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사료간(四料揀ㆍ네 가지로 시험하다)

“어떤 때는 사람만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아니하고, 어떤 때는 경계만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아니한다. 어떤 때에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고, 어떤 때에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느니라.”

그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만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가 말했다.

“따뜻한 봄날, 땅이 비단이 깔린 듯하고 어린아이의 늘어진 머리카락이 명주실처럼 하얗다.”

스님이 말했다.

“어떤 것이 경계만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가 말했다.

“왕의 법령이 천하에 두루 잘 시행되고 장수와 군대는 요새 밖에서 전쟁을 끝냈도다.”

스님이 말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 둘 다 빼앗는 것입니까?”

임제가 말했다.

“병주(幷州)와 분주(汾州)는 소식이 끊어져서 홀로 한 지방에 있느니라.”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가 말했다.

“왕이 궁전에 오르니 시골 노인이 태평가를 부르니라.”

임제가 선수행자를 지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설한 네 가지 시험 방법을 ‘4료간(四料揀)’이라 한다. 사람과 경계를 빼앗고 빼앗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지도하는 상대자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골라 쓰는 방법이다. 료간(料揀)이란 잘 헤아려 중요한 핵심을 분간해 낸다는 뜻이다. 동산양개(洞山良介)의 오위설(五位說)과 함께 선가에서 학인을 제접(提接)하는 데 쓰던 특별한 수단이다. 빼앗는다는 것은 부정한다는 뜻이고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하는 것이다. 사람과 경계는 곧 주관과 객관을 말한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서는 4료간에 대하여 근기(根機)에 따라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은 하근기를 대하는 방법이고,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은 중근기를 대하는 방법이며,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 것은 상근기를 대하는 방법, 그리고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은 격식(格式)을 뛰어넘은 출격인(出格人)을 대하는 방법이라고 구분해 설명하기도 하였다. 결국 근기의 차이에 따라 4료간이 시설되었다는 것이다.

선의 궁극적인 경지는 주객이 끊어진 경지라고 한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은 언제나 주객이 상대하면서 그 사이에 통로를 만들어 관념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이럴 때는 진정한 입선(入禪)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곧 무념(無念)이나 무심(無心)의 상태가 되지 못하면 사람이 경계를 따라가고 경계가 사람을 자극하게 되어 분별이나 망상을 일으키면서 경계에 나타난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돈오(頓悟)를 내세운 남종선에서는 무념(無念)을 종지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육조단경>에서도 무념을 강조하면서 무념으로 종을 삼는다는 말이 나온다. 또 육조의 제자 화택신회는 무념이라는 말 대신에 부작의(部作意)라는 말을 썼는데 억지로 생각을 지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달마가 중시한 <능가경>에는 “부처님이 법을 가르칠 때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我敎授法時 心不起)”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말도 또한 무념 혹은 무심으로 법을 설한다는 뜻이다. 또 달마(達磨)는 선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기도 하였다.

“선이란 산란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움직임도 없고 망념도 없는 무념을 선정이라 한다(禪爲亂心不起 無動無念爲禪定)” 하였다.

점수(漸修)를 주장한 북종선에서는 무념이라는 말 대신에 이념(離念)이라는 말을 썼는데 무념처럼 단도직입적인 말이 아니라 망념을 여의는 과정을 두고 있는 점수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시중(示衆)은 상당(上堂)과 마찬가지로 종사가 대중에게 종지를 드러내 보이는 법문인데, 상당은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정해진 날짜에 행해지는 법문이라면, 시중은 그런 조건이 없이 일반적인 법문을 넓게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시중이 좀 더 친절하고 자세하게 하는 법문이다. 만참(晩參)은 저녁때 하는 법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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