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없는 물질은 공덕이 될 수 없습니다

하하하…. 괜히 웃음이 납니다. 올라오면서 내가 지금 여기를 왜 한 걸음 한 걸음 딛고 올라가는지 또 내려가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찹찹히 그냥 올라왔습니다. ‘난 허구장창 말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데 뭐 할 말이 있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이렇게 걷고 있나.’ 하면서 올라오는데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남녀를 막론해 놓고 숱한 사람들의 아늑하고 따뜻한 일생이 있는가 하면 아주 춥고 몰아치는 추운 바람에 쌩쌩하게 살을 에어 가는 일생이 있다고요. 따뜻하게만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울 안에서 핀 꽃과 같아서 험악한 데 내놓으면 어쩔 줄을 모르고 얼어 죽기 똑 참하고, 바람에 쓸려서 뿌리까지 파여서 아주 죽기가 일쑤죠. 그러나 험하게 내버려 던져진 그 어떠한 꽃송이라든가 풀잎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어디다가 세워 놔도 그건 죽는다 안 죽는다 또는 쓰러진다 그런 것도 없습니다, 버려졌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무뜩 생각난 옛날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현실에도 우리는 그렇게 가고, 한 걸음에 한 일생이라면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딛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애로 태어날 때는 바로 준비의 한 일생이요, 어른이 됐다면 애가 될 것을 생각하면서 한 준비를 합니다. 그런 거와 같이 제가 그때가 한 여남은 살 될 때였습니다. 이거는 어느 두 남녀에게서 들은 소리입니다.

한 길을 한 걸음 쓰라림을 겪어 오면서
또 잘못해 가면서
잘못한 거를 회개해 가면서
살아가는 도중에 부처가 나는 것입니다.

그 두 남녀가 부부로 만나기 이전에 남자는 삼 남매였는데, 예전엔 염병이라 그랬습니다. 그런 불치병에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서 삼 남매만 고스란히 남았답니다. 그랬는데 막내인 자기는 두 살이고, 누이는 다섯 살이고, 형은 아홉 살이었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볼 때는 도저히 커 나갈 수가 없으니까 두 살 먹은 거를 어느 어린애 못 낳는 집에 양자로 줬답니다. 참, 일생이라는 것이 그런 일생이 있는가 하면 저런 일생이 있고 그렇죠. 그런데 그 두 살 먹은 거는 자기의 친어머니 아버지인 줄 알고서, 그러니까 그때서부터는 형이 있는지 누이가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는 자랐답니다.

그런데 그 집으로 가고부터 네 살이 되자 그 집에서도 어린애를 낳았답니다. 어린애를 낳게 되니까 호적에다가 맏이로 올릴 수도 없고 그러니까,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하고 법적으로 해 가지고선 떼어 내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올렸답니다. 그거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러고선 대하는 게 좋지 않아서 ‘왜 엄마 아빠가 저러나?’ 하고선 이상스럽게만 생각하고, 또 남은 공부를 하는데 자기는 공부를 가르치지 않고 나무를 해 오라고 하고 그래도 엄마 아빤 줄 알고 살다가 일곱 살이 되었는데 어느 스님이 오셨더랍니다. 그러니까 이 스님을 쫓아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스님을 쫓아서 가면서도 살아가면서 이상스러웠던 그런 생각, 슬픈 생각, 또 스님을 쫓아가라고 하는 그 이유는 뭐며, 그 스님하고 한참 얘기하더니 그렇게 한 거는 또 뭐며, 그 이유를 몰라서 궁금하면서도 어린 마음에도 부모 떠나는 것이 너무나 슬펐답니다.

