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를 때울 게 없더라도 그냥 웃을 줄 알아야 돼요

 

허공을 걷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요

질문 대행 스님의 법문집 제목도 ‘허공을 걷는 길’인데 허공을 걷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요.

답변 우리가 한마음으로써 점프를 해서 뛰는 것이 허공을 걷는 건데, 지금 여기서 계단을 밟지 않고 오는 것도 허공을 걸어서 온 거예요. 그래서 “길에서 길 아닌 길을 찾아라.” 그리고 또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한 것도 우리가 둘 아닌 도리에서 어느 거든지 둘 아니게 모두가 공생이면서 공심이면서…, 그 뜻이 거기에 다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만 배웠지, 이론만 알았지 도무지 실천에 들어가질 않으니까 그게 무의미하게 그냥 떨어지죠.

바다가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는 물방울이 그렇게 많지만
그게 허망한 게 아니라 가라앉으면 바다로 돌아가건만
그 물방울 하나하나가 지금 야단법석들이죠.

이 중세계에서 일체 만물만생이 다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그 모습 속은 모두 곤충 주머니예요. 이 곤충 주머니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허공 길을 디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살아나가는 데 관습과 의식이, 욕심이 모든 게 그렇게 습관이 돼서 그걸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죽어도 자기 모습이 그대로 있는 줄 알거든요. 그래서 지옥고를 딛고 나가려도 디딜 수가 없고, 강을 건너려도 건널 수가 없고, 또 불 수레를 건너가려도 벗어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자기가 있다는 관념 때문에.

그러면 우리가 이 중세계에서 살아나가는 데에 어떻게 살아야 편안하겠습니까? 이 부딪치고 부딪치고, 이렇게 수레가 돌아가면서 부딪치듯, 우리가 살아 있으니깐 이렇게 부딪치는 이 천차만별의 이치, 우리는 거기에서 바로 지혜도 생기고 물리도 터지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은 ‘불’이요, 바로 부딪치면서 살아나가는 것은 ‘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진리의 언어지, 어떠한 중들만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그런 국한된 마음이 아닙니다. 이 불교라는 자체는 끝이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둘 아닌 일대사의 인연을 맺으셨다고 했죠. 우리가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고 형성돼서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연방, 수억겁을 거쳐서 나왔단 말입니다. 그거 나온 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내 도량 아닌 게 없고, 내 모습 아닌 게 없습니다. 안 그럴까요? 개구리가 돼 가지고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하지만, 개구리라고 그래 봤자 올챙이 과정을 거쳤단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먹지만 않는다면, 먹는 게 없다면 이렇게 강도도 없을 거고, 사기도 없을 거고, 싸움도 없을 거고, 그렇지 않을까요? 먹으니깐 똥을 눠야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이 잠자고 똥 누고 먹고 이러는 게 없다면, 그렇게 세 가지를 다 안 할 수 있다면 그건 별천지죠. 부처님의 한도량이죠.

그 한마음 도량에서 관세음보살도 되고, 지장도 되고, 칠성도 되고, 주산신도 되고, 주해신도 되고, 전부 보디가드도 되고, 길잡이도 되고, 의사도 되고, 아니 되는 거 없는데 여러분은 그렇게 그냥 발버둥이를 치고 애를 쓰니….

자기 나무는 자기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는 거지, 자기 뿌릴 믿지 않고 형상이나 이름을 믿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저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두 가지가. 하나는 몸체를 두고도 배움의 길에 있어서 속도가 너무 빠르게…, 저 거리를 걸어간다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눈에. 속도가 너무 빠르면 보이지도 않고 바람만 설설 일어나죠. 이런 거 짐작해 보셨습니까? 또 체가 없는 나가 허공 길을 걸어갈 때는 가고 옴이 없이 갔다가 전체를 요만하게 만들어서 갖다 놓고 볼 수도 있죠. 큰 거를 그 가운데 들어가서 보려면은 다 못 봅니다. 작아야 전체를 볼 수 있죠.

