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욕심과 착이 이 공부하는 데 제일 무섭게 몰아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이 도량에 와서 공부 아닌 공부를 하시느라고 애를 쓰시는 것을 볼 때 감개무량합니다. 하지만 우리 공부하는 자세가…, 이런 말이 있죠. “서까래의 공덕으로 아버님 전 뼈를 빌리고 어머님 전 살을 빌려 이 내 일신 태어나니 공이로세, 공이로세, 공이로다.” 하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공이라는 그 뜻을 생각해 볼 때 여러분이 공이라는 이치만 알았지, 우리가 지금 생활하는 그 자체가, 항상 말씀드렸듯이 한 발짝 떼 놓으면 고정된 관념이 없고 고정된 걸음이 없고 고정되게 보는 것도 없어서 그저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인생의 진리라고 볼 수 있겠죠.

우리가 공부하는 자세는 항상 그 마음에,
울더라도 그 안의 주장자를 잡고 울고, 괴로워도 그걸 붙잡고
좋아도 그걸 붙잡고 감사하고, 죽으나 사나 그거 아니면 아니 됩니다.
바깥으로는 절대 착과 욕심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늙으면 죽고 태어나 자라면 젊었다고 하죠. 그러나 그것은 젊었으면 늙을 거를 준비하고 늙었으면 또 젊을 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저께도 얘기했듯이 그 모습을 다시 진화시켜서 바꿔 가지고 나오는 것은 자기가 살아나가는 동안에 어떠한 마음에 의해서 차원이 얼마만큼, 이차원이냐 일차원이냐 삼차원이냐에 따라서 그 진화는 모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모습에 의해서 남을 지배를 할 수도 있고 남한테 지배를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할 때의 자세가, 예를 들어서 공부한다는 것도, 남에게 착을 둔다는 것도 욕심입니다. 착을 두는 것도 욕심이지마는 모든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 그것은 올바로 해야 착이 아니고 욕심이 아니지 올바로 못 한 채 욕심을 부린다면 그건 착이고 욕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로 해라. 올바로 해라.” 하는 것은, 내 경우를 볼 때에, 예를 들어서 한번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스물 안쪽에도 그런 생각을 항상 해 왔습니다. 아니, 아마도 나이 어려서부터 그랬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여러분처럼 공부라는 생각도 없고 공부라는 게 뭔지도 몰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부모를 보고 또 형제를 보고 사람들이 사는 걸 보고, 또 짐승을 보고 풀들을 보고 세상의 모든 것을 볼 때 하염없이 흘러 내려가는 그 물은 내 눈물과 같이 보였습니다. 그럴 때 얻다가 하소연을 할 데가 없었습니다. 얻다가 하소연할 데가 없었기에 내 마음에, 아까 얘기했듯이 서까래에다 꼭 의존했던 것입니다. 그 서까래는, “서까래의 공덕” 이러는 거는, 서까래는 자기의 그 자성의 주장자라고 볼 수 있다면 불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 공덕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뿌리와 같기도 하고 씨와 같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생각 내는 그 생각이 바로 생각 내기 이전 그 심봉에 의해서, 반드시 자기는 살을 빌리고 아버지의 뼈를 받고 그래서 인생이라고 이게 태어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뼈를 빌린 아버지나 살을 빌린 어머니나 또 영원한 씨인 주장자의 그 불성이나, 그 불성이 아니었더라면 뼈도 빌릴 수 없고 살도 빌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 법의 스승이라고 볼 수도 있고, 참자기라고도 볼 수 있고, 부처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 이르러서 이 모습을 두고 착을 둔다 하는 것은 역시 욕심입니다. 그러니까 욕심으로부터 착이 되고 착이 됨으로써 그게 끊이지 않는 인연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인연줄은 마음으로 인연을 끊지 않는다면 절대로 물질로서는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얽히고설키고 해서 살아나오면서 그 인연줄에 의해서 자기가 빠져나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붙드는 그 상대방도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 인연줄에 얽히고설킨다면 양면이 다 죽기 때문에, 결국은 죽는다 하면 사는 길이 있듯이 모든 것을 맡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물론 사람으로서 어찌 사랑이 없고 또 도의가 없고 의리가 없고 그렇겠습니까마는 그렇게 거죽으로는 천연덕스럽게 하면서도 마음과 더불어 착, 욕심, 그 모든 것을 맡겨 놓고서 사랑한다면 무궁무진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고도 변치 않는 사랑이 되고 영원한 사랑이 되고. 그래서 진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에다 착을 두지 않고 모습으로 인해서 울고 쓰라려하지 않습니다.