그래서 절에 가서 스님 심부름도 해 주고 이렇게 저렇게 지내다 보니까 열 몇 살이 돼서 열아홉 살이 되기까지 나무를 하고 그러는데 참 착한 스님을 만나서 공부도 가르쳐 주고 그래서 자기의 눈도 뜨게 됐고 좀 알았답니다. 그랬는데 열아홉 살이 되고 보니까 그 스님께서 자기의 그 모든 것을 얘기를 쫙 해 주면서 너는 성이 아무개며 너는 그렇게 그렇게 돼서 이렇게 이렇게 됐다는 그 사실을 다 얘길 해 주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는 조선 말기 때 군인으로 입대를 했답니다. 군인으로 입대를 해서 군인으로 살면서도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버려진 한 풀잎이 뿌리를 내리고, 들풀이 되지 않고 한 떨기가 돼서 오고 가는 행인들에게 그래도 입맛이라도 적셔 주지 않을까. 배고픈 사람들의 입맛이라도 적셔 주게 한 떨기가 돼서 뿌리를 깊이 박자.’ 하는 생각이었답니다.

그래서 그것도 부처님의 덕이라고 하고 그 스님의 덕이라고 하고, 그 스님을 아버지 삼아 그 마음이 참 깊이깊이 사무쳤답니다. 그래서 사무친 그 마음을 가지고 군대에 입대해서 피나는 노력으로 무예를 배우고 그렇게 해서 장군이라는 이름을 땄답니다. 그 장군이라는 이름을 땄을 때 스물여덟, 아홉이 됐답니다. 그러자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이 내리듯 한 것은 뭐냐 하면 조선이 망하게 되고, 그러니까 그때가 서른세 살엔가 서른네 살엔가, 그거는 잊어버렸습니다. 서른두 살이라던가? 하여튼 그때에 조선병이 다 흩어지고 말았답니다.

그러니 그렇게 흩어지고 난 뒤에 나와서 근근득생으로 그저 아무거라도 해서 좀 뿌리를 박자고 무지하게 혼자 애를 썼답니다. 그 스님의 말씀을 항상 잊지 않고 그걸 따르면서 수년간을 그렇게 하다 보니까 서른 몇 살이 됐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조그마한 물감 공장을 갖게 됐고 과수원도 조금 갖게 됐답니다. 그래서 장가를 들었는데, 나이가 어렸답니다. 자기보다도 열일곱 살이나 열여섯 살이나 이렇게 아래를 아내로 맞이했답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 이 가슴에 맺힌 것이 뭐냐 하면, 그렇게 무예를 배우고 했는데 일본 사람들 틈에서 살려니까 구역질 나는 일이 너무 많고 치욕스러운 일들을 많이 봤고 겪어 왔기 때문에 때로는 참을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아서 그냥 젊은 혈기에 그, 무예를 배웠겠다 그러니까 그저 여기 가서 일을 저지르고, 아마 우리 조선 사람으로서는 환희심이 나는 일이었지만 일본 사람들한테는 그건 악조건이었지요. 그래서 힘드는 줄도 모르고 가는 길에다가 밤새도록 구덩이를 파고선 그냥 똥을 퍼다 부어서 말들이 전부 그리로 빠지게끔 만드는가 하면 밤중에 오고 가는 사이 없이 그냥 훌 두들기곤 없애 버리고 그렇게 하다가 이것이 탄로가 나니까 쫓겨 다니느라 볼일을 못 봤답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도 쫓기고 저기 가도 쫓기고, 여기에서 일 저지르고 저기에서 일 저지르고 이러다 보니까 몇 달에 한 번 밤중에나 가만히 와서 자기 마누라를 한번 보고는 밤중에 도로 나가고 나가고 이렇게 해서 육 남매를 낳았답니다.

그런데 육 남매 낳기 이전 얘기가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니깐 남편을 잡기 위해서 부인을 데려다가 엉덩이나 뭐, 넓적다리 이런 데를 담금질을 해서 고문을 해도 절대로 그 부인은…, 부인 자체가 모르기도 하거니와 바느질품을 팔아서 살면서 여자는 벙어리가 되고 참아야 하고 또 귀도 먹어야 하고 남의 말도 듣지 말아야 하고 보는 것도 없이 살아야 한다는 미덕이 아주 뿌리가 박힌 그러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학문도 높았고 또 백 씨네 외딸이었고 참으로 얌전하고 갖춘 분이었죠.