여러분들이 그렇게 허공 길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만이 마음도리…, 아까 얘기했죠. 관세음보살이 되고 지장보살이 되고 그런다고요. 만약에 이 계단을 올라올 때 마음이 올라온다면 점프해서 그냥 올라올 수 있는데, 몸으로 오려니깐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야 되지 않느냐. 그런데 그 마음으로는 그렇게 이 세상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할래도 할 수 있는 마음의 도리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과 같이 둘 아니게, 즉 말하자면 어느 모습 하나도 내 모습 아닌 게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또 내 작용 아닌 게 없고, 내 공식 아닌 게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다 그렇게 어떠한 인연에 따라서 용건이 들어와도 나는 허공 길을 걸어야만 되겠죠. 찰나에 그 모습으로 화해서 나투어야죠. 만약에 짐승이 나를 청했다. 그걸 ‘짐승을 건져야겠다’ 이런다면 내가 그 짐승이 돼야 되겠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모습 아닌 게 하나도 없느니라.” 했어요. 그러니까 내 마음 아닌 게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공용이다, 공식이다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을 건져 주는 데도, 하다못해 물에서 노는 고기 한 마릴 건져도 내가 수많게 화해서 그 고기로도 들어가고 짐승에도 들어가고 사람에게도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바로 그걸 건지는 겁니다.

부처님만 그러신 게 아니라 여러분들도 그렇게 마음공부 하는 분들에 한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는 전제를 하고 지금 하는 겁니다. 마음으로 점프를 해서 계단을 한걸음에 올라올 수 있다면 강은 못 건너가겠습니까? 강 속은 못 들어가겠습니까? 은산철벽은 못 뚫겠습니까? 삼라대천세계는 못 가겠습니까? 두루 하죠. 덮고도 받치고도 남음이 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 길을 알아야 요다음에도 허공 길에 발을 떼어 놓을 때 서슴없이 떼어 놓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휴, 나는 뭐, 중생인데 어떻게 허공에 발을 떼어 놓을 수가 있나?’ 이러지만, 우리가 그냥 거기다가 맡기고 관하고 이러는 게 그대로 내가 죽는 방법이요, 내가 함이 없이 하는 방법이요, 둘 아닌 도리를 아는 방법이요, 구경계에 이르는 방법이요, 전부가 아니 되는 게, 아니 하는 게 없는 방법입니다.

주인공과 상봉하고 싶어요

질문 주인공이라는 것을 빨리 알고 싶은데 잘 안되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인공과 상봉할 수 있을까요?

답변 하루하루 일상생활에서 ‘주인공! 네가 전부 하는 거지. 네가 들이고 내지.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울든 웃든 네가 하는 거지.’ 그러고 한데로 몰아요, 자꾸. ‘주인공이 모든 거를 하는구나.’ 하는 거를 한군데로 몰아요. 몰다 보면은 나와요. 몰아붙여요.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라 했으니 몰아붙이는 놈도 공이요, 또 놓는 그 자리도 공이요.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알게 돼요.

그러니 그 주인공에 다 일임시키고 거기다가 다 감사하고 그렇게 하세요. 거기서 하는 거니까. 일상생활을 거기서 다 하는 거예요, 들이고 내고 들이고 내고 하는 것을. 그러니 그대로 주인공이 한다고만 생각하고 그냥 놔 버려요. 그러면은 어느 땐가 주인공이라는 그 자체를 알게 될 것입니다.

왜 마음이 갈수록 험악해질까요

질문 시간이 갈수록 인간의 마음들이 참 험악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고, 더군다나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이 부모를 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제 주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도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왜 우리 인간의 마음들이 갈수록 거칠고 이기적으로 돼 가는 것일까요?

답변 우리가 사람으로 인도환생을 했는데 인도환생을 해 가지고도 잡아먹길 좋아하고 그냥 남을 죽이길 좋아하고 이렇게 그냥, 그 습이 남아서 그렇게 하면 죽어서 도로 그리로 돌아가요, 도로. 도루묵이 되죠. 그러니깐 모든 게 끼리끼리 놓여져 있죠. 이 세상에는 모두 끼리끼리 놓여져 있지 않은 게 없죠. 하다못해 요만한 거, 대추 하나라도 감하고 대추하고 한데 어우러진 게 하나도 없죠. 끼리끼리 놓여져 있지.

