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부처를 만들 수도 있고 악연을 만들 수도 있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기우제를 지내려면 음식을 많이 차려 놓고 지내면 됩니다.” 하고 나라에다 고했습니다, 힌두교에서. 그래서 나라에서 그것을 허락을 했습니다. 근데 이쪽에선 이 스님네들한테 청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반댑니다. 한쪽은 청해 올라갔고 한쪽은 청해 올 때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바란 것은 아닙니다. 역시 비가 오고 비가 안 오고 간에 그건 부처님께서 다 알아서 하는 일이고 진리이니까 그러겠지마는 그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분별을 못 하고
한 발짝 떼 놓지도 못한다면
그건 병신이고 목석이고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 사람 부처 되는 거 봤습니까?

그래서 서로 쌈이 붙었던 거죠. “너희가 해 봐라. 그러고 난 뒤에 우리가 하겠다. 기우제를 지내고 안 지내고 간에 우리가 하고 싶으면 하고 또 국민들이 이렇게 애를 쓰고 그러는데 우리도 기우제를 어찌 지내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너희가 먼저 해 보고 비가 안 온다면 우리가 그때 하겠다.” 하고서 쌈이 벌어졌죠. 그 기우제를 지내는 데는 세 개의 탕을 해 놓고서는, 옷을 다 벗고 목욕재계를 하고 이렇게 해서 물에다가 과일서껀 깨끗이 씻어서 사람이 쭉 늘어서 가지고선 받아서 이렇게 해서 상단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단으로부터 중단, 상단으로 씻어서 이렇게 해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갖은 물건을 다 해 놓고서 기우제를 사흘이나 지내도 비는 안 왔습니다. 그래서 재차 또 사흘을 지내도 안 와서 재차 또 사흘을 지내도 안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우제는 다 끝났죠.

그런데 이 스님네들이 “너희들은 우리 기우제 지내는 걸 와서 구경을 해라.” 했습니다. 그러고선 스님네들은 부처님한테 가서 여쭸습니다. “이러이러해서 이러이러한데, 힌두교에선 음식을 많이 차려 놓고 기우제를 지내야 비가 온다고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하고 여쭤 봤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선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니까 “그 힌두교의 스님네들을 위해서 내가 기우제를 지내는 법을 가르쳐 주마.” 하시면서 나가셨습니다. 한 발짝 두 발짝 떼 놓는 그 모습이 너무나 참 그, 뭐라고 말을 할까. 말로 할 수 없으리만큼 성스러웠습니다.

그러시다가, 척 걸으시다가 딱 중단하시고는 앉아 계시면서 뭐라고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이 떡 하나라면….” 하셨습니다. “이 떡 하나라면 기우제는 다 지냈느니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떡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힌두교의 스님네들은 망발을 하고 돌팔매질을 하고,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별안간에 천둥 번개를 하면서 비가 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비가 철철 와서 갈라진 땅을 메워 주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힌두교 제자들 한 대여섯 명이 부처님 앞으로 공부를 한다고 쫓아왔습니다. 쫓아와서 “부처님께서 정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까 “정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네가 만들어서 정법을 써 보아라.” 하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러곤 또 입을 딱 다무시는 겁니다.

그 힌두교에서 온 사람네들은 거기서 수년간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수년간을 지내도 도무지 그것이 자기네들한테는 확연히 씨가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쪽 편 저쪽 편 또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으르렁으르렁했습니다. 그러자 지금으로 치면 총무 스님이 부처님한테 고해서 그 네 사람을 다 내보냈습니다. 어디로 내보냈느냐 하면 “너희들이 더 했느니 덜 했느니, 많으니 적으니 하고 싸우는데 네 사람이 나가서 탁발을 하되 너희 재주껏 탁발을 해 가지고 오너라.” 하고 네 사람을, 힌두교에서 온 사람들을 다 내보내면서 한 사람만 딱 더해서 보냈습니다. 그래 다섯 사람이 탁발을 하러 나갔습니다. 제각기 헤어졌습니다. 옛날에는 공부 가르치는 것도 참 천차만별로 그렇게 다사했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내보냈는데 한 사람은 농사짓는 데를 갔습니다. 어느 골짜기로 가다 보니까 한 노인이 논을 갈고 있어요. 논을 가는데 그렇게 말라빠진 노인이 큰 황소를 밀고 나가려니까 힘이 들어서 쩔쩔매거든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스님이 그걸 자기가 쥐고 다 해 드렸더니 거기서 그 대가로 보시를 한 거죠. 그래서 보시한 것을 받아 가지고 걸망에 넣고 짊어지고 흥녀케 절로 왔습니다.