벌써 한 8년 전 얘깁니다마는, 사랑을 하기에 남편에게 돈을 다 들이대 주기도 한 그런 첩도 있었으니 그것도 그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겁니다. 큰집은 너무 가난했습니다. 너무 가난한데 자식들은 7남매나 낳아 놓고 회사가 망하니까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니 할 수 없이 돈 많은 여자를 택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돈 많은 여자가 돈을 많이 들이대 주고 큰집도 다 살림살이해 주면서 시봉을 하다가 그만 돈을 다 없애고도 또 딴 사람 거를 대 주었습니다. 대 주다 보니까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남편을 사랑하기에 다시금 큰집으로 들어가라고 이렇게 유서를 써 놓고서 자기는, 자기가 없어져야만 그 돈의 출처를 자기가 안고 갈 테니까 고만 유서를 써 놓고 가 버렸습니다. 자살을 했단 말입니다.

자살을 할 때 그 사람이 유서에 써 놓기를 뭐라고 써 놓았느냐 하면, “인생은 공(空)이로세. 한 번 왔다가 한 번 가는 길에 내가 남의 입초시에 오르내리기를 좋아한 것은 아니나 나는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사랑했고 진심으로 그 식구들을 내 아픔과 같이 생각했노라.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그 식구들을 다 위해서 나는 가노라.” 이렇게 유서를 써 놓고선, “형님! 형님이 나이고 내가 형님이니, 형님! 아무쪼록 행복하게 살 수 있게 그 마음을 넓게 쓰시고 사셔야 나도 보람을 느끼고 또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선 유서를 써 놓곤 간 일이 있습니다. 저 원주에서 있었던 얘기죠.

그런 사람도 있듯이 여러분이 사랑을 한다면 물질로서 사랑을 하지 마세요. 내 예를 든다면, 어떠한 고난이 와도 남을 탓하지 않고 자기 그 서까래를 붙잡고, 자기 불성의 기둥을 붙잡고 거기에 하소연을 하고 한번 울고 나면 속이 후련했거든요. 꽁치꽁치 뭉쳤던 것도 그걸 붙잡고 울고 나면 다 펴졌습니다. 그러니까 전체 바깥으로 돌질 않은 겁니다. 바깥으로 돌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는 반면에 나는 모든 것을 얻은 것이 많습니다.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의 그 이치라든가 상식의 문제, 또는 우리가 모두들 “과학, 과학” 하는데 과학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이 풀 이파리 하나를 봐도, 벌써 이렇게 기울어진 것만 봐도 ‘아휴! 너도 나와 같구나.’, 비틀어진 것만 봐도 ‘너도 나와 같구나.’ 이러고 불쌍히 생각이 들면서 간절히 그저 둘이 동시에 하나가 돼 버리곤 하나가 돼 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고난을 줘도, 아버님께서 그렇게 내쫓고 고난을 줘도 나는 아버지의 탓을 절대 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다른 자식들은 다 공부를 시키고 나는 안 시켜 줬어도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진심입니다, 이거는.

그것은 모든 것이 내 탓이지, 내가 이 세상에, 즉 서까래 공덕으로서 뼈를 빌리고 살을 빌려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찌 그 탓을 하겠습니까? 인연 따라서 만났거늘, 인연 따라 만나서 살다가 헤어지는 거는 일찍 헤어지고 나중 헤어지고 그것뿐이지 무엇을 탓을 하겠습니까? 마른자리 진자리 바꿔 가면서 뉘어 주고 물 떠다 세수시켜 주고, 배고프면 밥을 떠 넣어 주고 젖을 준 것만 해도 고맙지 않습니까? 물론 뭐, 낳고 싶어서 낳았느냐고 이렇게 막말들을 지금 젊은 사람들은 합디다마는 그것은 인연에 따라서 오는 거지, 억지로 그것을 누가 하겠습니까? 이것이 진리고 순리적이고 바로 자동적인 것을.

