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과학과 불교의 유사성

‘석가모니는 과학의 아버지’라는 말은 아인슈타인이 했다고 한다. 일본의 최초 노벨상 수상자였던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반핵 운동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유카와 히데키가 불교의 과학성에 대해 이야기하자 아인슈타인이 감탄한 뒤 ‘석가모니는 과학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한다. 물리학이 보는 세계와 불교가 보는 세계가 유사하기 때문에 물리학과 불교의 관계에 관한 저서도 제법 있다. 물리학이 세상을 보는 눈이라면 불교의 연기법이 바로 세상을 보는 눈이다.

과학과 통하는 불교교리는
불완전 인정, 발전이 원인
연기법 근간, 합리성 토대

내가 동국대에서 불교학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을 때 이화여대 물리학과 김성구 교수도 동국대 대학원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같은 수업을 듣던 도중에 내가 김성구 교수에게 물리학자로서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불교와 물리학이 놀랄 만큼 닮았다고 말했다. 김성구 교수로부터 불교가 얼마나 과학적인 종교인가를 새삼 알게 되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선배교수가 어느날 내 연구실에 들러서 아주 흥미로운 질문을 했다.

“윤 교수. 불교신도지요?”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생소한 질문을 하실까 궁금했다. 그분은 정책학 중에서도 정책의사결정 오류에 관한 연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내신 학자인데 불교신도는 아니지만 불교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고 하셨다. 정책의사결정 오류에 관한 서양학자의 논문을 읽다가 서양학자가 어떤 주장을 한 뒤에 그 영향을 불교로부터 받았다고 고백한 글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반야심경〉에 대한 질문 등을 하였다.

물리학 등 자연과학의 세계만이 아니라 정치학, 경제학, 정책학 등의 사회과학 분야에서 나오는 이론은 불교교리와 놀랄 만큼 닮았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은 불교를 매우 오래된 종교, 고루하고 낡은 종교로 인식한다. 과학이나 현대사회와는 거리가 먼 미신 비슷한 종교로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의 상당 부분은 대한민국 불교교단의 책임이기도 하다. 불교는 우리의 오해와는 달리 매우 과학적이고 현대적이며 개혁적인 종교이다. 불교는 2500년 전 낡은 브라만교의 틀에서 벗어나 혁신적이고 나아가 혁명적인 관점을 제시한 종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기독교가 구한말에 선진 의료와 교육제도를 소개했기에 기독교를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종교로 이해한다. 불교가 우리 국민에게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책임은 크지만 불교교리 자체는 매우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종교이다. 무엇보다도 과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종교다. 기독교는 진화론에 반대하여 창조과학을 만들어내야 할 상황이지만 불교는 과학계와 충돌은 커녕 서로 지혜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이다.

부처님은 2500년 전에 연기법이라는 과학의 법칙을 발견하셨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당신이 만드신 게 아니라 이미 있던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세상의 이치로서 존재하는 이론을 부처님이 찾아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현상과 사물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도 연기법에 의해 설명될 수 있고 이후에도 설명될 수 있다.

정치현상은 사회현상의 하나로서 연기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고 연기법에 의해 생성, 변화, 소멸 되어가는 현상이다. 우리가 정치현상을 불교적으로 본다는 의미는 과학적으로 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불교가 과학적 종교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항상 오류와 결함을 수정 보완하면서 발전해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뉴턴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수정되었고 아인슈타인의 오류 또한 양자역학 이론에 의해 보완되었다. 따라서 불완전성이 과학의 특성이지 완전성이 과학의 특성은 아니다. 다만 수정 가능한 불완전성, 보완 가능한 불완전성, 끊임없이 발전해가는 불완전성이어야 한다.

불교는 경전에 쓰인 말씀이 완벽하지 않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경전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었기에 그 시대와 장소를 떠나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경전의 불완전성이야 말로 불교의 과학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성이다. 경전은 우리에게 달을 보아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설한다. 경전은 달이 아니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경전은 흔히 뗏목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가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해서 뗏목이 필요하지만 강을 건넌 뒤에는 뗏목을 버려야 한다. “뗏목을 머리에 지고 가겠느냐?”고 경전은 반문하고 있다.

손가락에 불과한 경전, 뗏목에 불과한 경전은 과학성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연기의 세계에서 절대진리란 없다. 오직 끊임없이 발전하는 불완전한 이론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정치 이념이나 정책을 절대 진리인양 목을 매는 행위는 매우 비연기적이며 비과학적이다.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완전성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오류 가능성을 스스로 인정할 때 비로소 불교의 지혜가 빛난다. 한 때 가톨릭이 중세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그 정점에 교황이 있었다. 교황도 허점을 가진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무오류설’이라는 주장이 중세를 지배했다. 교황이 잘못을 저질러도 신의 섭리에 의해 잘못이 교정되어 처음부터 잘못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이 바로 교황무오류설이다.