한 분은 어디로 갔느냐 하면 상인들 있는 데로 갔습니다. 상인들이 양을 여덟 마리를 놓고 파는데 어떤 사람이 양을 돈을 주고 사긴 샀는데 사다 보니까 여덟 마리가 그만 뿔뿔이 헤어져서 다 도망을 갔다는 겁니다. 그랬는데 이 스님이 그걸 보니까 안됐어서 여덟 마리를 다 붙잡아서 한데 모아서 그분에게 줬습니다. 고마웠다고 또 보시금을 주니까 또 넣어 가지고 절로 흥녀케 왔습니다.

한 분은 또 딴 데로 갔는데 아, 어딜 가려고 보니까 날이 저물어서 문 앞 추녀 끝 밑에서 밤을 새우고 가려고 앉아 있으니까 안에서 왁자지껄하고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하고선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까 아, 화가 난 듯이 문을 박차고 나오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박차고 나오는 사람더러 물었죠. “어째서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하니까 “우리 사 형제가 있는데 부모가 놔두고 가신 유산이 있어서 사 형제가 다 나누었는데 딱 한 가지를 나누지 못하고 있었던 바, 한 가지 나누지 못한 거는, 그 집에 고양이가 있었는데 그 고양이를 나누어야 할 텐데 그걸 나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거든요. “그래서 나누지 못했습니까?” 하니까 하는 말이 “나누기는 나눴습니다.” “어떻게 나눴습니까?” 하니까 “네 다리가 있는 거를 한 다리 부분, 한 다리 부분, 한 다리 부분, 한 다리 부분 넷으로 짜개어서 그 부분을 나누었습니다. 그랬는데 글쎄, 오늘 쌈 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쪽 다리 한 부분이 그만 다쳤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솜을 처매고 이렇게 해 놨는데 그만 거기 불이 붙어선 그 좋은 물건이 다 타 버렸습니다.” 이거야. 이런 데선 안 그렇지만 거기에는 방에다가 불을 넣는 그런 이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 한 부분 맡은, 다리 다친 부분의 그 사람이, 동생이 타 버린 거를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쌈이 붙었습니다.”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같이 들어가자고 그랬습니다. 같이 들어가서 이 스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네 분이 다 앉아서 들으십시오.” 하고 스님이 조용히 앉아서 하시는 말씀이 “이 다리나 이 다리나 이 다리나 이 다리나 한 다리 가지곤 다닐 수가 없어. 그러니 당신 다리도 여기 동조를 했고, 당신 다리도 동조를 했고, 당신 다리도 여기 동일하게, 망본 놈도 도둑놈이고 또 도둑질한 놈도 도둑놈이고 그러니까 전부, 도둑질을 한 놈이 다 바로 이놈입니다. 그러니 이 네 다리는 사 형제분이 다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러거든.

