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봄과 스님

 

“뭔 중이 시답지 않게 글이나 쓰고 있어.” 법정 스님이 씨알의 소리나 샘터, 신문에 글을 써서 사람들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아우를 때 선방 수좌들이 입에 올린 말이다. 도법 스님은 “부모가 죽어도 난리가 나도 쳐다보지 않고 수좌는 오로지 참선하여 끝내 깨달아야 한다며 죽자고 매달릴 때였다. 그때 정서로는 용납되지 않았다”고 돌아본다.

71년 4월 군부독재에 항거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참여
글 하나하나 시국의식 담겨

60년대와 70년대에 스승이 던진 말씀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얼음 선사라던 스승 말결이 세태를 비판하되 꽃을 비롯한 자연이야기가 어우러지게 된 것은 70년대 후반을 지나 80년대에 이르면서였다. 무슨 까닭일까.

봄 없다할 만큼 잔인한 1971년 4월

“그럴 리가요? 우격다짐으로 삼선개헌을 한 지가 언제라고…”

“고귀한 4.19 민주혁명 희생을 짓밟고 군인들이 한강을 넘었을 때 이미 이 나라 민주주의는 숨을 거둔 것이나 다름없지요. 여태까진 눈치라도 보는 척했지만, 이제는 내놓고 하고 있어요.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를 누르고 나면 더는 선거를 치르지 않고 종신 집권을 하려고 기승을 부릴 거예요.” 봄이 왔으나 세상에 봄은 없다고 할 만큼 모질던 1971년 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이던 스승과 장준하 선생이 나눈 말씀이다.

편집회의를 마치고 나면 장준하 선생은 차로 스승을 봉은사 다래헌까지 바래다주고 면목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어느 날 장준하 선생은 전에 없이 스승 방에까지 들어와 새로운 운동을 펼쳐야 하겠다고 말씀한다. 함석헌 선생과 장준하 선생에 이어 세 번째로 발기인에 이름을 올린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1971년 4월 19일 군부독재 장기집권에 맞서겠다며 돛을 올린다.

같은 해 10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인사를 중심으로 ‘64인 지식인선언’을 내고 총통제 분쇄, 학원탄압 중지, 구속학생 석방, 대학생 강제 입영 중단, 대학을 점령한 군인을 철수시키라고 다그쳤다. 박정희 정권은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더니 이듬해 10월 종신 집권으로 가려는 뜻을 굳히고 ‘10월 유신’을 선포하며 거침없이 나아간다.

세상은 온통 불 난 집이었다. 재야 민주화 집회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스승은 집회하다 종로경찰서에 끌려가기도 여러 번. 한 번은 조사하는 이가 윽박지르고 무릎을 꿇리며 반말지거리를 해대며 으르딱딱거렸다. 조계종 총무원이 바로 코앞이었으나 누구 하나 넘성하지 않았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달려와 서장에게 이리 대접할 분이 아닌데 어딜 꿇어 앉혔느냐면서 호통을 쳤다. 경찰서에서 풀려나오면서 책방에 들러 수필집을 살 만큼 책을 가까이한 스승은 ‘홀로 있음은 보랏빛 외로움이 아니라 본디 제게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거듭 사람들을 일깨우는 글을 썼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속 사람을 옹글도록 하여 스스로 일어설 때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때 박정희 정권은 스승이 두고두고 가슴앓이하도록 만든 몹쓸 짓을 저지른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이른바 제2 인혁당사건이 그것이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으로 종신 집권을 노리자 학생과 시민이 나서서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을 펼친다. 그러자 도예종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잡아다가 나라를 뒤엎으려고 했다는 혐의를 씌워 재판에 넘긴 때가 1975년이다. 군사 법정은 이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자 18시간 만에 여덟 사람을 사형시킨다. 스승은 “죄 없는 이들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없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이라면서 가슴을 친다.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도록 한 반체제운동이 어떤 뜻이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스승은 뒷날 “민주화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라. 내 마음에 독을 품는 게 증오심인데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순수한 마음에서 벗어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다. 본디 자리로 돌아가자” 하는 마음에서 산으로 들어갔다고 말씀한다. 불자들이 지켜야 할 것 가운데 가장 앞세운 것이 ‘산목숨 죽이지 않기’로 오직 ‘살림살이’에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뜻있는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민주인사 대부분은 정권이 모질게 굴면 굴수록 드세게 맞서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스승은 ‘비록 억눌림에서 살아갈지라도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저다움을 드러내어 살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한다. 그러던 끝에 조계산 자락에 암자를 짓고 내려간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저마다 제 결에 따라 받아들인다.

