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중앙아시아엔 ‘팔상도’ 없다

쿠차 키질석굴 제38굴의 열반도. 4~5세기 경 조성됐다. 우리에게 알려진 팔상도와는 도생의 차이가 있다.

몇 해 전 강의를 들었던 한 학생이 의욕이 충만한 얼굴로 찾아와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팔상도에 관해서 논문을 쓰려고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의 대답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에는 팔상도가 “없다”였다. 학생의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답이었다.

학생이 돌아가고 난 뒤 수업 내용이 학생들에게 잘 전달되지 못했었나하는 자책과 논문을 쓰면서 어떻게 팔상도의 기본개념도 사전에 조사해보지 않았을까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팔상도(八相圖)’는 이미 알고 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윤회의 마지막 생의 생애와 업적 중 중요한 여덟 장면을 그린 것으로, 팔상전(八相殿) 또는 영산전(靈山殿)에 봉안된다.

인도 B.C 2세기 ‘불전도’ 조성돼
출생·성도·열반 등 四相 제작
중앙아시아 석굴 열반도 압도적

韓·中 불전도 〈석씨원류〉 영향
中 205장면 등 장황하게 묘사해
〈월인석보〉 韓팔상도 도상 근거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련된 불경고사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譚, Jataka)이며, 이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본생도이다. 두 번째가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제자나 신도 등의 전생이야기인 본연(本緣, 산스크리트어 avadva, 팔리어 apadna)이다. 세 번째가 석가모니의 생을 다룬 불전(佛傳)이며, 이를 도해한 것이 불전도다.

즉, 팔상도라고 하는 그림은 석가모니께서 카필라성에서 정반왕(淨飯王)의 아들 싯다르타 태자로 태어나시어 열반에 드실 때까지의 많은 일들 중에서 여덟 장면만을 그린 것으로 불전도의 한 부분이다.

인도에서는 이미 기원전 2세기경에 석가모니의 생을 묘사한 불전도가 출생(出生)·성도(成道)·전법륜(轉法輪)·열반(涅槃)의 사상(四相) 혹은 입태(托胎)·출유(出遊)·출가(出家)·항마(降魔)의 네 장면이 스투파의 평두나 탑문 등에 조각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 해당하는 중국 신장성 위구르 자치구의 쿠차(庫車) 키질석굴에는 4~5세기 경 그려진 출유·고행·항마·열반장면이 현존한다. 그밖에도 출가·수도·항마·전법륜 등의 장면이 확인되고 있다. 천산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자연환경을 이용해 조영된 수많은 석굴사원들의 후실에 독립적으로 묘사된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장면이 불전도의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중국의 불전도는 금대(金代)와 원대(元代)의 경우 산서(山西)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명대(明代) 불전도에 큰 영향을 끼친 〈석씨원류(釋氏源流)〉는 영락 20년(1422)에 불교를 쉽게 이해시키고 널리 알리기 위하여 편찬되었다. 〈석씨원류〉는 석가모니의 생애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사의 중요한 고승들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교재로서, 다양한 판화가 삽입되어 있다. 명·청대에 황실과 관련된 숭선사(崇善寺), 구담사(瞿曇寺), 다복사(多福寺) 등의 불전도는 〈석씨원류〉의 영향이 거의 없는 반면에, 민간 화가에 의해 불전도가 그려진 각원사(覺願寺), 융흥사(隆興寺), 극락사(極樂寺) 등의 벽화에서는 〈석씨원류〉를 기본으로 하였다. 또한 명대의 불전도는 48, 84, 200, 205장면 등 석가모니의 입태 이전부터 열반 후 사건까지의 다양한 장면을 사원 내부 벽면에 장황하게 도해하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에서는 명대에 크게 유행한 〈석씨원류〉를 적극 수용하였으며, 이를 기본으로 1459년에 세조의 명으로 고승 10명과 김수온(金守溫) 등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하여 엮은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월인석보(月印釋譜)〉를 편찬하였다. 이후 조선의 불전도는 〈월인석보〉에 수록된 석가모니의 생을 그린 여덟 장면을 모본으로 삼아서 도상이 정형화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팔상전이나 영산전에서 접하는 〈팔상도〉로 고착화되었다.