“그러니 이것은 누가 물고 누가 더 내고 갚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니까, 사실은 들어 보니까 그러하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가 유산 남기신 거를 올바로 정리해서 주고 서로 웃고서 화합이 되게 그 집안을 이끌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스님께서. 그래서 그 스님이 그렇게 이끌어 주신 덕분에 아주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사 형제가 엇각이 나질 않고 살게 됐다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보시를 했기에 받아 가지고 가게 됐습니다. 그래 절로 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또 한 분은 한 분대로 어디쯤 가니까 말입니다, 어느 집에 닭이 생전 울지를 않더랍니다. 새벽이 되면 닭이 울어야 할 텐데 닭이 울지 않는다고 아주 주인이 한 성화를 했습니다. 닭이 울어야 새벽이면 일어나서 논에 물도 주고 농사도 짓고 이렇게 하는데 닭이 울지 않으니 도대체 우리가 닭을 갖다 놓기만 하면, 딴 데서는 우는데 우리 집만 갖다 놓으면 울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러니 스님, 이 노릇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 스님은 “닭이 울게 하려면,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겠다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과 그 닭 자신하고 둘로 보지 않는다면 아침이면 꼭 당신을 깨워 줄 겁니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이튿날 아침에 “꼬꼬댁” 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기쁘고 기뻐서 그냥 보시금을 듬뿍 당나귀에다 하나 가득 실어서 줬습니다. 옛날에는 당나귀가 아니라 그때에 거기에서는 수레에 실어 줬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런데 또 한 분은 어디를 가다 보니까 인군이 참, 예전에는 아마 코끼리를 타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코끼리를 타고 어느 강가에 나오셔서 자기 대신들더러 묻기를, 사람들이 백절 치듯 하는 데서 묻기를 코끼리에서 내려서서 물 먹는 바가지로다 모래를 한 바가지 뚝 뜨면서 “이것은 근수가 얼마가 나가며 코끼리의 근수는 얼마가 나가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만약에 이거를 대는 사람에 한해서는 내가 인군의 대를 내리겠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웅성거리고들 말을 대는데 아무 소리 않고 인군은 그저 고개만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이 서 있으려니까 “스님은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고 묻더랍니다. 그러니까 스님은 그때에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코끼리는 한 근이 나가고 이 모래 한 바가지는 무 근입니다.” 그랬답니다. 근데 여러분은 만약에 그렇게 대답을 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인군은 그 소릴 듣더니 말입니다, 아무 소리 없이 싱그레 웃고는 입만 한 번 딱 벌렸다 오므리고는 영 아무 소리 없더랍니다. 그러고선 손만 이렇게 쳐들고서는 코끼릴 타고 그냥 가더랍니다. 그러니 이분은 아무것도, 보시금도 없이 그냥 절로 왔습니다.

그랬는데 스님께서 “너는 어떠한 보시금을 타고 너는 어떠한 일을 했느냐?” 하니까 낱낱이 하나서부터 열까지 쭉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시금도 못 타 가지고 온 스님은 아무 소리 없이 말입니다, 두 양말을 벗더니 하나는 발을 딱 오므리고 하나는 쭉 펴서는 발바닥을 세 번을 긁더랍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계시다 하는 말이 “저 발바닥 긁는 놈 보시금이 많으냐, 너희들 보시금 가져온 것이 많으냐?” 하고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들 “우리가 보시금 가져온 것이 많지 아니, 하나도 타 오지 않은 사람이 뭐가 많겠습니까.”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보시금이 제일 많으니라. 저렇게 많은 보시금을 타 가지고 왔으니 당최 무 근이지.” 하시면서 “저렇게 보시금 타는 사람이라야 기우제를 지내더라도 땅을 갈라지게 하지 않느니라.” 하시거든요.

그랬으니 어떻게 됐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요? 요새도 태풍이 이렇게 오고 가고, 해마다 태풍이 오고 또 막중한 손해도 보고 이렇게 합니다마는…. (중략)

이건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우리가 그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물질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거고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문제, 기계화로 아무리 발전이 됐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명이, 즉 말하자면 생명은 있되 생물이 형성되지 않게끔 할 수 있는 문제는 여러분이 공부하는 데에, 마음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태풍도 이것이 꼭 태풍이 있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있는 거지, 괜히 아무 소용 없는 것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닙니다. 그 태풍은…, 예를 들어서 얘기합니다. 여자와 남자가 한 번 만남에 의해서 사랑을 한다면 그걸 우리는 하루로 칩니다, 일 년이라면. 그러면 하루에 딱 한 번 만남에 의해서 하나는, 여자는 땅으로 내려오고 남자는 위로 올라가야 됩니다. 한 번 딱 부딪쳤다가 한 번 올라가고 하나는 내려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 생물이라는 존재에 영양소를 넣어 주는데, 이렇게 표현할 수밖엔 없습니다. 영양소를 넣어 주지 않으면 이 생물이 내내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결론 아래, 즉 말하자면 영양소를 넣어 주는 반면에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진화, 즉 말하자면 땅에서 노는 거는 떠나서, 물에서 노는 생물이 진화하는 데에 이게 아주 100% 요소가 됩니다.