안거가 끝나고 잘못을 참회하는 ‘자자(自恣)’에서 부처님은 스스로 잘못이 있는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부처무오류설’ 같은 생각은 불교에서는 설 땅이 없다. 부처님부터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스스로 인정하셨으니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학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과학이란 가설을 세우고 현실 속에서 가설이 맞는지를 검증하여 검증을 통과하면 이론이 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이론도 지속적으로 오류를 수정해가며 변화한다. 과학적이란 무엇보다도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검증을 통과하려면 현실 속에서 증거에 근거해 가설이 입증되어야 한다. 만약 정치에서 어떤 주장이 과학적이려면 증거에 근거해서 그러한 주장이 타당함을 밝혀야 한다. 어떠한 정치적 구호나 정책목표도 반드시 증거에 근거해서 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정치적 구호나 정책목표는 이러한 과학성에 기초하기보다는 인간의 감성에 의존한다. 정치인이 제시하는 감성자극적 구호나 왜곡된 정보에 토대를 둔 정책 목표는 국민의 눈을 멀게 한다. 때로는 비이성적 광풍이 정치인과 정당을 죽이고 살린다.

주식시장에서 주가 예측이 워낙 어렵다보니 전문가라는 사람의 말을 믿기가 어렵다. 주가는 귀신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전문가의 예측이 현란한 자료와 분석에 근거하지만 생각보다 유용하지 않다. 각종 통계를 보아도 전문가의 예측력은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전문가라는 펀드매니저들이 제시하는 추천 종목의 성과는 형편없다. 주식투자에서 전문가의 예측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재미있는 실험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자기집에서 키우는 반려견에게 주식의 이름을 큰 소리로 읽어준다. 만약 반려견이 그 주식 종목을 듣고 짖으면 그 주식을 사지 않고 꼬리를 흔들면 산다. 그렇게 꼬리를 흔든 주식만으로 펀드를 구성한 뒤 펀드 매니저들의 평균 수익률과 비교했더니 반려견이 만든 펀드의 수익률이 더 높았다고 한다.

아무리 이러한 방법으로 만든 펀드가 수익률이 높다고 해도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문가의 예측이 형편없기는 하지만 전문가의 자료수집과 분석이 이성에 근거를 두는 한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반려견의 꼬리 흔들기로 만든 펀드가 수익률이 더 높다고 해도 짖거나 꼬리 흔들기는 비이성적이므로 비합리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비합리적 의사결정은 주술에 의한 결정이다. 중대한 투자를 앞두면 항상 역술인을 찾아간다는 사업가도 있다. 역술인에 의존하는 행위는 비이성적이므로 비합리적이다. 평생 역술인만 찾아다니며 연구한 경희대 서정범 교수가 언젠가 역술인에 대한 평가를 한 적이 있었다. 뛰어나다고 하는 역술인은 과거는 잘 맞추는데 미래를 잘 맞추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게 그분의 평가였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을 잘 읽는 재주를 가진 게 뛰어난 역술인의 능력인지도 모른다. 역술인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고객의 표정, 음성을 읽고 과거에 관한 단서를 찾아내서 한순간에 고객의 신뢰를 얻으면 무장이 풀린 고객은 마술에 걸린다. 한 두 번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역술인이나 반려견의 꼬리 흔들기는 장기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려운 방법이다.

부처님은 브라만 계급이 제사를 독점하면서 각종 점을 쳐주고 주술을 하며 별자리를 보고 행운을 점쳐주는 행위를 비판하셨다. 연기법을 제시하신 부처님은 비이성적인 행위를 금지하셨다. 행위이든 생각이든 말이든 비이성적이면 비합리적이며 비불교적이다.

부처님은 당신의 말씀을 무조건 믿지 말고 생각해보고 타당하면 믿으라고 하셨다. 부처님에 대한 제자들의 존경심엔 어쩌면 맹목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이 개입되기 쉽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러한 감정에 의존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반드시 근거에 의해 주장하고 근거에 의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맹목적인 감성 때문이 아니다.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우리를 깨우쳐 주셨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삶을 볼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부처님의 제자라면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적 견해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항상 증거에 근거하려는 노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 선택으로 정치인, 정당,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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