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부처와 마군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법은 알지 못하고 양처럼 코에 대이면 뭐든지 입안으로 집어넣고 있다. 참으로 종인지 상전인지 가리지 못하고, 손님인지 주인인지 구별을 못하는 꼴이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그릇된 마음으로 도를 닦는다. 도를 닦는다 하면서 가는 곳마다 시끄럽게 떠들기만 한다. 진정한 출가인이라 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속물이 가득한 세속적 근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무릇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평소의 일상에서 참되고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부처와 마군(魔軍)을 가려내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며 범부와 성인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만 참된 출가인이라 할 것이다. 만약 마군과 부처를 가려내지 못하면 바로 속가(俗家)를 나와 불가(佛家)에 들어왔으나 업을 짓는 중생일 뿐이요 진정한 출가인은 아닌 것이다. 지금 부처와 마군이 한 몸이 되어 나눌 수 없는 것이 물과 우유가 섞인 것처럼 되어 있다면 거위는 우유를 먹을 것이요, 눈 밝은 수도자라면 마군과 부처를 함께 물리쳐 버릴 것이다. 그대가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하는 애증(愛憎)에 얽혀 있으면 나고 죽는 바다 속에 떴다 잠겼다 하고 말 것이다.”

수행자는 우선 법을 바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법문이다. 말하자면 정견(正見)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임제록〉에서는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한다. 법을 간택하는 안목이 없으면 자칫 닥치는 대로 먹이를 입안에 집어넣는 양처럼 정법의 맥(脈)을 알 수 없는 사견(邪見)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출가자는 속된 생각을 벗어나 도(道)를 향하는 정신이 투철하여 비속한 생각을 떨쳐버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출가자는 누구에게나 도를 깨닫고자 하는 본분공부에 종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설사 이 공부를 금생에 이루지 못하더라도 다음 생을 기약해서 생애를 다 바치는 것이다.

〈보요경(普曜經)〉에는 출가사원(出家四願)을 설하고 있다. “1. 중생의 곤액(困厄)을 구제하는 것. 2. 중생의 혹장(惑障)을 제거해 주는 것. 3. 중생의 사견(邪見)을 끊어주는 것. 4. 중생의 고륜(苦輪)을 제도해 주는 것”이다.

종문(宗門)의 정견이란 자성을 직시하여 경계를 따라가는 움직이는 생멸심이 멈춰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자극도 받지 말아야 한다. 설사 어떤 충격이 오더라도 모두 흡수해버려 심체(心體)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분별경계에서 일어나는 망념의 알음알이를 가지고 선지를 터득할 수 없다. 때문에 정견을 가진 정인(正人)이라야 진정한 출가자라는 것이다. 이론에 밝은 말의 논리나 현학적인 변재를 가지고 정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인의 역할을 말하면서 “정인(正人)이 설사 사법(邪法)을 설해도 그 사법이 정법이 되지만 사인(邪人)이 정법을 설하면 정법이 사법이 된다”고 하였다. 또 출가자가 마군 노릇을 하지 말 것을 준엄하게 경책하고 있다. 마군이란 결국 정견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마(魔)란 범어 마라(Mara)를 줄여 쓴 말로 악자(惡者), 살자(殺者), 장애자(障碍者)로 번역되는 말이다. 좋은 일을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말하는데 선정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고 한다.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 하여 도가 높아질수록 마군이 치성해진다 하였다. 부처님 생애를 여덟 폭의 그림으로 설명하는 팔상도(八相圖)에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 있는데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것을 보리수 아래서 마군을 항복시켰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 정견을 갖추지 못한 사견(邪見)으로 하는 말을 마설(魔說)이라 하고 선(禪)에도 마선(魔禪)이니 사선(邪禪)이니 하는 말도 있다.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하는 애증(愛憎)에 얽혀 있으면 생사의 바다에 부침하게 된다”는 마지막 구절의 말은 〈신심명〉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揀擇)을 꺼릴 뿐(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식심분별(識心分別)을 벗어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어야 생사를 해탈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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