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군자와 같은 茶 성품

요묘 벽화 6묘 전실 동벽. 다연으로 차를 가는 모습.

당송(唐宋)의 새로운 다풍(茶風)을 접했던 도당(渡唐) 승려들은 고려시대 차 문화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계층이다. 그들은 송나라를 내왕하며 차에 대한 신정보를 익히고 돌아와 고려 차 문화가 더욱 발전할 토대를 제공했다. 특히 선종 오가(五家)인 위앙종, 임제종,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은 법안종이다. 기존 선가 유풍의 좋고 나쁨을 가려 이를 종합, 비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법안종은 선종의 바른 가풍을 정립하기 위해 교전(敎典)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선종 법안종적극 수용한 광종
중국 차 문화 국내 유입 배경돼
차 한 잔 얻기 위한 수고로움이
정성과 집중력 높이는 수행으로

법안종의 초조(初祖)는 문익선사(文益禪師)이다. 강서 임천의 승수원에서 교화를 폈다. 그를 흠모하던 남당(南唐)의 왕 이변이 금릉의 보운선원으로 청하여 정혜선사(淨慧禪師)라는 호를 하사하고 그를 청량산으로 모셨는데, 이곳이 문익선사의 필생 교화 도량이 된 연유이다. 법안종이 개창되어 왕성하게 법을 펴던 10세기경은 대개 선종 사원에서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토가 이미 정착되었던 시기다. 특히 문익선사의 제자 덕소(德韶), 문수(文遂), 혜거(慧炬) 같은 제자들이 나와 왕후의 존경을 받았는데, 바로 혜거는 고려 승려로, 문익선사의 초기 제자였다. 경덕전등록에 그에 관한 정보가 자세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고려 도봉산 법안종의 국사이다. 당말 오대 때의 승려인데, 생몰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중국에 와서 법안 문익을 따라 수행하여 득도한 후, 고려의 국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청하므로 마침내 고려로 귀국하였다. 이후 중국의 법안종은 점차 쇠락하여 미미해졌지만, 고려의 법안종은 도리어 흥성하였으니 모두 혜거의 영향 때문이다.(道峰山法眼宗之可 唐末五代珂之僧 生卒年不圈 벌뫄踞法眼文益修行而得悟 后高쟝벌主遣使윱헝 遂回故地 以后我法眼宗祛衰微 而高法眼宗却菫盛一珂 皆慧炬影捲所致)

윗글에 따르면, 혜거선사의 귀국은 그를 흠모하던 왕이 사신을 보내 돌아오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왕은 예를 다하여 그를 국사로 모셨으며, 이로부터 고려에 전파된 법안종이 더욱 성행해졌다는 것이다. 실제 혜거선사가 들여온 법안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광종 때이다. 그러므로 그의 귀국을 종용한 왕은 광종이라 여겨진다. 더구나 광종은 고려의 통치 기반을 단단히 구축한 것은 물론 중앙집권화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제를 시행했고, 제도를 정비했다.

특히 광종은 불교 교단 정비를 하는 한편 승정(僧政)을 정비하여 불교를 국가 운영체계에 공식적으로 포함했으며, 선종을 정비하면서 법안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광종이 영면영수(904~975)종경록을 읽고 감동하여 고려의 승려 30여 명에게 법안종을 배우게 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따라서 경덕전등록의 혜거와 관련된 기록은 광종 때 법안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연유를 확인시켜준 자료라 하겠다.

그런데 법안종의 적극 수용이 차 문화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안종은 오월 지역을 거점으로 일어난 종파이고, 이곳은 중국 차 문화의 발생지역이다. 그러므로 법안종을 참구(參究)했던 고려 승려들은 법안종 승원에서 일상화된 음다 풍습을 익혀 새로운 제다법이나 탕법에 눈을 뜬 수행승들이었다. 그러기에 이들의 귀국은 법안종 승단에서 습윤한 차를 고려 왕실과 귀족 사회에 퍼트린 문화의 전파자로, 고려의 차 문화에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광종은 선대(先代)부터 실시했던 팔관회, 연등회뿐 아니라 무차대회 같은 불교 행사를 적극적으로 열었던 군왕이었다. 그러기에 이 시기는 왕실의 주도하에 더욱 풍성한 차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고, 불교계의 막강한 영향력은 승려들이 차 문화를 주도하는 시대 환경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차 문화를 주도했던 승려의 다사(茶事)와 관련된 자료는 주로 고려시대 문인이 남긴 문집과 역사서 등이다. 특히 차에 밝았던 승려와 승원의 모습을 그린 임춘(林椿, 1148~1186)장난삼아 방장 겸 스님에게 쓰다(戱書謙上人方丈)’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노래했다.

