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닦음의 길 14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모두 이렇게만 산다면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어렵지 않게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다. 마찰과 분란, 갈등, 대립 등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여러 종교에서 이기심의 소멸을 강조하는 것도 그럴 때 비로소 상대의 처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자비는 여기에서 나오는 값진 선물이다.

불교의 수행 역시 상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체계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욕을 들으면 기분이 상하는 것처럼, 상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바라는 것처럼, 상대도 그런 상황에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인간은 ‘같은 마음(如心)’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이 필요하다. 사무량심(四無量心) 또한 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수행이다.

사무량심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열반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수행이다. 붓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생각해서 대자(大慈), 대비(大悲), 대희(大喜), 대사(大捨)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자비희사(慈悲喜捨) 사무량심을 실천하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는 것처럼 번뇌 가득한 세속에서 살면서도 여기에 물들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사무량심의 첫째는 자무량심(慈無量心), 즉 무한한 자애심을 가지고 상대를 기쁘고 즐겁게 해주는 실천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중생을 사랑하는(慈) 마음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겠는가. 그런데 진정한 사랑은 상대와 내가 ‘하나’라는 자각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야 비로소 어머니가 아들을 한 몸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모든 중생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하나’로 존재한다는 연기의 진리가 작동하고 있다.

둘째는 비무량심(悲無量心)이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예컨대 벗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함께 슬퍼하고 울어주는 것도 비(悲)를 실천하는 일이다. 이처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도 상대와 ‘하나’라는 인식이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행위다. 하지만 이것은 자무량심과는 달리 이기심이 남아있더라도 어느 정도 실천할 수는 있다. 그 불행이 나에게 닥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불행에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셋째는 희무량심(喜無量心), 즉 상대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기뻐하는 수행이다. 이는 이기적인 마음이 남아있는 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아들은 취업도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아들이 승진했다고 자랑한다면, 온전히 기뻐할 수 있겠는가.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지만 마음까지 그러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자랑은 상대가 기뻐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상대가 자랑하면 함께 기뻐하기 힘든 법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실천은 자신의 이기심을 측정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다.

마지막 사무량심(捨無量心)은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고(捨)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는 수행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우리는 친소, 애증의 관계에 따라 상대를 차별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마음을 모두 텅 비우고(空)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사무량심은 결국 ‘이웃을 내 몸처럼’ 생각할 때 나올 수 있는 실천이다. 혹자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묻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호와 같은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족의 슬픔을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고 함께 울고 아파했던 것이다. 수행은 그러한 공감능력을 더욱 확장시키는 일이다. 사무량심은 모두가 ‘하나’라는 연기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서 확립한 수행체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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