그런데 예전에는 안부모가 돌아가시면 여자가 염을 해서 다 하고 또 바깥 분이 돌아가시면 아들들이 염을 해서 다 하기로 했기 때문에 양반의 집에서는 다 그거를 갖추어서 배웠더랍니다. 그렇게 미덕이 있는 그 여인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한 엉덩이가 안으로 곪아서 이리도 터지고 저리도 터지니까 시운을 피우면서 그것을 아물려 가면서 해도 또 절로 터지고, 그러니까 젊은 날을 그냥 그렇게 죽었다 살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죽음을 몇 번을 겪으면서 그렇게 살아왔답니다.

그랬는데 그것이 말이니깐 그렇지 그 일생이라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며, 일제 시대 때는 다꽝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서 그걸로다 연명을 하고, 남자의 일생도 여자의 일생도 그렇게 하고 쫓기고 그랬는데 그렇게 되니까 일본 사람들한테 다 몰수를 당하고 참 가난하기가 짝이 없었겠죠. 그러한 두 분을 나는 여남은 살 될 때에 만났습니다. 만나서 내가 우니까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장장 네 시간을 그 얘길 했습니다.

빼먹은 얘기도 많고 그렇지만 그 얘길 쭈욱 하면서, 사람이라는 것은 버려진 막풀이라도 그 뿌리만 깊이 박는다면 바로 한 떨기의, 입을 축여 줄 수 있는 떨기가 될 수 있다. 아까 내가 얘기했듯, 곱게 자란 사람은 금방 나가면 얼어 죽기 쉽고, 또 바람에 쓸려서 뿌리도 파지고 그러지만, 버려진 그 풀은 너무도 뿌리를 깊이 박기 때문에 돌로 아무리 눌러도 새싹은 다시 나고 다시 난다. 그러면서도 올바로 갈 수 있는 길은 딱 양단간이 있다. 그렇게 버려진 풀잎도 한 떨기가 돼서 오고 가는 행인들의 양식이 될 수 있고, 입을 축여 줄 수 있고 목마른 사람의 입을 축여 줄 수 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막풀이 돼서 아주 남을 해치는 수가 많다. 또 한 가지는, 곱게 따뜻하게 살던 사람들은 그렇게 남을 위하는 생각도 없고 또 그렇게 견디어 보질 않았기 때문에 볕에만 나가면 그냥 스러져 버리는 이런 형국의 일생이니까 그것을 참고로 들어라.

“부모다 자식이다 할 것도 없다. 혼자 왔다가 혼자 옷을 벗고 바로 다른 팀으로 또 옮긴다. 다른 팀으로 옮겨서 모습을 바꿔서 또 같이 모여서 산다. 그러니까 절대로 울지 말라. 값싼 눈물을 흘리지 말고, 값비싼 눈물 한 방울이라는 거는 온갖 눈물을 다 넣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지만 만약에 값싼 눈물이라면 그것은 땅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말라 버리고 만다.” 하는 말을 했거든. 그래서 나는 울다가 울음을 뚝 그치고 그랬는데,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도 머리에 연연히 스쳐 갑니다. 내가 이날까지 용기를 얻고 이렇게 나간 것도 바로 그 덕입니다. 나는 쓰러지면 그 노래를 불렀죠. 만날 얘기하던 그 노래 말입니다. 몇몇 해던가. 연자방아가 돌고 돌아서, 물방아가 돌고 돌아서 끊임없이 한강이 흐르듯 말입니다. 얼마나 울었던가, 끊임없는 그 길을…. 그러나 아버지의 그 말씀을 항상 생각하면서 쓰러진 그 몸을 다시 일으켰노라 하는 것 말입니다. 어떤 아버지든지 내 아버지 아닌 것이 없거든.

