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이해의 길 36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가수 나훈아가 부른 ‘잡초’라는 노래다. 사람들은 장미나 백합, 벚꽃 등은 좋아하지만, 잡초는 다른 꽃들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해서 뽑아내곤 한다. 이 잡풀은 기억해주는 이도 없다. 가수는 어쩌면 그 모습이 안쓰러워 노래를 부른 것은 아닐까. 그러나 화엄의 세계에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곳에서는 잡초도 장미와 조금의 차별도 없이 아름다운 꽃으로 대접받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불성(佛性)이 실현된 거룩한 존재라는 것이 화엄의 시선이다.

화엄종은 <화엄경>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다. 화엄(華嚴)이란 글자 그대로 온갖 꽃(華)으로 장엄한다(嚴)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온갖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파라다이스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세계는 불성이 실현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를 화엄의 용어로 불성현기(佛性現起), 줄여서 흔히 성기(性起)라고 한다. 성기는 불성(性)을 갖추고(具) 있다는 천태종의 성구(性具)와 대비되는 말이다. 이는 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있다. 이미 모두가 불성이 실현된 부처인 것이다.

화엄의 시선에서 장미는 아름답고 잡ㅁ초는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은 그저 인간의 헛된 주관에 불과할 뿐이다. 장미 부처, 잡초 부처, 잘 생긴 부처, 대머리 부처, 노동자 부처 등 모든 존재는 부처로서 평등하다는 것이 화엄에 비친 세계의 참 모습(實相)이다. 우리는 등산을 하다가 뱀을 만나면 놀라곤 하는데, 이 또한 주관적인 편견이자 왜곡일 뿐이다. 뱀은 그저 그렇게(如如) 생긴 것뿐인데, 인간의 주관이 뱀에게 ‘징그럽다’는 이미지를 덮어씌웠기 때문이다. 화엄은 편견에 사로잡힌 우리들에게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실상 뱀이 징그러운 것이 아니라 뱀을 징그럽게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이 징그러운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들지만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든다는 생각 역시 화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가장 철학적인 경전이라고 평가 받는 <화엄경>은 60권, 혹은 80권의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이 사변적인 화엄종이 중국에서는 두순(杜順, 557~640)과 지엄(智儼, 602~668)을 거쳐 3조인 법장(法藏, 643~712)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운다. 천태종이 남북조에서 수나라에 이르는 혼란의 시기에 유행했다면, 화엄종은 당나라로 통일된 이후 유행한다. 통일된 나라에서 승자가 패자를 향해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이니 함께 하자고 설득하기에 화엄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잡초든 장미든 모두 ‘하나’임을 강조하는 화엄의 이상주의는 절대 권력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 이후 화엄이 유행한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패자를 품기 위한 목적으로 의상 대사를 앞세워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화엄10찰(刹)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화엄은 중앙권력이 무너지고 혼돈의 상황이 다가오면 효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철학이다. 혼란의 시기에는 이상보다 고통스런 현실이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다. 화엄과 천태가 이상과 현실이라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천태가 불성에서 지옥을 그리고 있다면, 화엄은 지옥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허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잔뜩 술에 취해 걷다가 전봇대에 이마를 부딪치면 하늘에 별이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별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술이 깨면 저절로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허상이라는 술에서 깨어나면 지옥은 없고 모두가 부처로 보인다. ‘세상은 아름답다’는 말은 이때 나오는 탄성이다.

화엄은 메이저가 아니라 마이너를, 다수가 아니라 소수를 품고자 하는 철학이다. 비록 화엄이 메이저와 다수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무기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이 점만은 놓쳐서는 안 된다. 화엄에는 소외되고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작은 것 하나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담겨있다. 우리가 화엄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