그래서 한 번 그렇게 만남에 의해서 사랑하고 서로 헤어지는 데에 많은 물과, 즉 말하자면 바람과 또 전력의 흐름과 기체, 모든 이것이 한데 합쳐져서 그냥 불어 나가는 데는 그것이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물에 있는 생명들이나 전체 무정물이나 이 지금 생물들의 문제를 어떡하면 줄일 수 있나를 생각하면 우리가 삼십 년 안으로도 많은 걸 줄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것이 요의하다면 삼분의 일, 아니 반, 삼분의 이는 줄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뿐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거는, 지금은 앉아서 이렇게 보당을 눌러서 장사도 하고 무역도 하고 싸움도 하고 별거 다 하게끔 생겼습니다. 그래서 호국 불교도 인제는 몸이 나서서 하는 게 아니라 앉아서 하게 돼 있죠. 근데 그거를 눌러서 할 수 있는 기계화가 돼 있다면 눌러서 할…. (녹음 안됨) … 다섯 개가 한데 합치면 수레바퀴가 구를 수 있어서 그걸로써 다 할 수 있다는 문젭니다. 그래서 그것은 체가 없는 빛보다 더 빠른 게 되기 때문에 그거 누르는 거보다도 더 빠르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착오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러한 아주 참, 보배 아닌 진짜 보배라고 할 수가 있는 거죠.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태풍을 아까 얘기했는데, 그러면 강가로 돌아 돌아서 이것이 가는데 우리 인간들에게 너무 피해를 끼친다 이런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달렸어요. 조금 작게 할 수도 있고 또 능력이 없으면 아주 크게 손해를 볼 수도 있는 거죠. 우리네 살림살이하는 데에 만약에 똑바로 하지 못하면 망하는 수도 있고 똑바로 하면 흥하는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태풍은 그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한테도 그러한 영향이 미치게 돼 있다 이겁니다. 진화력에 말입니다. 왜? 그러니까 물에서 노는 생물들이 만약에 물에서 노는 동물로서 화해 가지고 인간으로서 화한다면 그게 연쇄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연관이 있다는 거는 틀림없는 사실이 뭐냐 하면 우리도 지수화풍으로 돼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도 때에 따라서 속이 상할 때는 참고 참다가 속이 펄떡 일어나면 그냥 막 내던지고 막 부수고 이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손해를 많이 보죠. 그리고 몸뚱이도 뭐, 막 부딪고 때리고 이 야단이 난다면 더욱더 손해가 나는 거죠. 이것도 태풍입니다, 한 가정의 태풍. 바로 불이 일어나면 바람이 이니까 그냥그냥 같이 섞여서 태풍이죠. 뭐, 그것만 태풍이 아닙니다. 한 가정에도 태풍이 있으며 한 나라에도 태풍이 있고, 태풍 아닌 태풍이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태풍들을 어떡하면 우리가 자유자재로 가라앉힐 수 있고 뜨게 할 수 있고, 또 ‘이 배가 너무 만원이 된다면 참 살기가 어렵다’ 하면 어떠한 종류를 좀 줄일 수도 있고 늘릴 수도 있고, ‘그러한 자유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공부를 지금 왜 이렇게 해야만 되느냐? 이걸 안 하면 앞으로는 참 살기가 어렵다 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앉아서 할 수 있는 문제가 인제는, 앉아서 기계화로서 보당을 누르는 것도 내 주먹 안에서 내가 맘대로 할 수 있어야 그걸 리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꼭 한다 안 한다 이걸 떠나서 바로 이 자리에 태어났으니까 어쩝니까? 여러분이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처 될 가능성이 있고, 부처도 될 수 있고, 여러분이 부처를 만들 수도 있고 또 악인을 만들 수도 있는 요소가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광대무변한 법은 이루종차 가면 갈수록 너무나 갖은 각색으로, 천차만별로 배울 게 너무 많습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과거다 미래다 할 것도 없이 바로 삼심이 일심이요, 일심이 삼심이요, 이렇게 일심마저도 일심이라고 할 수 없는 게 부처니라. 진리니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을, ‘어떻게 요거를 하나하나 이렇게 해서 나갈 수 있으며, 이것을 할 수 있으랴.’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마는 우리가 체험을 안 해 보고는 더디다, 이르다 이것을 생각지도 못합니다.

나는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야, 저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걸 낱낱이 알려면, 소(牛)의 과정을 한번 본다 하더라도 그거 한 사흘은 있어야 되겠다.’ 이랬는데요, 나중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야, 그렇게 사흘씩이나 보낼 게 없지 않나. 사흘은 우리가 사흘이지 사흘이 무슨 이름이 박아진 사흘인가?’ 여직껏 살아나온 마음, 여러분도 여직껏 살아나온 거, 철이 들어서 살아나온 거, 철몰라서는 부모들한테 들은 거, 그런 게 다 잠재의식에 뭉쳐 있죠? 다 아시죠? 몇 해 전에 사신 것도 아시죠?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가니까 몇 해 전에 산 거까지도 다 알게 돼 있더라는 얘깁니다.

