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닦음의 길 12

군대 훈련병 시절 종교 활동으로 불교를 선택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법회 시간에 잠을 잘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잠을 3~4시간밖에 잘 수 없는 형편이라 먹을 것으로 유인하는 개신교나 천주교보다 불교가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훈련소 마지막 법회 시간에 갑자기 수계식을 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연비를 하고 법명도 받았다. 그때 받은 법명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불교에 입문한 뒤로 여러 차례에 걸쳐 계(戒)를 받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존경하는 스승님께 부탁했더니, 지금 필명으로 쓰고 있는 일야(一也)라는 법명을 주셨다. ‘하나’라는 뜻도 있지만,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하면 ‘이랴, 이랴!’가 된다. 소가 가지 않을 때 채찍질을 하면서 내는 소리로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법명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서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글을 쓰거나 책을 출판할 때 필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육바라밀 가운데 네 번째는 정진바라밀이다. 이는 팔정도의 정정진(正精進)과 다르지 않은 실천으로 열심히 수행하라는 뜻이다. 정진은 열반의 언덕으로 향하는 대승호의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한다. 엔진의 힘이 좋아야 배가 잘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수행 에너지가 충분해야 깨침의 언덕에 이를 수 있다. 출가 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정진했던 붓다의 경험에서 나온 덕목이다. 그런데 정진에도 중도(中道)의 실천이 필요하다. 수행의 힘이 약하면 피안으로 향하는 배를 움직일 수 없고, 반대를 지나치게 힘을 가하면 과부하가 걸려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경우 모두 배가 순항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의 힘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

붓다는 출가 후 당시의 유행에 따라 6년 간 혹독한 고행을 하게 된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행을 실천했지만, 돌아온 것은 망가진 육체와 정신뿐이었다. 붓다가 고행을 버리고 중도를 선택한 이유다. 이런 경험은 제자를 가르칠 때도 매우 적절하게 활용되었다. 제자 중에 소나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아무리 열심히 수행을 해도 공부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실망한 나머지 수행을 그만두려 했지만, 붓다는 소나가 출가 전 거문고를 잘 탔던 사실을 알고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한다.

“소나여, 거문고와 마찬가지로 수행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이 격앙되어 조용하지 못하고, 또 너무 느슨하면 게으름에 빠지게 되느니라. 따라서 소나여, 그 중도를 취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소나는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중도를 설명할 때마다 예로 많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중도란 한마디로 ‘적절함’이다. 더운 여름날에는 가볍고 얇은 옷이 적절하지만, 추운 겨울에는 두꺼운 외투를 입는 것이 적절하다. 그것이 옷 입는 중도다. 일중독에 빠진 사람에게는 휴식이 중도며, 게으른 사람에게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중도다.

중국 고전인 〈장자〉에 이런 우화가 나온다. 그림자를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림자가 자꾸 자신을 따라오자 이것을 떨쳐내려고 더 빨리 달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빨리 뛰어갈수록 그림자는 더 빨리 따라올 수밖에 없다. 이때 필요한 지혜가 무엇일까? 바로 그늘이나 건물 속으로 들어가 쉬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의 지혜다.

중도라는 시선에서 보면 열심히 한다는 것과 지나치다는 것은 분명 다르다. 붓다가 고행에서 중도로 방향 전환을 했던 이유를 잊지 말기로 하자. 그는 지나친 것이 아니라 중도에 입각한 바른 정진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붓다의 마지막 유훈 역시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니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당부였다. 그것이 대승에 이르러 정진바라밀로 해석된 것이다.

붓다가 지나치게 편리하고 감각적인 것만 좇고 있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본다면 과연 무엇이라 했을까? 자신은 버렸지만, 현대인에게는 고행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을까. 게으름에 빠진 우리에겐 고행이 중도이니 말이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채찍질해본다. ‘이랴,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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