겸 스님의 준일함은 총림에서도 빼어나(謙公俊逸叢林秀) 신선 같은 꼿꼿한 모습, 맑고 또 여위었네(玉骨럈럈淸且瘦). 달마의 가풍은 설두에게 전해져(佛祖家風傳雪竇) 그가 앉은 곳엔 문득 사자후가 들리네(踞地便聞師子吼). 묵언(?)으로 고요히 선정에 들어(默坐澄心牢閉口) 다시는 공과 유를 말하지 않네(不復談空還說有). 미친 늙은이 방거사가 스스로 알고는(自知龐蘊一狂北) 가끔 참선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네(往往參禪來稽首). 서당엔 오래도록 금주한 걸 비웃지만(祇笑西堂長禁酒) 나에게 삼매 솜씨로 차 다리는 걸 뽐내는구려(誇我點茶三昧手). 돌솥에서 물 끓는 소리 일어나니(石鼎作聲嗔蚓叫) 수액을 만난 객을 누가 구할까(客遭水厄誰能救). 중략

앞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겸 스님은 선승으로 수행이 뛰어난 수행자인지라 그 모습 또한 신선처럼 깨끗하고 맑았던가 보다. 달마의 참선 수행법은 설두선사(834~905)에게 전해졌으니 바로 설두선사의 영향을 받은 겸 스님이 수행하는 곳에선 사자후가 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수행의 심지는 고려뿐 아니라 방거사도 알아준 경지였단다. 그런 겸 스님이 임춘에게 내준 차란 삼매의 경지를 나툰 차였다. 물론 겸 스님의 차에 대한 경지는 찻물을 감별하는 능력뿐 아니라 삼비(三沸)로 끓여야 하는 탕변(湯辨)도 체득했을 터이다. 그러므로 겸 스님은 점다삼매(點茶三昧)를 뽐낼 만하다는 희언(戱言)이 아닐까.

그리고 점다(點茶)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탕법이다. 12세기엔 이미 백차(白茶)를 선호했기에 뇌원차(腦原茶)나 유차(孺茶)를 만들어 즐겼다. 당시 차 한 잔을 얻기 위한 수고로움은 잎 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먼저 숯불을 피워 약한 불에 차를 구운 후, 나무절구에 차를 넣고 덩어리를 분쇄한다. 이런 과정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천화사에서 놀다가 차를 마시다(遊天和寺飮茶)’녹태전을 대나무 공이로 부수자(穿破綠苔錢) 시냇가에서 졸던 수컷 오리가 놀라 깨었네(驚起溪邊彩鴨眠)”라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녹태전은 당시 승원에서 마셨던 고급 차의 이름으로, 둥근 돈처럼 생겼다하여 녹태전()이라 한 것인데 단차(團茶)를 말한다.

이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단단한 덩이차를 나무절구에 넣은 후, 작은 구멍 사이에 공이를 넣어 나무망치로 친다. 이때 나무망치 소리가 탕탕 울리므로, 시냇가에서 한가히 졸던 수컷 오리가 깜짝 놀라 깬 정황을 그림으로 보는 것처럼 읊어낸 것이다. 한편 나무절구에서 분쇄한 차는 다시 차 맷돌(茶磨)이나 다연(茶硏)에 갈아낸 후, 가는 체로 쳐서 미세한 가루를 만든 후에야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다. 참으로 번거로운 공정을 거치지만 번뇌를 삭힐 향기로운 차 한 잔을 내기 위한 정성과 집중력은 본받을 만하다.

승원에서 차를 다마(茶磨)에 차를 가는 정황을 그린 자료로는 이인로(李仁老, 1152~1220)승원의 차 맷돌(僧院茶磨)’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 맷돌 천천히 돌아(風輪不管蟻行遲) 월부를 막 돌리자, 옥가루 날리네(月斧初揮玉屑飛). 종래 법희는 진실로 자재한 것(法戱從來眞自在) 맑은 하늘에 우레치고 펄펄 눈이 내리는 듯(晴天雷吼雪醉醉)

윗글에 의하면 13세기 승원에 손님이 찾아오면 가루차를 대접했던 차 문화의 흐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승원에서 차를 가는 맷돌 소리가 우레가 치는 듯, 지축을 울렸다는 표현도 흥미롭다. 우레가 치듯 맷돌이 돌아가고 맷돌이 돌아갈 때마다 흰 눈이 내리듯, 하얀 찻 가루가 날리던 정취는 상상해 봄직한 풍경이다. 차가 문학적 감수성과 예술로 승화되었던 고려 시대는 귀족이나 불가, 관료 문인들이 이끌었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고려의 지성인이 읊어낸 다시(茶詩)는 차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던 결이며 문화적 토양을 풍부하게 만들어준 물줄기였다. 더구나 고려의 문인들은 귀한 벗에게 차 맷돌을 보내 맑고 향기로운 차를 즐기며 서로의 향상을 기원했던 여유와 배려가 있었다.

이규보의 차 맷돌을 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여(謝人贈茶磨)’돌 쪼아 바퀴 하나 이뤘으니(琢石作孤輪) 돌리는 땐 한쪽 팔만 쓰네(?旋煩一臂)”라 하였다. 이어 그대도 차를 마시면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보내주었나(子豈不?飮 投向草堂裏)”라고 했다. 지기(知己)가 나에게 차 맷돌을 보낸 까닭은 내가 유독 잠 즐기는 걸 알기에 나에게 부쳐 온 것이로구나(知我偏嗜眠 所以見寄耳)”였단다. 그렇다. 차를 마시면 잠을 적게 잔다. 그러기에 벗에게 차 맷돌을 보내 탁마(琢磨)를 독려했던 것. 차의 성품은 군자와 같다고 생각했던 이 시대 사람들의 차에 대한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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