그러니 스님들이 사는 도량에도 그렇고 여러분 가정에도 그렇고, 우리 믿는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화목을 도모하고 조화를 이루려면, 옛날에도 가화만사성이라고 했지마는 화목을 가져오는 것도 내 마음에 따라서 화목을 가져오는 것이지, 내 마음이 아니라면 화목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벌써 육신에 착을 둔다면 절대로 이건 화목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분기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걸 누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내 주장자의 그 주인공에서, 모든 것은 다 지수화풍의 이치에서 일어나고 순서 없이 일어나는 것을, 사계절이 일어나듯이, 그저 가라앉히고 가라앉히고 하는 거는 그 안에서 가라앉히지 바깥에서는 절대 가라앉힐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 참는다.” 이러는데 참는 거하고는 다른 겁니다. 일을 할 사람한테 맡기고선 고만둬야지, 맡기지도 않고 그냥 일은 안 해 놓고 ‘그까짓 것 안 하면 그만이지.’ 이런다면 시켜서 일을 한 거하곤 다릅니다.

그래서 어저께도 얘기했지마는 우리가 짐승들이나 모든 문제들, 그걸 각자 얘기를 하려면 너무 얘깃거리가 많죠. 우리가 음파를 통해서 참, 이렇게 알아서 같이 한마음으로 동일하게 조화를 이룰 때, 여러분이 한번 그 맛을 본다면 너무나 기쁜 일도 있지마는 슬픈 일도 많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픈 그 마음을 금할 수가 없이 될 때가 많습니다. 사람도 그렇고 짐승들도 그렇고, 날아다니는 새들도 그렇고, 물에서 사는 것도 있고 또 저런 북극이나 남극이나 이런 데서 사는 저 동물들도 그렇고 역시 식물들도 그렇습니다.

어떠한 식물들도 춥지 않은 게 어딨으며 마음이 어찌 없으며 생명이 어찌 없겠습니까? 고통이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여러분이 그거를 느끼지 못하고 생각도 안 해 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여지가 없어서, 뭐 딴 데 쳐다볼 여지가 없이 살아나가시기 때문에 그런 거까지 생각을 안 해 봐서 모르시는 거뿐이지 그거를 한번 생각해 보신다면 우리 살림살이의 그 아픔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과 더불어 같이할 수 있는 그 문제가 바로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길입니다. 부모의 은공을 갚는 것도 바로 내가 주장자의 이 공부를 해야만이 뼈를 빌리고 살을 빌린, 또 시중을 들어 주시고 길러 주신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부하는 데 “손도 천이요, 눈도 천이요” 하듯이 어디에 안 닿는 곳이 없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공부하는 데 조금만 그저 누가 이렇게 말만 해도 바깥으로 돈단 말이야. 운전수가 운전을 하고 가는데 남이 운전하는 거, 바깥의 잘못하는 걸 가지고 따지다 보면 자기는 운전을 잘 못해. 그러면 얻다 꼬라박기 똑 참하죠. 이런 형국에 도달한다 이겁니다. 자기가 안에서 이 운전을 아주 적멸하게 자기나 잘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남 걱정 하다 보니까 문제가 거기에서 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잘해 나가고, 잘해 나가면서 또 여기에서 먼저 운전을 능통하게 잘 이렇게 배워 가지고 나갈 때, 남이 잘 못하면 쉴 때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하는 것도 좋겠죠. 그런데 우리가 그렇지도 못하면서 내가 지금 갈 길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즉 말하자면 착이나 욕심에 끌려다니면서도 자기는 욕심도 아니고 착도 아니라고 합니다. 미친 사람이 자기 미쳤다곤 절대 안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에 “난 욕심이 아니라 이러이러해서 분통이 터져서 이럽니다.” 이러지마는 그것은 바로 그 물질에 착이 있기 때문이고 만약에 사랑이라면 질투에 욕심이 있기 때문이고 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