그렇듯이 누구가 이쪽으로 넣고 저쪽으로 가라고 해서 가는 게 아니라 저절로 차원이 일차원이라면 일차원으로 가고 이차원이라면 이차원으로 가고 이렇게 자동적으로, 금이 망가졌어도 금은 딴 데로 안 가요, 금방으로 가지. 깡통은 아무리 찌그러지고 성하고 간에 깡통전으로 가죠. 깡통 모아 놓은 데로. 넝마들은 넝마전으로 가고요. 무쇠는 무쇠대로 가고요. 그러니까 누가 갖다 놓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대로, 그대로 그냥 옮겨지는 거죠. 사람도 역시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찰나찰나 우리 한생각을 하고 회향을 하고 그러는 건데 그저 그냥 살다가 보면 그냥 닥치면 닥치는 대로 그냥 해 버리고는 그 회향을 제대로 하질 못하고 이탈된 회향이 돼 가지고선 그게 그냥 뭉치고 뭉치고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고생들을 하고 이렇게 사는 분들이 많고, 그 고생들 하고 사시는 분 중에도 아버질 죽인다 자식을 죽인다 또는 강도를 한다 뭐, 별의별 일들이 다 생기는 원인이 그 이유가 다 있어서 그런 거예요, 다.

그래서 어린애를 낳기 전에 관해라. 좋은 영가로 받기 위해서 관해라. 어린애가 배 속에 있을 적에도 관해라. 낳고도 관해라. 백 일 위까지 그렇게 관하고 나면 나중에는 자기 스스로 간다. 그래서 하다못해 요새 회사를 그만 파하고 은행도 파하고 다 그만두고선 뭐, 그냥 끼니를 때울 게 없다 이러더라도 웃을 줄 알아야 된다. 눈물 흘리면 안 돼요. 웃을 줄 알아야 된다고요. 웃을 줄 알면 웃게 된단 얘깁니다. 그런데 웃을 줄을 모르고 그냥 제가끔들, 식구 수대로 제가끔들 속에 불안이 그냥 꽉 차 가지고선 남편도, 아내 보기도 그냥 귀찮고 그냥 모든 게 다 이렇게 되니까, 그러니깐 남 안 보는 데 길을 걷다가도 눈물이 나고 그러죠. ‘인생 이렇게 살아 뭘 하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인생으로 태어나서 이 구경을 하고 사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갸륵한 일입니까? 얼마나 복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이런 거를 모두 보지 않고 산다면 어떻게 배웁니까? 어떻게 터득을 합니까? 벌레 먹은 나무를 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터득을 합니까? 그래서 일체 만물이 다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다는 얘깁니다.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둘이 아니죠.

그런 마음을 여러분들이 가짐으로써 모든 마음이, 때로는 어떤 사람이 아프다면 약사로 화해 주고, 관세음보살로도 화해 주고, 지장으로도 화해 주고, 주해신으로도 화해 주고, 산신으로도 화해 주고 그냥 달라는 대로 다 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들고 가도 그릇을, 마음을 열질 않고 마음의 그릇을 만들어 놓질 않고 받질 않아요. 내가 더러더러 이런 일을 당하거든요. 마음으로 거부한다면 그건 받아지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옆집에서 밥을 굶는다고 그래서 쌀을 한 말 가지고 갔는데 우리가 거지인 줄 아느냐 그러고 내뱉고 그냥 문을 확 닫고 돌아서면 그거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릴 어떻게 보고 그러냐고, 거지로 보느냐고 이러곤 그냥 안 받는다면 할 수 없는 거죠. 우리가 먹을 게 조금 남았더라도 그걸 가져왔으면 “참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 놓고 또 그것을 자기가 어떠한 일이 있으면 갚을 수도 있게끔 만들어야 되는데, 그것을 그렇게 생각 안 하는 사람들이, 아이, 별의별 사람들이 다 많아요.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어떻게 사람으로서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요만한 거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사실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걸 내가 말을 해요. 이해가 안 가는 사람도 그게 있어야 할 거니까 있는 거거든요, 그게. 그러니깐 아, 천차만별이 바로 이게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사실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됐죠. 저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저런 사람도 있고, 저게 있기 때문에 이게 있고, 모두가 이게 둥굴려 가면서 이게…. 그래서 바로 진리로서 이게 끊임없이 돌아가는 모양이에요.