이거는 옛날 얘깁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거니와 그 여인의 일생도, 어린애를 낳아서 남편과 같이 길러도 뭐하다는데 이건 남편도 쫓겨 다니고, 그것도 그대로 두는 것만도 아냐. 붙잡아다 고문을 하고 이렇게 하면서 한 엉덩이를 질질 끌면서, 이리 곪아 터지고 저리 곪아 터지니 그거는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한 여인의 일생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누구나가 다 생각할 때 작고 크고 그것뿐이지 여자나 남자나 그렇게 살을 에어 가는 일생이 있는가 하면 아주 따뜻한 일생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생들에 같이 끼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내가 만약에 그 그릇을 비우지 않았더라면 여러분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담을 그릇이 없었을 텐데, 그 눈물 한 방울의 창고로서 그릇을 비웠기 때문에 여러분의 눈물을 다 담아도 두드러지지 않고 그 눈물을 다 퍼내도 줄지 않는 바로 그 그릇을 얻지 않았는가. 그 그릇도 세울 게 없는 것을….’ 하면서 중얼중얼하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그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저한테 보여 주지 않으셨더라면 저는 그릇을 비우지 못했을 겁니다. 여러분의 그 아픔을 나한테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렇게 아픈 줄 몰랐을 겁니다. 내가 아파 보지 않았더라면, 참다운 눈물을 흘려 보지 않았더라면 그 눈물, 그 참다운 눈물, 참눈물을 몰랐을 것이며 또는 그 쓰라림을 아마도 세세히 몰랐을 겁니다. 여러분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남의 말만 듣고 이렇게 그냥 보고 넘기고 듣고 넘기고 하는 거하고는 다릅니다. 실천으로 옮겨서 그렇게 아주 살을 에어 가듯 다져 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는 실천은 아마 더없는 자기의 교훈이 될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제가 나에게 용기를 얻게 했고, 또 한 가지는 ‘아하, 그렇게 이어 가는 그 사람네들의 아픔을 같이하고 그 배고픔을 같이할 수 있다면 이 몸뚱이가 보이지 않고 가루가 된들 어찌 같이 안 하리.’ 하고서 거기에서부터 용기를 얻었고, 자면서도 잠이 안 오고 꿈을 꾸느라고 잠자는 거와 마찬가지로 밤을 새웠고, 그래서 가다 보면 쓰러지기도 하고 어느 때가 됐는지도 모르게 또 한참을 지나 일어나기도 하고…. 우리의 인생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렇게 참답게 나갈 수도 있는가 하면 마구 나갈 수도 있는 거거든, 아무렇게나 그냥.

그래서 그 참다운 내 주장심이 아주 사람 죽이는 무서운 살인자가 될 수 있는 칼이 될 수도 있는가 하면, 그 무서운 칼이 아주 연하고 잘 드는 칼이 돼서 여러분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칼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중심으로서 중력을 잃지 말고, 남의 말을 들어서 거기에 끄달리지 말고, 내 중심에 의해서 살아라 이거야. 언제나 내 중심, 그 한마음 한 점 속에 일체 만물만생이 다 거기에 있고 그 일생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요. 그리고 또 부처님이 돼 봐야 보살의 행을 할 수 있지 부처님이 되지 않고야 어떻게 보살행을 하며 법신의 행을 하며 모든, 즉 말하자면 자비의 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이거는 업이고, “네가 한 것이 이렇게 업이 많으니까.” 이렇게 따진다면 보살행을 못 합니다. 이것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줄 수만 있는 거, 그게 보살행이며, 줄 수 있을 때에 업이 많아서 주지 못한다는 그것에도 걸리지 마시란 얘깁니다. 업보가 많으니까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그런 것에도 걸리지 말고, 업에도 걸리지 말고, 그 법에도 걸리지 말고 아무것에도, 아무것에도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알면 죄를 짓겠습니까? 또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느 누구가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놓는 대로 본래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본래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게 그게 업이라면 부처가 어디서 났겠습니까?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쓰라림을 겪어 오면서, 또 잘못해 가면서, 잘못한 거를 회개를 해 가면서 살아가는 도중에 부처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나쁘다 좋다 하고 ‘당신은 업이 많으니까 이렇게 이렇게 해야겠다’ 하는데 그것에도 걸리지 마시고, 내 성심껏 내 가정에 어떠한 지탄이 없이,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큰 폐단이 없다면 내 성의껏 시주도 하고…. 내 성의껏 하지 내 가정에 폐단을 가지면서까지 시주를 하는 것은 그건 모든 게 걸리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두 우리가 정성이 지극하면, 지성이면 감천이야. 우리의 그 따뜻한 마음 하나로써 물질이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마음이 없는 물질은 공덕이 될 수 없다는 그 말을 수차에, 설법이라기보다도 아마 아픔에서 수차에 걸쳐서 말을 했을 겁니다.

