승려를 지칭하는 것이며, 징심당(澄心堂)도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집이란 뜻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병삼 교수의 〈한국불교사〉를 살펴보면, 강종 2년(1213)에 지겸을 왕사(王師)로 추천하면서 이규보의 〈정각국사비(精覺國師碑)〉에 “양종오교에서 왕사의 대임을 맡을 자는 지겸 밖에 없다”라는 내용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겸상인은 지겸일 가능성이 크기에 임춘에게 몽정산에서 나는 자순차를 보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임춘이 ‘겸상인’에 받은 몽정 자순차는 송 황실용 어원에서 생산되는 귀품의 차이다. 이런 차를 접할 수 있는 건 고려 왕실이나 혹은 송 황제와 관련이 있는 수행승에게 하사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리 흔한 사례는 아니다. 따라서 지겸은 왕실로부터 공양받은 귀중한 차를 임춘에게 보냈던 것이며 왕실에서 하사한 차이므로 붉은 도장이 찍힌 백니(白泥)차였던 것이다. 그런데 백니란 무슨 차일까. 이는 12세기에 유행했던 연고차(硏膏茶)로, 하얀 차 거품이 나는 백차이다. 백차는 어원에서나 생산되는 귀중한 차였고 가장 맛과 향이 좋은 차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차인데, 송 황실에서 하사한 차 이외에도 고려에서도 이런 차가 생산되어 향유되었다.

한편 임춘이 지겸이 수행이 깊고 차에도 밝았다는 점을 재차 언급한 시는 〈희서겸상인방장(戱書謙上人方丈)〉이다. 임춘의 〈서하집〉 권2에 수록된 이 시는 12세기 사원의 음다의 풍모를 가장 잘 드러낸 시라고 할 수 있는데, 지겸의 인품과 격을 이렇게 노래했다.

뛰어나신 겸공은 총림에서도 으뜸이라
(謙公俊逸叢林秀)
고결하고 꼿꼿한 모습, 맑고도 여위였네
(玉骨럈럈淸且瘦)
부처님의 가풍이 설두에게 전해져
(佛祖家風傳雪竇)
수행하시는 곳, 문득 사자후가 들리네
(踞地便聞師子吼)
잠잠히 선정에 들어 입을 닫은 채
(默坐澄心牢閉口)
공이나 유(有)를 더는 말하지 않지만
(不復談空還說有)
올곧은 늙은 방거사가
(自知龐蘊一狂北)
이따금 참선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네
(往往參禪來稽首)
오랫동안 술을 금한 서당을 비웃었더니
(祇笑西堂長禁酒)
내게 삼매의 솜씨로 차 내는 걸 뽐내는구려
(誇我點茶三昧手)
돌솥에 물 끓는 소리
(石鼎作聲嗔蚓叫)
물고문당할 객을 구할 이 누군가
(客遭水厄誰能救)
일만 전으로 한 말 술을 산 것과는 같지 않지만
(不似十千沽一斗)
조금 진한 제호 같은 차, 감로보다 짙구려
(醍苕微濁甘露厚)
또 묻노니, 고승께서도(이것을) 마실는지
(且問高僧飮此否)

윗글은 7언 율시로 16구로 구성되어야 하지만, 현존하는 건 15구만 남아 있어 1구는 빠진 채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문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할지라도 그 규모와 당시의 차 문화의 특징이나 정황을 파악하기엔 무리가 없어 보인다. 아무튼 이 시는 임춘이 방장 겸 상인을 찾아갔을 때, 차를 대접받은 정황을 읊은 것이다.

그의 시엔 지겸 스님이 총림에서도 우뚝한 고승으로 명망을 지녔기에 공과 유무에 회통하신 수행승으로 묘사했고, 아울러 차를 잘 다루는 수행승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겸상인방장’이란 표현했기 때문에 이미 지겸 스님이 방장으로 추앙받는 고승이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지겸이 1213년 왕사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임춘은 지겸이 왕사에 오르는 걸 보지 못했던 듯하다. 그는 지겸상인에 대해 방거사도 예를 갖추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 방거사(?~808)는 어떤 인물인가. 바로 당대 형양 사람으로 석두(石頭)에게 나아가 공부함으로써 선지(禪指)를 깨우친 선각자이다.