알고 보면 정말이지 인생은 이름 없는 물방울 같으면서도 영원하구나 하는 걸 알 겁니다, 아마. 바다가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는 물방울이 그렇게 많지만 그게 허망한 게 아니라 가라앉으면 바다로 돌아가건만, 그 물방울 하나하나가 지금 야단들 법석이죠. 하지만 허무한 게 아닙니다. 우린 너무나 생생하게, 여여하게 이 세상을 두루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공부는 죽든지 살든지 해야 되는 공부입니다. 죽고 사는 걸 겁내지 마세요. 모든 것이 그렇게 하나도, 나쁜 거든지 좋은 거든지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사실만 아신다면 우리가 모든 걸 다 리드하고 나갈 수 있고, 자기 자신과 더불어 같이 살 수 있는 그 기반이 생기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그들이 다 천도되면 좋을 텐데…

질문 요즘은 수많은 사건 사고와 바이러스 등으로 인하여 한순간에 많은 생명들이 사라져 가는 일이 자주 생기는데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그들이 다 천도가 되면 좋을 텐데 사실 너무 극악한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 분별심도 놓아야 하겠지만 여하튼 저같이 모자란 사람의 마음도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답변 그래서 이 천도라는 것이 별거 아니라고 아는 사람은 별거 아니라고 하더라도, 모르는 사람은 죽어도 모르고 살아도 몰라요. 그래서 벗어날 길이 없는 거죠. 한 찰나면 사람이 저 삼천 년 전으로도 뛰고 삼천 년 후로도 뛰고 일 초 전으로도 뛰고 일 초 후로도 뛸 텐데, 이건 생무지니까 말입니다. 마음이 항상 살던 습이 있거든요. 살아온 습이 있고 욕심이 있고, 모두 습 때문에 그게 그냥 ‘이건 이렇게 해야지. 사람이 이거는 정말이지 못 해. 우리는 도저히 못 해. 우리는 죄가 많아서 못 해.’ 이런 생각 때문에 못 뛰어넘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 가로막아서 밝은 생각이 나오지 못하죠. 그러니까 이 정말이지 아픈 눈물이 나는 것은 축생이나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모두 이거는 극치에 이르러서, 수레가 돌아가는 데 거기 끄달려서 그냥 피를 흘리면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항상 욕심을 부리지 말라. 욕심은 아주 이거는 피치 못할 아픔이 닥쳐요. 그건 왜냐. 상대방도 나도 더불어 이게 아프니까.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라 이겁니다. 자기를 위해 받던들 한 철 사는 건데. 한 철 사는 동안 남을 위하다 보면 나도 다 같이 살게 돼요. 더불어 같이 살게 되는 거라고요. 나를 위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위해 주니까, 죽은 사람도 위해 주니까 죽은 사람이 이 나를 도와준단 말입니다.

죽은 사람이 천 개라면 천 개가 다 도와요, 상황에 따라서. 그건 왜냐. 그 죽은 사람들도 그 마음의 뜻을 알기 때문이죠. 체가 없으면 공부 못 하거든. 근데 남의 체라도 이렇게 지니고 이렇게 찰나찰나 드니까 그걸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라도 공부해서 좀 차원이, 지위가 높은 차원이 돼서 뛰어넘으라고 내가 문을 열어 주거든요. 항상 문은 열어 놓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그 들락날락하면서 그거를 다 알고 배우니까 아, 이 내 마음만 잘 알면 그거는 다 알게 되는 거 아닙니까. 내 마음을 모르니까 모르는 거지. 내 마음 하나만 안다면 다 알게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어떻게 무엇을 하고 가는지, 함이 없이 하는 건지 함이 있이 하는 사람인지, 입으로만 조잘조잘하는 건지, 저렇게 말을 해도 함이 없이 한다 이런 건지 그런 것도 다 알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해요. 부처님이 일대사의 인연을 맺으신 원인이 거기에 있구나 하는 걸. 왜냐하면 미생물에서부터 일체 만물만생이 다 내 생명이 아님이 없고, 내 모습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다 한 말이, 그것을 실천하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거든. 내가 어느 거를 건졌을 때 내가 건졌다고 할 수 있으랴. 그건 말을 못 하죠. 한두 가지가 아니니깐 말입니다.

