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이해의 길 30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저 뇌의 작용에 불과한 것일까? 오늘날 이러한 비밀을 풀기 위한 연구가 심리학과 철학, 뇌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뇌가 오감(五感)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바탕으로 사물을 인식한다는 사실이다. 같은 대상인데도 개인의 특성이나 경험, 주위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것도 뇌에 축적된 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치과의사는 치아를 먼저 보고, 미용사는 머리 모양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뇌에 쌓인 정보를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어렵다. 이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 왜곡 등이 쉽게 일어난다는 뜻이다. 예컨대 지인의 집에 놀러갔다가 거실에서 강아지가 똥을 누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 자리를 아무리 깨끗이 닦는다고 해도 더럽다고 여길 것이다. 내 마음에 변을 보는 강아지의 모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쉽게 앉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식(唯識)’은 마음에 쌓인 정보를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들의 생생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오직(唯) 마음(識)의 작용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一切唯心造)’는 말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유식은 대승불교 중기에 유행한 사상이다. 주요 경전으로 유식의 핵심을 30개의 게송으로 정리한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과 10명의 논사들이 이 책에 주석을 첨부한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이 있다. 불성과 여래장이 마음을 청정심(淸淨心)으로 해석했다면, 유식에서는 이를 번뇌, 망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음’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도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유식은 온갖 번뇌, 망상과 편견, 착각 등을 일으키는 중생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원인이 분명해야 치유도 쉬운 법이다.

유식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은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겉으로 드러나는 감각기관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을 전(前)5식이라고 하고 이들을 종합하는 의식(意識)이 제6식이다. 그리고 이기심의 원천인 제7 말나식(末那識)과 모든 행위의 저장 창고인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마음의 저 깊은 곳에서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의식적인 인간의 행동은 무의식에 쌓이고 그곳에 저장된 에너지가 다음의 행위에 영향을 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유식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구조를 “현재의 행동이 종자에 쌓이고(現行薰種子) 종자가 현재의 행동을 낳는다(種子生現行)”고 설명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사라지지 않고 종자, 즉 아뢰야식에 저장되었다가 그것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행위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전날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만취한 사람이 집을 잘 찾아오는 것도 종자에 저장된 에너지가 습관적으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수없이 집에 왔던 행위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현실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뿐만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 또한 종자라는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뱀은 징그럽고 돼지는 욕심 많은 동물이라는 생각 역시 종자에 저장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 그저 그렇게 생긴 것뿐인데, 그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이 심하게 왜곡된 것이다. 유식에서는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어야 한다(轉識得智)고 강조한다. 편견(識)이 지혜(智)로 전환되어야 비로소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식에 ‘곰보도 보조개’라는 말이 있다. 누가 봐도 곰보인데,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보조개로 보인다는 뜻이다. 이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를 미워하면서 보조개마저 곰보로 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과 자비는 이때 나오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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