그것을 가지고, 즉 말하자면 숙명통이라 합니다. 이 숙명통을 안다 해도 도가 아니라고 했으니 얼마나 심오합니까? 도라는 이름 없는 도가. 글쎄, 숙명통을 그 사람한테 딱, 둘이 아닌 그 자리에서 그냥 한 찰나에 알아내는데도 그게 도가 아니랬어요. 이러니 참 너무 광대하죠.

그러니 줄이고 늘리고 하는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차차…, 또 앞으로의 태풍에 대한 문제도 지금 연구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마는 이거보다 더 빠른 연구는 없습니다. 연구들 하기에 바쁜데, 모두 지금 이런 연구들을 해야 되는데 전자의 몇천 년 전, 몇백 년 전의 선조들이 하신 방편을 가지고 지금 붙들고 말입니다, 그러고는 싸우는 식인 거죠. 지금 뭐, 앞으로 과학자들의 앞장을 서야 될 텐데 몇백 년 전 거 가지고선 지금 스승을 삼고 뭐 하고 읽고 배우고….

그거를 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모두가 그것이 한데 합쳐진 주춧돌이요, 주춧돌에 의해서 거름이 되는 것이요, 거름에 의해서 우린 지금 실천을 해야 하는 시대기 때문입니다. 실천이 없다면 이건 죽은 불교지 산 불교가 아닙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분별을 못 하고 한 발짝 떼 놓지도 못한다면 그건 병신이고 목석이고 그런 거 아닙니까? 목석이고 병신이고 그런 사람 부처 되는 거 봤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단 몇 분이든 많이 오시든 나는 그런 걸 가리지 않고 여러분이 좀 더 자유스럽게, 집에서 어떤 급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의심 내지 말고 바로 그냥….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죠? 내 주장자 하나를 탁 던지면 자기가 쓸 수 있는 수효는 그대로 만 개가 될 수 있고 천 개가 될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고, 또 들일 수 있고 맘대로 낼 수 있고 거둘 수 있고, 이것저것으로 변모될 수 있고 다양하게 환경에 따라서 쓸 수 있는 기구가 될 수 있고, 이것이 만능인 우리 부처님의 뜻에 의해서 가르쳐 주신 법인데도, 팔만대장경인데도 그것을 다 도랑도랑 읽기만 했지, 또 금강경을 도랑도랑 읽기만 했지, 뭐, 몇 독을 했다던가요? 몇 독을 하면 뭘 합니까? 그 뜻을 알아야죠. 하나의 뜻을 알면 열 가지 뜻을 알아. 백 가지 뜻을 알고. 그렇듯이 한 사람이 평생 살아온 것이 한 찰나에 전부 알아진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한 사람이 이런 공부를 하게 되면 그 나라가 융성한다고 했습니다. 왜? 경제난에도 그렇고 우리나라가 어땠습니까? 그런데 요새 살림살이는 조금 세련돼 가고 있죠? 한 가정이라고 칩시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새 조금 세련돼 가요. 그것뿐입니까, 어디? 과학적으로도 조금 세련돼 가고, 또 국고를 다지는 데도 과학적으로 국고를 다지게 돼서 참 천만뜻밖으로 감개무량하고요. 그것이 어디의 힘이 바로 미치는가? 우리들의 마음의 힘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십시오. 아니, 이쪽이 강대국이다 저쪽이 강대국이다 하면 여기서는 이거를 해 놓고 저기서는 저거를 해 놓고 몰래 하느라고들 열났지만 그게 몰래가 안 되죠. 만약에 우리 못난 사람들, 여기 나와 더불어 같이 못난 분들이 진짜 못난 분들이라면 그걸 다 알게 되거든요. 그러니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어요, 천만 리라도. 갈빗대가 몇 대가 있는 것까지도 알 수 있는 건데 그게 속이려야 속일 수 있나요?

그런 멋진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자유인이요, 멋진 분들이 바로 인간입니다. 고차원적인 동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첨단을 뛸 수가 있습니다. 빛보다 더 빨리 뛸 수가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가고 올 수 있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오늘은 이걸로써 끝마칠까요?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8월 30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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