이건 이거를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도 없고, 저거를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나는 한 사이가 없다.” 이렇게밖엔 될 수가 없죠. 그러면서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하다못해 미생물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이거를 알게 됐다 이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여러분들과 더불어 이 돌 하나, 나무 하나, 물 흐르는 거, 산 이런 것도, 부처님이 팔만대장경을 해 놓으신 거 모두가 감사 안 하는 게 없습니다. 스승 아닌 게 없다고요.

‘나는 인간이고 저건 축생이니까 아무것도 아니지.’ 이러지 말라 이겁니다. 그 축생도 내 스승이에요. 왜? 내가 그걸, 그렇게 처참한 걸 보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 처참하게 죽는 꼴을 보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 알았겠느냐고요. 사람도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내가 그 꼴을 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알았겠느냐고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다 내 스승이에요. 그러니 모두 가슴이 갈갈이 찢어져서만이 찢어지는 게 아니에요. 찢어지니까 병이 들죠. 이 하나하나가 죽은 사람도 이 응어리가 살아 있을 때 뭉친 것 때문에 그냥 죽어 있어도 어디 한 발짝을 떼어 놓지 못해요.

이런 얘기 또 합니다만 차를 타고 가다가 어떤 사람이 치여 죽었죠. 치여 죽었는데 그 혼이 놀라서 딱 나갔다가 들어와 보니까 사람이 없는 거예요. 자기가 없단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정신을 차려서 자기 몸뚱이를 찾으니까 없더란 얘기죠. 없으니까 남의 몸뚱이라도 가져야 이게 거기서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영 한 발짝도 떼어 놓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살아생전에 깨쳐야지 살아생전에 깨치지 못하면 죽어도 깨치지 못한다 이겁니다. 살아생전에 살던 그 습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묘지가 있고 이런 데 지나가다 보면 난리 때 죽은 사람,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금방 죽었어도 그 습이 있어서 손을 내밀어도 안 붙잡아요. 그러면 몇 번 그냥 내버려 두죠. 강요해선 되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몇 번 저거 하다 딴 사람들이 다 와야 그때서야 뒤에 설설 와요. 그렇게 되면 뭣이 좋으냐. 미래가 좋은 겁니다. 미래가 뭐 다른 건가. 미래가 오늘이지. 내일이라도 오늘이죠. 내일이니까 미래라고 그러죠. 근데 오늘이라고요. 과거라고 그러지만 금방 일 초 전이 과거예요 이런 세상을 이렇게 환상처럼 살면서, 도깨비처럼 살면서 진짜 나를 찾아서 자유스럽게 살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중요한 거는 우리가 그냥 보고 듣고 이렇게 다니면서도, 그저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보고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도 본 게 인연이니까. 비행기에도 뭐, 저거 해서 떨어졌다 이러고 전부 난리에 죽고 그런 영가들이 누적이 되면 나라가 좋지 않아요. 세계가 좋지 않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우주에도 좋지 않은 거죠, 모두가.

별성은 촛불과 같아요. 우리 생명의 촛불. 별성하고 연관이 돼 있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때에 따라서 천도를 하러 왔다 그러면, 이거는 전자에 죄가 많으니까 이거는 천도가 안 되고 이거는 되고 이렇게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런 거, 가난한 집에서 돈이 없어서 못 할 때는 그냥 자기 심정으로 그냥 해 줘도 된다.

또 이 공부하는 데 죄가 있고 없고 이거를 따져서 요건 이쁜 사람이고 요건 미운 사람이고, 요건 가난한 사람이고 요건 부자 사람이고 요래서 차이를 두고 차별을 두고 생각을 한다면 그건 정말이지 큰 오산이다. 남한테 이익하게 해 주려면 무조건, 무조건이지, 어떻게 거기에 잘하고 못하고가 들어가느냐 이겁니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나 이거는 잘못하고 이거는 잘하고 이렇게 따지는 것이지 이 부처님 법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무주상이에요. 공심으로써 그냥 무주상 보시를 하는 겁니다. 공심으로써. 그 한생각이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들도 실천을 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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