불일암으로 내려간 뒤로 스승은 서울살이할 때보다 더 자주 글을 쓰면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었다. 나는 이것을 글을 써서 사람들이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아울러야 하겠다고 굳게 다지셨다고 받아들인다. 물러선 것이 아니라 민주화를 이루는 방법이 군사정권을 드잡이하는 데서 여느 사람을 보듬어 살리는 데로 나아간 것이다. 사람을 억눌러 숨통을 조이는 밑바탕에 죽임이 있다면 죽임에 맞서는 것이 살림이다. ‘너를 살릴 때 비로소 내가 살 수 있다’란 뜻이 고스란한 살림살이는 숨통 트기에서 비롯한다. 민주화, 사람이 사회 주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억누름에 맞서 싸우는 길이 그 하나이고, 사람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아우르는 마음 살림으로 나아가는 길도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람들 마음 결을 보듬어 누리 결을 바꿨듯이, 스승은 여느 사람 마음을 보듬어 살리기로 뜻을 돌렸다.

그 뒤로 스승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고 답답한 시절. 꽃이 피었는지 철이 깊어지는지도 모르며 시달리는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아무리 모진 시국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자연에 깃든 아름다움조차 느낄 줄도 모르고 살아가도록 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이 바탕에서 70년대 중반을 넘어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태 비판 글과 아울러 ‘쉴 줄도 알아야 한다’나 ‘거꾸로 보기’, ‘아빠 바람이 달아’, ‘무심코 피고 지다’처럼 마음을 보듬는 글을 풀어낸다. 90년대에 들어서서는 암자 하늘에 뜬 구름이나 겨우살이 하는 짐승들과 물과 먹이를 나누는 얘기나 꽃 이야기를 더욱 많이 나눴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로 마음 적셔

“우리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다. 돌아보라.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들과 어울려 산다.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어머니 누리, 땅이 있고, 우리 목숨줄을 이어주는 푸나무가 있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벌레와 짐승들이 있다. 작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두꺼비 한 마리와 어울릴 줄만 알아도 너끈히 잘 살아갈 수 있다.”

스승은 잎을 틔우기 전에 꽃을 먼저 피워 올려 겨우내 시달린 목숨붙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매화처럼 ‘중이 시답지 않게 글이나 쓰는’ 까닭을 드러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잔잔하게 풀어주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살림 이야기가 거칠고 모진 세상 한복판에서 휘둘리며 쩔쩔매는 여느 사람들에게 시원한 바람이며 더없는 그늘이었다.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신영복 선생은 한겨울 독방에서 두 시간이나마 쬘 수 있는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이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었다고 돌아봤다. 싸늘한 감옥 생활에서 잠깐 드리운 햇빛이 살아갈 힘을 주듯이, 사람들은 이따금 샘터나 신문에서 만나는 스승 가슴을 거쳐 살아나는 시냇물 소리이며 매화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로 메말라가는 마음을 적셨다.

“내 오두막 둘레는 지난해처럼 노란 마타리꽃이 피어나고 있다. 산바람에 하늘거리는 마타리꽃은 가을 입김을 머금고 있다. 꽃이 피어나기 전에는 마치 기장 조(차좁쌀) 같은 모습인데 꽃이 피어나면 밤하늘에 은하수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양을 더 자세히 보려고 확대경을 들이대면 비록 작은 꽃이지만 꽃 하나하나가 그대로 우주라는 생각이 든다. 꽃도 작은 꽃이 아름답다.”

강원도 오두막으로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드러낸 마음 자락이다. 니체도 차라투스트라 입을 빌려 말한다.

“작은 것만으로 얼마나 넉넉한가. 또렷하게 가장 작은 것, 가장 부드러운 것, 가장 가벼운 것, 살랑거리는 도마뱀 소리, 숨소리 하나, 날갯짓하나, 눈짓하나… 작은 것들이 더없는 안락을 누리고 있다.”

스승은 굳이 꽃을 찾아 나설 것 없이 오가는 길가, 손바닥만 한 뜰, 돌층계 틈 핀 꽃을 건성건성 스치지 말고 곁에 앉아 꽃잎 하나하나, 꽃술과 꽃받침까지 놓치지 말고 낱낱이 살펴보며 꽃향기를 들어보라고 말씀한다. 꽃향기를 들어보라는 말씀에 어찌나 가슴이 뛰던지. 꽃과 가까이하면 슬그머니 꽃 같은 삶이 된다고도 하셨다.

“저 꽃 이름이 뭔지 알아?”

“언뜻 봐서는 잘 모르겠지? 가까이 들여다봐야 보이니까. 순수하면서도 끈질긴 들꽃이라고.”

길상사 행지실로 가는 길목 야트막한 곳에 소복하니 피어 있는 조그맣고 하얀 노루귀를 가리키며 스승이 던진 말씀이다.

우리는 너나들이 순수하면서도 끈질긴 들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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