진짜 사랑을 하려면 그 모습을 보고 사랑하지 마십시오. 진짜 사랑을 하려면 여기에 사랑을 하십시오. 여기에 사랑을 하면 물질에, 육신에도 사랑이 옵니다. 모두 열 사람이라도 나한테 사랑이 옵니다. ‘한군데 사랑을 해야 열 사람이 다 온다’ 하는 것은 마음은 하나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와 만날 때도 둘이 아니고, 공과 공이 둘이 한데 합치면 둘이 아니듯이, 물그릇에 물방울을 하나 떨어뜨리면 그 물이 둘이 아니듯이, 이것은 체가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항상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데 그 에너지와 같이, 그렇게 빛과 같이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우리의 그 착이라는 것이, 욕심과 착이 공부하는 데 제일 무섭게 그냥 몰아칩니다. 그러면 그런 대로 그걸로 인해서 자기가 공부를 못하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옆댕이에서 어떻게 하든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거,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을 갖는다면 절대 끄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사랑해야죠. 울어도 여기에다 대고 울고, 사랑을 해도 여기에 사랑하고, 애원하는 것도, 괴로운 것도 여기에다가 자기의 그 주장자를 끼고 울어 보십시오. 절대 남을 기준하고 울지 마십시오.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어느 산골엘 들어갔는데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못생기긴 했어도 나이가 젊었으니까, 그때는 또 이렇게 살도 없고 그렇게 될 때니까 상당히 사람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진흙을 바르고 말리고 그래서 산으로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니까 모두 거지라고 그러고선 돌아다보질 않았죠. 근데 어느 산골로 들어가서 길을 지나다, 삽적거리를 이렇게 지나다가 너무 컴컴해서 발을 디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어느 집 부엌에라도 좀 웅크리고 앉아서 자고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전 그러지 않다가 왜, 아무 데라도 가서 자곤 그러던 사람이 왜 하필이면 그 집에 꼭 들어가서 자고 싶습니까, 글쎄. 제 주인 놈이 그러니 제가 안 따라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인 놈 하는 대로 이놈은 따라간 거죠.

그래서 부엌에서라도 자고 가려고 거길 들어가서 좀 자고 가자고 하니까 아, 거지 미친년이죠, 그러니까. 하하하…. 그래서 이런 것이 이 산골에도 왔느냐고 하면서 뒷덜미를 쳐 가지고서는 그냥 바깥으로 내동댕일 쳤습니다. 돌부리가 있는 데니까 무릎이 그냥 탁 거기 부딪치면서 피가 줄줄 흐르고 이 정강이가 무척 아픕디다. 다른 데는 덜 아파도 이 정강이 모서리 이거는 뭐, 참 그렇게 아픈 게 없습니다. 눈에 불이 번쩍 나면서 말입니다. 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왜 굳이 거길 들어가서 자려고 그렇게 애를 쓰노.’

허허, 이거 보십시오, 글쎄. 이 하늘 밑에 어디 잘 곳이 없어서 하필이면 그 삽적거리 그 집 부엌에 가서 꼭 자고 간다는 이유가 뭐냐 이거야. 그게 인제 의문인 겁니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두고도 그 집에 가서 굳이 자려고 했던 문제. 그렇게 내동댕이쳐지는 문제. 또 그 문제도 있지만 그렇게 무릎이 아파서 그랬으면서도 원망이 안 들어가고 내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아픈 거는 잠시 잠깐 그러면서 눈물이, 울려고 해서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이게 아프니까 잠시 그냥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겁니다. 이거는 누구도 속일 수가 없는 거죠.

그 눈물은 무슨 눈물이냐? 그 사람을 원망하고 그런 눈물이 아니라 내 참다운, 즉 말하자면 왜 하필이면 이 만좌중에, 이 여기 하늘 밑에 그렇게 잘 땅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왜 거길 들어가 자자고 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의 잘못입니까? 자기 잘못이지. 자기가 들어가 자자고 한 그 잘못이란 말입니다.

근데 또 한 가지 거기 붙은 것은 뭐냐? 하하, 그거를 그렇게 생각하다가, 거기 그냥 주춤거리다 그냥 앉았습니다. 앉아서 ‘야, 내 이 자리가 참 좋은 자리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뭐라고 생각을 했느냐 하면 ‘옳지! 옳지! 알았어.’ 그러니까 그때는 눈물도 안 나요. ‘옳지, 알았어. 나를 다지기 위해서 여기를 들어가서 꼭 자자고 해 가지고 나를 이렇게 팽개치게 했구나.’ 이 생각이 퍼뜩 들면서 ‘모든 게, 이렇게 과정을 만든 것이 전부 너로구나.’ 하는 생각을 항상 그렇게 하고 갔죠. 그러니까 그 앉은 자리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세면서 있으니까 하늘의 지붕이 그렇게 넓고 좋은 것을, 하필이면 부엌에 들어가서 잡니까, 글쎄, 응? 참 내! 어느 스님네들이 좀 어디 가서 자자고 그럴 때는 나는 그전에는 쪼금 의아했습니다. 어디 잘 곳이 없어서 저렇게 들어가서 자자고 애를 쓰나 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거야 내 생각이겠죠.