여러분의 뜻을 알기 위해서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죠, 어느 사람한테. 보니까 공부도 할 만합니다. “삼십만 원을 시주하시오.” 그러니까 삼십만 원을 가져오더라고. 삼십만 원을 가져오니까 삼천만 원을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거 왜 그랬을까?’ 하는 음미를 한번 해 봤으면 좋으련만 거기에 걸려 버린다 이거야, 누구든지. ‘삼’ 하면, 즉 말하자면 삼심이 한데 합쳐서 일심이 되는 게 아닙니까? 일심도 바로 놓는다면 백이 됩니다. 또 천이 됩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에 날더러 내 길잡이가 이렇게 말을 했죠. 너는 삼천만 원을, 아니 삼억만 원을 해도 그것을 다 못 갚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돈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랬는데 그 마음 한 점에, 삼억이라도 그 마음을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걸 알았습니다. 여러분이 그 마음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과 삶을 버리는 데서 내가 시주를 삼억을 했든지 삼십억을 했든지, 십억을 했든지 천만 원을 했든지 몇천만 원을 했든지 또 단 십만 원을 했든지 걸림 없이 무주상으로 했다면 그게 공덕으로 돌아갑니다.

그러한 일생은 그분들뿐만 아니라 여기 앉아 있는 분들도 예전에 그렇게 했을는지도 모르고, 그 길을 걸었을는지도 모르고, 지금도 그렇게 걷고 있는 분들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그런 모든 분들을 볼 때…. 나는 스스로서 걸치는 거 하나 없이 남에게 주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여기 절을 짓고도 그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붙드는 것도 없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습니다. 왜? 나만이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걸 걸리지 않고 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줄 수 있다면 뭐가 걸립니까? 내 생명과 더불어 다 팽개치는 이상에는 하나도 못 할 일이 없습니다. 걸리는 일도 없고 못 할 일도 없습니다. 항상 내가 살려니까, 내가 살아야겠다, 생명이 위대하다, 뭐다 뭐다 하고 붙으니까 걸리는 게 여러 가지로 많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공에 모든 것을…, 주인공이 아니라고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김가면 김가, 박가면 박가, 그 성이 바로 여러분의 한마음의 한 점이라는 것만 아시고, 만약에 거기다 모든 걸 맡겨 놓고 사신다면, ‘들이고 내는 것도 바로 박가가 들이고 내는구나.’ 하고 ‘들이고 내는 것도 김가가 들이고 내는구나.’ 아, 누가 했어, 여직껏! 그런 거니까 거기에다가 모든 걸 맡겨 놓고 ‘네가 한 거니까 네가 해결해.’ 하고선 다 맡겨 놓는다면 바로 그릇은 홀랑 빌 겁니다. (녹음 안됨) (중략)