그의 이름은 온(蘊)이며 도현(道玄)이란 자를 썼다. 그러므로 방 거사처럼 도가 높은 수행자가 ‘겸 상인’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으니 이는 지겸 스님이 얼마나 추앙받는 수행자인가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임춘의 이 다시는 고려 시대 차 문화를 생성하고 이끈 그룹이 사원과 승려들이었음을 재삼 확인해 준 자료이다. 그런데 임춘은 어떤 삶을 살았던 인물일까. 한마디로 그는 울분과 실의, 가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한 때 문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시기도 있었지만 무신 정권이 들어서자 혹독하게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고려 건국에 공이 있어 대대로 공음전(功蔭田)의 은택을 입었던 그의 집안이지만 이마저 탈취를 당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타향을 떠돌며 불우한 생을 살았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이인로 등과 죽림고회(竹林高會)를 결성, 시와 술을 즐기며 무신 정권기의 불만을 토로하고 세상을 탄식했다. 이런 고난의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건 그와 교유했던 승려들이었다. 특히 요혜(了惠) 수좌는 가난한 그에게  양식을 보내  위안을 주었는데, 이는 그의 시 〈요혜가 양식을 베풀어 줌을 사례하며(謝了惠首座惠糧)〉에 드러나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오늘 아침 문 두드려 새벽잠을 깨우더니
(今朝打門驚周公)
좋은 쌀 몇 곡을 가득 얻었네
(乞與長腰盈數斛)
서둘러 아낙 불러 쌀을 씻어서
(急呼茵婦甑洗塵)
옹기솥에  앉히니 막 밥이 익는구려
(厚埋飯甕炊方熟)
허리끈 풀고서 배불리 밥을 먹고
(緩帶甘飡若塡塹)
일곱 잔 좋은 차를 가득 마시자
(七椀香茶飮更足)
솔솔 맑은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일어나
(習習淸風兩腋生)
이 세상 벗어나 하늘을 나는 듯하구나
(乘此朝眞謝塵俗)

윗글은 아마 무신 난을 만나 개경에서 5년간 은둔하다가 영남으로 피신, 타향을 떠돌던 그가 과거 준비를 위해 다시 개경으로 상경한 시기의 시로 보인다. 이 무렵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을 것인데 이때 요혜 수좌가 그에게 식량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얼마나 배고픔이 컸으면 급하게 밥을 하는 아낙을 불러 밥을 짓게 했을까. 허리끈을 풀어 제치고 배불리 밥을 먹던 그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냈고, 곤궁한 삶 속에서도 차를 즐긴 그의 일상이 고스란히 서술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의 시 말미에 “일곱 잔 좋은 차를 가득 마시자(七椀香茶飮更足)/ 솔솔 맑은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일어나(習習淸風兩腋生)”다고 한 내용은 원래 당나라 노동의 〈주필사맹간의대부신차(走筆謝孟諫議大夫新茶)〉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를 〈다가〉, 혹은 〈칠완다가〉라고도 한다. 차를 마신 후에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변화를 가장 아름답고 정확하게 서술한 다시로,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의 차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의 〈칠완다가〉의 일부분을 소개하면 “첫 잔은 입술을 적시고(一碗喉吻潤)/둘째 잔은 괴로운 고민을 없애고(兩碗破孤悶)/ 셋째 잔은 거친 마음 헤치니 (三碗搜枯腸)/ 오천 권의 문자가 있을 뿐이라(唯有文字五千卷)/ 넷째 잔은 가볍게 땀이 나니(四碗發輕汗)/다섯째 잔은 몸을 가볍게 하고 (五碗肌骨輕) /여섯째 잔은 신령한 신선과 통하며(六碗通仙靈) /일곱째 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七碗吃不得也)/겨드랑이에서 스멀스멀 바람이 이는 걸 느끼겠네(唯覺兩腋習習헌風生)”라고 했다. 실제 좋은 차를 잘 끓여 마시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변화를 느낀다. 더구나 어려운 시절을 감내했던 임춘에게는 차의 공력이 더욱더 절실했을 것이다.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