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칼날 위의 일(劍刃上事)

임제가 법좌에 오르니 어느 스님이 물었다.

“칼날 위의 일이 어떤 것입니까?”

임제가 말했다.

“화가 되는 일이지, 화가 되는 일이라네.”

스님이 머뭇거리니 임제가 바로 때렸다.

‘칼날 위의 일’을 물었다. ‘칼날 위의 일’이란 지혜를 상징하는 말이다.

취모검(吹毛劍)이란 말이 있듯이 예리한 칼날이 토끼털 같은 털에 닿으면 털이 싹둑 끊어질 정도로 날카로워 일체 번뇌를 다 잘라버린 무념ㄴ무상(無念無想)의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떠나간 경지로 식심(識心)이 끊어진 것을 말한다. 이걸 물었더니 화 되는 일이라고 거듭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무섭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란 말이다. 칼날이 너무 예리하니까. 머뭇거리자 또 한 대 때린다. 할을 했다가 때렸다가 임제는 법을 이렇게 보여준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저 ‘석실행자’가 방아를 찧다 발 움직이는 것을 잊어먹었다 하는데 어디로 간 것입니까?”

임제가 말했다.

“깊은 샘에 빠졌느니라.”

‘석실행자’의 이야기가 나왔다. 청원행사(靑原行思ㆍ?~741)의 3세손에 석실선도(石室善道)가 있었는데 이 스님을 석실행자라 불렀다. 목평(木平)이라고도 하는데 생몰연대가 밝혀지지 않았다. 당나라 무종(武宗)때 회창사태가 일어나 불교를 폐하려고 할 적에 난을 피하여 속복을 입고 돌방아간에서 방아 찧는 일을 했으므로 목평을 석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때 석실이 방아를 찧다 선정에 들어 발 놀리는 것을 잊어먹었다는 설화를 두고 발 옮기는 것을 잊어먹은 뒤엔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답이 깊은 샘에 빠져버렸다 한다. 깊은 샘에 빠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심하게 말하면 샘에 빠져 죽었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깊은 무아지경에 들어갔다면 그것이 잘된 일일 텐데 임제는 이를 긍정하여 말한 것 같지도 않다.

임제가 말했다.

“다만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보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대하지 않고 모두 그들이 오는 곳을 알아차리느니라. 만약 이렇게 오면(쉽게 오면) 실각하게(자격 잃게) 되고 이렇게 오지 않으면(어렵게 오면) 줄이 없는데도 스스로 묶는 격이니 언제나 함부로 짐작하지 말라. 알든 알지 못하든 모두가 그르쳤다. 분명히 이렇게 말해서 천하 사람의 폄박(貶剝=평판)에 맡겨 두노라. 오랫동안 서 있느라 수고했구먼.”

임제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할 때 철저히 관찰한다는 말이다.

말을 순순히 고분고분하게 하는 사람이나 도전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나 자기 견해를 가지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알거나 모르거나 말에서 알려 하는 자기 입장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말 이전의 말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말 이전에 눈썹이 먼저 말한다(聲前眉語傳)’는 말도 있다. 또 눈이 마주치는 데 도(道)가 있다(目擊而道存)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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