고양 흥국사에 있는 ‘도솔래의상.’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석씨원류>를 바탕으로 해서 제작됐다.

조선 불화의 특징인 〈팔상도〉 여덟 장면의 종류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도솔천에서 내려오시다): 석가가 탄생을 위하여 도솔천을 떠나 흰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의 모습으로 마야부인의 몸에 입태되는 장면이다.

2.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룸비니동산에 태어나시다): ‘비람(毘藍)’이란 룸비니를 거꾸로 음역한 것이다. 마야부인이 산달을 맞아 친정으로 가던 도중 산기가 있어, 룸비니동산에서 오른손으로 무우수가지를 잡고 오른쪽 옆구리로 싯다르타 태자를 출산하는 장면이다. 태자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은 이야기, 사천왕이 의복을 바친 이야기, 아홉 마리의 용이 태자를 목욕시킨 이야기 등이 〈월인석보〉의 판화와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생로병사를 알게 되다): 태자가 성장하여 성문을 나가 노인과 병자, 죽어 실려 나가는 시체, 승려를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이다.

4.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출가를 하다): 삶의 무상함을 깨달은 태자가 29세 되던 해에 처자와 왕위를 버리고 성을 뛰어넘어 출가하는 장면이다. 화면은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궁인들과 사천왕의 도움으로 성을 넘는 태자, 태자의 출가 소식을 듣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설산에서 수도하다): 흰 눈이 쌓인 설산에서 석가가 수도하는 장면과 마부 차익이 궁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는 장면, 머리를 자르는 석가, 석가의 결심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슬퍼하는 왕과 태자비의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6.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마군을 항복시키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선정에 들겠다는 석가에게 마군은 군대를 불러서 위협하고 마왕의 딸을 보내 유혹하기도 한다. 갈등이 심하지만 수행이 자신과의 투쟁임을 깨닫고 용맹정진하여 마침내 마군의 항복을 받고, 대오각성의 경지에 드는 모습이다.

7.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 녹야원에서 설법하다): 대오각성한 석가모니가 그곳에서 500리쯤 떨어진 녹야원 즉, 사르나트(Sarnath)에서 처음으로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설법하여 그들을 귀의시키는 모습이다. 화면은 적멸도량에서 깨달음을 이룬 직후 노사나불의 모습으로 설법하는 화엄대법과 대중이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하자 화려한 불신을 버리고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진리를 설하는 초전법륜으로 구성된다.

8.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열반에 드시다): 45년간 수많은 중생들에게 법을 전한 석가는 쿠시나가르(Kusinagar)의 사라수 아래에서 열반에 든다. 석가가 열반에 들자 사라수 두 그루가 서로 머리를 숙여 그늘을 만들었다는 장면, 사부대중이 비탄에 잠겨 석가의 열반을 슬퍼하는 장면, 사리분배, 사리 분쟁 장면 등이 화면을 구성한다.

〈월인석보〉와 현존하는 팔상도를 비교해 본 바와 같이 조선의 불전도 ‘팔상도’의 도상적인 근거는 〈월인석보〉라 할 수 있다.

한편, 불전도의 도상학적 근거는 수대(隋代)에 도나굴다(?那素多)가 한역한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이다. 경전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석가모니가 전생에 깨달음을 구하여 도솔천에 태어났다가 다시 마야부인에 잉태되기까지이다. 두 번째 부분은 석가모니의 탄생부터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출가 후 깨달음에 이르러 처음으로 가르침을 펴는 장면이다. 세 번째 부분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석가모니를 묘사하면서 제자들의 생애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의 불전도는 〈석씨원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유사한 발전 과정을 거쳤으나, 중국의 경우는 고정화되지 않은 다양한 화면구성을 가지는 반면에 한국의 경우에는 정해진 여덟 장면을 꾸준히 계승해 왔다는 차이점이 있다.

필자는 불교회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늘 세조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200여 장면이 넘는 불전도의 장면을 단 여덟 장면으로 줄여주셨으니, 조선의 불화를 연구하는 우리는 조상님의 덕을 본 것이라 이야기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