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호칭 중 ‘구세대비존’은
번뇌 벗게 할 ‘자비의 스승’ 의미

깨달음, 중생·세상구제 전제하지만
한국불교는 깨달음에 매몰된 상황
왜 부처님이 돼야 하는지를 망각해

법당 안 금빛 장엄 부처님 보다가
정작 이웃의 아픔 놓치지 않았을까
새해, 중생의 삶 속에서 치열해지자

구세대비자(救世大悲者) 혹은 구세대비존(救世大悲尊)이란 부처님을 부르는 호칭 가운데 하나이다. 부처님에게는 많은 호칭이 있지만, 대개 두 가지 측면에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을 깨닫고 실천하신 분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는 세상의 중생들에게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알려주신 자비의 스승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호칭들이다.

호칭 면에서 보면, 최근의 한국불교는 대체로 전자의 방향, 곧 깨달음에 초점을 둔 불교의 성격이 훨씬 더 강렬했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에 대한 지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깨달음 일변도로 강조하는 것은 부작용을 낳는다. 깨달음은 중생구제, 세상구제의 전제이지만, 깨달음만 성취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결실을 얻지 못하는 그저 헛된 소망에 그칠 뿐이다.

유마거사가 물었다. “무엇이 여래를 낳게 하는 씨앗()입니까?”

문수보살이 답했다. “이 몸이 여래의 씨앗이며, 무명과 생존하고픈 욕망이 씨앗이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씨앗이며, 네 가지 전도(顚倒)와 다섯 가지 번뇌가 씨앗이 되며, 6(六入)이 씨앗이 되며, 일곱 가지 식처(識處)가 씨앗이 되며, 여덟 가지 그릇된 가르침이 씨앗이 되며, 아홉 가지 고뇌가 씨앗이 되며, 십불선도(十不善道)가 모두 씨앗이며, 요점을 취해서 말한다면 62()이나 모든 번뇌가 모두 부처의 씨앗입니다.”

문수보살의 답변 요지는 명료하다. 중생이 받는 모든 고통의 씨앗 때문에 부처가 있다! 중생이 받는 고통의 씨앗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는 중생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는 의미이다.

깨달음도 좋긴 하지만, 왜 깨달음이며, 왜 깨달음이 필요한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한국불교에는 깨달음 지상주의가 횡행한다. 그 깨달음 지상주의의 어디에도 왜 깨달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없으며, 그저 깨닫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깨달음 만능주의가 대세를 이룬다.

왜 출가수행자가 되고, 왜 불교를 공부하는 자가 되며, 왜 불교를 실천하는 불자가 되었는지를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부처님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불자(佛子)라면, 부처님이 왜 부처님이 되고자 했는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

혹시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말이, 혹시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이 부처 되면 만사형통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허공에 씨앗을 뿌려 밭을 간다고 우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민생(民生)을 걱정한다는 수많은 정치인에게 묻고 싶다. 민생이 정치를 낳는 것인지, 정치가 민생을 낳는 것인지. 마찬가지로 수행에 몰두하는 많은 스님들께도 여쭙고 싶다. 지친 중생을 버무려 안고 돌보는 것인 수행인지, 깨달음만 추구하는 것이 수행인지. 마찬가지로 우리 불자들과 필자 스스로에게도 묻고 싶다. 금빛으로 장엄한 부처님만 보느라, 부처님이 결코 놓지 않았던 중생의 아픔은 정작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경자년 새해에는, 깨달음은 멀리 제쳐 두고, 너도 나도 다함께 중생의 괴로움 속에 치열해지는 나날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두가 부처일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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