그래서 남의 말은 듣지 마라 이거야. 내 중심에서 오관을 통해서 보고 듣는 것에 이게 적합지 않다면 적합지 않은 걸로 밀고 나가고 적합하다면 적합한 걸로 밀고 나가고, 적합지 않다 하면 건너질 마라 이거야. 뛰지 마라! 듣지 마라! 욕심부리지 말고. 자기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한다면, 자기의 분수에 넘친다면 언제나 해로움을 당해. 개천을 건너뛸 때도 내가 건너뛸 만해야 건너뛰는 거지, 건너뛰지 못할 데를 턱 건너다가는 한쪽 다리가 물에 빠져. 그러니 인생살이 모두가, 한 걸음 이 자체가, 일생 동안에 이 모습의 꺼풀을 쓰고 한 일생이, 짧은 한 기간이 그렇게 처참하더라는 얘깁니다.

여러분! 부처님 법이 우리 떠나서 어디 있겠습니까? 밥을 떠 놓고 떡을 해 놓고 빌었던들 그 참다운 한마음의 한 점의 그 광대한 법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밥 한 그릇을 놓고, 죽 한 그릇을 놓고 먹는다 하더라도 바로 그것이 그 수많은 배고픈 사람과 같이 먹는다면 아마 그 죽 한 그릇은 되남을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정성껏 시주를 하라고도 하고 또 열심히 이 도리를 배우라고도 하고 그럽니까?” 이러겠지만 사람이 내 욕심만 채워서 되는 게 아냐. 욕심을 덜어라 이겁니다. 내 것만 아낄 줄 알고 내 것만 있는 줄 알지 말고. ‘내가 살고, 내 거고, 모두 내가 하고’ 이렇게 하니까 남을 원망하게 되고 또 조상 탓을 하게 되고 참다운 나를 못 봐.

모든 것은 일체 자기 탓이고 자기가 났기 때문이야. 이런 말을 여러분 앞에 해 드리죠. 그러니 모든 것은 각자 나로부터, 여러분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그러한 일생을 보낸다 할지라도, 강도가 들어서 칼로 찔러 죽이고 또 찌르고, 어떠한 아픔이 있고 물품을 다 가져간다 하더라도 그건 내 탓이지, 도둑질하는 그 사람의 탓이 아닙니다. 그건 그 사정을 모르기에 그렇지, 사정은 사정대로 있기에 그렇습니다. 자비라는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온 줄 아십니까? 값싼 사랑, 애정 이런 데서 자비라는 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참답게 죽고 사는, 또 아주 쓰라리고 아프고, 또는 따뜻하고 좋고 이런 걸 한데 합친 그것을, 균등을 잡아서 나갈 수 있는 이 우주의 근본 한 점의 바로 그 원리를 아주 값비싼 한 방울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하려거든 몽땅 다 주십시오. 하나하나 ‘내 거, 네 거’ 이러면 다 얻질 못합니다. 몽땅 다 주신다면 몽땅 다 서로가 나 아님이 없기 때문에 몽땅 다 내 것이고, 몽땅 다 나 아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 때에 서로가, 내가 그분의 속에 들어갈 수도 있고 내가 그분이 될 수도 있고 그분이 내가 될 수도 있어야 이 우주 섭류의 근본을 알아서 서로 진짜 물질 아닌 무주상 보시를 할 수 있는 그런 능력과 더불어 다섯 가지의 오신통을 그대로 부리면서 우리는 참다운 대장부로서의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생을 오늘 얘길 했습니다마는 여러분의 일생도, 그렇게 지내는 일생도 ‘야, 인생이 살기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며 사시는데, 그것보다 더 아프고 쓰리고 살을 칼로 짝짝 에어 가는 아픔을 느끼면서 사는 일생도 있으니 말입니다. 참고적으로 들으시고 이것이 설법이라기보다는, 우리 인생살이가 아니라면 설법이 어디 있고 또는 부처님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처? 우리가 없고 부처 따위가 어딨습니까? 예?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5월 6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