그런데 그 일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사람이 죄 없이 맞은 매는 빨리 낫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역시 네가 그렇게, 거기 들어가 자자고 한 것도 너고, 쫓아 들어가서 자려고 했던 것도 너고, 그렇게 내던지게 한 것도 너고, 뚫리게 해서 피가 나게 한 것도 너고, 이것이 나를 다지게, 그 다지고 다지고 모서리 진 습을 떼고 모든 거를 떼 주기 위해서 방망이질, 정질 한 것이 바로 너이기 때문에 참 감사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감사한 눈물을 흘렸다 이겁니다. 그 감사한 눈물을 흘리니까 또 뭐라고 생각이 나느냐 하면 ‘이 눈물 한 방울은 피보다도 더 진하고 바다의 그 많은 전체의 물하고도 이 한 방울이 비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지금 내가 잘했다는 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공부할 때는 공부자로서, 수행하는 자로서, 몸도 마음도 그렇게 수행하면서 자기가 공부를 해 나가는 것이, 공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이 그렇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라면 절대로 분기가 나오지도 않고, 이 마음이 참 꿋꿋하면서도 도도하면서도 항상 내려딛게 되고, 마음이 한 발 내려딛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도도하게 끊임없이 흐르는 그 자체는 정말이지 떳떳합니다. 내가 힘이 없고 그렇게 내려선다면 아주 포기고, 자기가 인생 사는 것을 포기 조로 들어가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너무나 떳떳하고 뚜렷하고 그렇게 여여하기 때문에 내려서도 내려선 게 없고 올라 디뎌도 디딘 게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공부하는 자세는 항상 그 마음에, 울더라도 그 안의 주장자를 잡고 울고 또 괴로워도 그걸 붙잡고, 또 좋아도 그걸 붙잡고 감사하고, 죽으나 사나 그거 아니면 아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깥으로는 절대 착과 욕심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놓으면 우리 살림살이는 어떡합니까?” 이러겠죠. 살림살일 누가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그게 전부 우리의 공부하는 과정이며 바로 보람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림살이하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공부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누가 사랑을 하지 말라나요? 사랑을 하되 바로 여기에, 모든 것을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 육신과 더불어 모두가 사랑인 겁니다, 조화를 이루고 화목하게 되고. 연줄 연줄이 그냥 가설이 돼서, 어저께도 얘기했듯이 환하게 집 안에 불이 들어오니 얼마나 밝고 좋습니까? 어떤 방에는 안 들어오고 어떤 방에는 들어오고 이러면 얼마나 부자연합니까? 또 집 안에 불이 하나도 안 들어왔다고 봅시다. “아이고! 캄캄해, 캄캄해.” 하고 “어딨어, 어딨어?” 하고 온통 난리가 나고 할 일을 못 하고 이러듯이 우리 살림살이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캄캄한 집 안에서 아마 하루만 불이 안 들어오고 물이 안 나와 보십시오. 물은 지혜라고 하고 그 밝음은, 마음 밝음은 물리라고 합시다. 물리가 터지지 않고 지혜가 나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거는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본래 여러분의 각자 몸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그게 바로 주인공이자 공부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래 이게 화두야. 그러니까 모든 살아나가는 거 여기에다 맡겨 놓고 사랑하라 이거야. 내 사랑이 제일이야. 변소에 가서 밑 씻어 주는 것도 내가 있으니까 내가 씻어 줘. 그러나 아무리 사랑을 한대도 밑 씻어 주는 부인 보셨고, 밑 씻어 주는 남편 보셨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이 가까운 사랑을 모르시면 바로 상대의 사랑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에너지가 벌써 맞닿아서 둘이 아니게 되면 바로 내 사랑인 것입니다.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한테 들어가고 저 벌레의 속에 내가 들어가 보지 않는다면 그 벌레의 사정을 모른다고 어저께 얘기해 드렸죠. 어떠한 짐승의 속에 들어가 보지 않는다면 겉으로만 이렇게 보고는 모른다고요. (중략)

그러니 그렇게 아시고 욕심부리지 말고 분수에 맞게 또 내 안으로만 굴리면서 안에다 모든 그 사랑을, 지금 거죽의 사랑, 거죽의 남편, 거죽의 형제, 자식도 그렇고 거죽의 사랑을 전부 여기에 다 한데 합쳐 놓고선 여기에다가 사랑하십시오. 그런다면 아주 그 몸뚱이도 그 마음도 다 사랑하게 돼요. 마음이 사랑하게 되니까 몸까지 쫓아오죠. 얼마나 좋은데요.

그러면 오늘은 이걸로써 끝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1986년 7월 21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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