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닦음의 길 5

“계율은 단순한 윤리적 규범입니까? 아니면 깨침을 향한 수행입니까?”

언젠가 한 불자로부터 받은 질문이다. 계율을 중시하지 않는 오늘의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온 질문이었다. 물론 계율은 ‘~해야 한다(ought to)’는 구조로 이루어진 윤리적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계율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 깨침을 향한 실천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괴로움을 소멸하고 불교의 목적인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붓다는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以戒爲師)’고 할 정도로 이를 중시하였다. 그만큼 모든 수행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흔히 계율이라고 부르지만, 계(戒)와 율(律)은 본래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계가 자율성이 강한 반면 율은 타율성이 요구되는 규범이다. 계(戒)는 범어인 ‘실라(la)’를 번역한 것으로 ‘습관’, 또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습관적으로 양치와 세수를 하는 것처럼, 도둑질이나 거짓말도 습관처럼 안 해야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계를 어기면 양치를 안 한 것처럼 마음에 불편함이나 찜찜함을 느낀다. 이를 털어내기 위해서는 마음의 목욕인 참회를 하면 된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돌아보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계에 담긴 실존적 의미다.

계는 출가와 재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올바른 삶의 기초다. 대표적인 것으로 오계(五戒)가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불살생계(不殺生戒)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불망어계(不妄語戒),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불투도계(不偸盜戒), 삿된 성관계를 하지 않는 불사음계(不邪淫戒), 술을 마시지 않는 불음주계(不飮酒戒)가 불자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규범이다. 재가의 경우 오계를 어긴다고 해서 어떤 벌칙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계는 자율성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반면에 율(律)은 계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율은 규율이나 규칙을 의미하는 범어 ‘비나야(vinaya)’에서 유래된 말이다. 율은 단체 생활을 하는 출가자가 지켜야 하는 규범이기 때문에 타율적이고 강제성이 수반된다. 율을 지키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칙이 따른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군대의 군율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보통 계와 율을 합쳐서 한 단어로 불리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비구는 250계(戒), 비구니는 348계를 받는다. 남방의 경우 비구가 227계, 비구니가 311계를 받는데, 부파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계율은 처음부터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붓다가 제정하였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계율이 제정되었다고 해서 수범수제(隨犯隨制)라고 부른다. 잘못을 범할 때마다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계율이 많아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붓다는 입멸하기 전 아난에게 소소계(小小戒), 즉 가벼운 계는 버려도 좋다고 말했지만, 당시 어떤 것이 소소계인지 정해놓지 않았다. 그래서 붓다 입멸 후 모인 제1결집에서 ‘부처님이 제정하지 않은 조항은 새로 제정하지 않고, 부처님에 의해 제정된 것은 버리지 않고 지킨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중용〉에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知恥近乎勇)”는 말이 나온다. 누구나 잘못되고 부끄러운 행위를 하지만 아무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발원하는 사람에게만 작동하는 삶의 에너지다. 불교의 계율은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기준이 되는 덕목이다. 이를 기준으로 성찰해보면 어떤 것이 잘못인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계율은 올바른 삶의 기초이자 깨침을 향해 내딛는 첫 발걸음이다. 아무리 선정과 지혜를 열심히 닦는다 해도 계율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깨침을 향한 긴 여정에서 선정과 지혜라는 두 다리를 지탱하는 힘이 바로 계율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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