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 불교예술 정수 망라하다

건축·소조·벽화 종합 결정체
1000년간 양식 변화 보여줘
선현 기리며 추모재 봉행도

진광 스님이 그린 순례 풍경들. 사진 왼쪽부터 유림굴의 전경, 돈황 막고굴의 입구 모습, 돈황 막고굴의 전면 모습.

중국 감숙성 안서현의 남쪽 60Km에 위치한 삼위산(三危山) 기슭 답실하(踏實河)의 동서 양안에 있는 것이 바로 유림굴(楡林窟)이다. 돈황의 막고굴(莫高窟), 서천불동(西千佛洞)과 함께 이 지역 불교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현재 동쪽 절벽의 32개굴, 서쪽 절벽의 10개 굴에 걸쳐 소상(塑像) 100여 구와 함께 벽화가 남아있다. 유림굴은 계곡의 양안 모두에 굴을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소조불상은 등신대 크기에 상호가 풍만하고 신체가 웅건하여 당대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유림굴의 백미(白眉)는 6굴로 가장 큰 대불상이 있다. 대불은 성당(盛唐)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높이는 24,7m에 달하여 대불의 발과 얼굴쪽으로 각기 입구를 내어 놓았다. 이곳은 규모가 가장 커서 예불굴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우러러 바라볼수록 기가 막힌 작품이다. 우리 순례 대중들도 지도법사이신 설정 스님을 모시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불과 반야심경, 그리고 축원을 올렸다.

이 척박한 땅에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토록 장엄하고 아름다운 석굴을 조성케 했을까? 비단 권력자의 강권만이 아니라, 당대 민초들의 간절한 신심과 비원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이 지역까지 밀려온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정착해 살았다고 하니, 그들의 고향과 나라를 그리는 마음이 함께했다고 믿는다. 그들을 기리며 향을 사르고 삼가 명복을 빌어본다.

돈황은 기원전 117년 한무제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한나라와 당나라 시절에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남쪽 길과 북쪽 길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중요한 교역로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몇 세기 동안 서역으로 경전을 구하러 가는 천축구법승이나 대상들이 이곳을 거쳐갔고, 그 과정에서 막고굴같은 수천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동굴유적을 꽃피울 수 있었다.

이곳 근처에는 명사산(鳴沙山)과 월아천(月牙泉), 그리고 지역방위를 위한 요새인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등의 유적이 자리한다. 돈황(敦煌), 그 이름부터 휘황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다음날 아침 돈황 막고굴로 향했다. 입구를 지나 3D 영상으로 돈황석굴의 역사와 예술에 관한 다큐를 시청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이미 기가 질리는 듯하다. 한국말을 곧잘하는 한족 가이드의 안내로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석굴을 둘러보았다.

돈황석굴은 건축, 소조, 벽화라는 3개의 장르가 결합된 종합예술 전시장이다. 특히 돈황의 벽화는 역대 10개 왕조의 1000년 간에 걸친 시대별 양식의 변화를 한 눈에 보여준다는 점과 내용면에서도 다양한 특징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돈황석굴의 492개 석굴에 그려진 4만5000㎡에 달하는 벽화는 그야말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할만하다. 특히 돈황 17호 석굴에서 발견된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의 존재는 가히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돈황석굴을 둘러보고는 막고굴 앞에서 혜초 스님을 비롯한 천축구법승과 돈황학의 선구자인 김구경(金九經) 박사, 그리고 조선족 화가로 돈황벽화를 모사한 한락연(韓樂然) 선생과 함께 이곳에 이주해 살았던 고구려 유민들을 기리는 추모제를 가졌다. 특히 설정 스님께서 법주로, 혜총 스님은 바라제를 하신 것이다.

아울러 은사이신 인곡당 법장 대종사의 다례일과도 맞아 대중의 양해를 구하고 함께 추모제를 올렸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가노라(讀萬卷書 破萬里程)”는 말을 몸과 마음에 새기면서 선사(先師)들의 구도열과 보살행을 길이 기억하고 기록하여 기려본다.

돈황석굴을 나와 명사산으로 향했다. 여행사에서 사막이라 이동이 불편해 낙타를 준비했는데, 설정 스님께서 “어찌 수행자가 낙타를 탈 수가 있으리요, 낙타는 그만두고 나를 따르라”하시며 솔선수범해 명사산 모래사막을 오르신다. 대중 스님들도 스님의 뒤를 쫓아 모래언덕을 오를 수 밖에 없었음은 물론이다. 역시 어른 스님의 위의와 행해는 가히 명불허전이다.
이어서 돈황 근교의 양관과 옥문관 유적을 찾아 나선다.

양관은 왕유의 시중에 “그대에게 다시 권하노니 이 술 한 잔 받게나. 서쪽 양관으로 가면 술 권할 친구도 없으리니!(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로 유명한 곳이다. 아울러 옥문관은 왕지환의 ‘양주사(쏐州詞)’란 시의 “이곳의 따뜻한 봄바람도 저 옥문관을 넘어서 님 계신 곳에 이르지 못하네(春風不渡玉門關)”라는 구절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풍경이 쓸쓸하기 그지없다.

돌아오는 길에 하미과(수박같이 생겨 메론 맛이 나는 과일) 파는 농장에 버스를 세웠다. 설정 스님께서 하미과 대중공양을 내신다고 한다. 그런데 직접 칼을 드시고는 하나하나 다 손수 깎아서 대중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모습에 황송하고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이게 바로 어른 스님의 보살심이자 자비덕화가 아닌가 싶다. 덕분에 하미과는 원 없이 실컷 배가 터지도록 만발공양을 하였다.

돈황의 사막 위로 해가 지고 노을과 석양이 아름답기만 하다. ‘반달아래 세 별(半月下三星)’이 내 마음인양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중국의 꾸청(顧成)이란 시인은 ‘한 세대 사람’이란 시에서 “어둠은 내게 검은 눈동자를 주었으나, 나는 그것으로 세상을 밝히고 싶다”라고 노래했다. 우리 모두가 그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