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재를 시작하며

김호석 화백 作 ‘법정 스님’.

이른 아침, 스승 말씀이 담긴 책들이 꽂힌 책꽂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좁다란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등에 적바림되어있는 ‘법정잠언집’이란 글이 눈에 들어온다. 잠언이라고 적힌 글들을 보면 다 좋은 말이던데 잠언이 뭘 가리키는 말일까 싶었다. 찾아보니 ‘잘못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이르는 말’ 또는 일깨우는 말을 가리키는 말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과 다름없다.

잠언이 지닌 뜻을 헤아리고 나서 이 책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를 펴니 바로 ‘소유한다는 것은’이란 꼭지가 드러난다. 사실 나는 스승이 이토록 간추리고 골라준 말씀보다 본디 쓰신 긴 말씀을 더 좋아한다. 거기에는 그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앞뒤 줄기가 고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펼쳐 들지 않는 책인데 이렇게 펴보니 새롭다. 읽어본다.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가질 때 우리의 정신은 그만큼 부자유해지며 타인에게 시기심과 질투와 대립을 불러 일으킨다. 적게 가질수록 더욱 사랑할 수 있다. 어느 날인가는 적게 가진 그것마저도 다 버리고 갈 우리 처지가 아닌가.

소유한 것을 버리고 모든 속박에서 그대 자신을 해방시키라. 그리고 존재하라.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널리 알려진 ‘무소유’를 간추린 말씀이다. 본디 이 말씀은 이토록 붙여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글이 이어져야 뜻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이렇게 옮겼다.

‘가진 것에 가짐을 당한다’란 말씀이 머리를 때린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려는 까닭이 어디 있을까. 써야 하기 때문이다. 둘러보니 쓰지 않는 것이 참 많구나 싶다. 그러면서도 더욱더 많이 가지려고 기를 쓰다니…. 특히 돈이 그렇다. 돈은 잘 벼려진 연장이지만 그대로 있어서는 아무짝에 쓸데없는 물건이다. 돈 구실을 바꾸는 데 있다. 그런데 요사이는 바꾸는 구실을 하지 않는 돈들이 사람 목숨을 쥐락펴락한다.

돈을 생각한다. 우리는 돈으로 물건을 산다고만 생각한다. 아니다. 돈도 사야 한다. 돈을 쓰려면 기른 사과나 배, 쌀 따위를 팔아 돈을 사야 한다. 곡식이나 채소를 길러보지 않은 나 같은 도시내기도 제 힘으로 빚은 뭔가를 내다 팔아 돈을 사야 수도요금이나 전기요금, 상하수도 쓰는 삯을 치를 수 있다. 힘이 달려 돈을 살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어떻게 돈을 살 수 있을까? 타고난 힘이 있는 이들이 산 돈을 나눠야 한다. 거저 나누라는 말이 아니다. 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본디 땅에는 임자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땅을 차지하고 앉았으니 그 땅에서 나온 것을 땅을 가지지 못한 이와 나눠야 한다. 기업을 하는 이들은 알게 모르게 자연을 무너뜨리고 더럽히면서 돈을 벌고 있다. 그러나 그 피해는 자연을 더럽힌 사람뿐 아니라 힘이 없어 자연을 더럽히지 않은 다른 이에게도 고스란히 돌아간다. 그러니 마땅히 그 값을 치러야 한다.

1855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가 현재 워싱턴 주에 해당하는 땅을, 그곳에 살던 인디언 스와미족의 추장 시아틀에게 미국 정부에 팔라고 강요했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시아틀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팔 수 있습니까? 그와 같은 생각이 우리들에게는 매우 낯섭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선한 공기와 물의 거품조차 소유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구석구석은 나의 백성들에게는 신성한 것입니다. 저 빛나는 솔잎이며 모래톱이 있는 해변이며 어둠침침한 숲속의 안개며 노래하는 곤충들이 모두 내 백성들의 기억과 경험 안에서 성스럽습니다.

백인들이 우리의 사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 조각의 땅은 그 곁에 있는 땅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밤중에 와서 그 땅으로부터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약탈해가는 타인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그들에게 있어서 형제가 아니라 적입니다. 그 땅을 정복한 다음에도 그들은 전진을 계속합니다. 게걸스러운 그들의 식욕으로 그 땅을 먹고 나면 그 뒤에는 오로지 사막만이 남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하나의 조건을 내놓겠습니다. 짐승들이 없는 곳에서 인간은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숲속의 모든 짐승들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커다란 정신적인 외로움 때문에 죽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인간에게도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은 여러분과 같은 신입니다. 그의 연민은 백인과 인디언들에게 한결같습니다. 이 땅은 그분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땅을 해롭게 하는 것은 그분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백인들 또한 소멸될 것입니다. 당신의 잠자리를 계속해서 오염시키면 당신은 언젠가 당신 자신의 쓰레기 안에서 숨이 막히게 될 것입니다…….

인디언 추장의 이 편지는 130여 년 전 그 시절의 미국 대통령만이 아니라, 자연을 말할 수 없이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보내온 묵시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텅 빈 충만〉 ‘인간과 자연’에서 스승이 던진 말씀이다. 북극에 있는 얼음이 무너져 내리고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지구별은 커다랗게 앓는 소리를 내며 죽어가고 있다. “쓰레기더미 안에서 숨이 막힐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들어맞다니 끔찍하다.

스승은 사람은 틈날 때마다 누구나 우주가 준 선물을 나누는 관리인일 뿐이라고 말씀했다. 나누라고 맡겨진 일을 게을리하거나 나 몰라라 하는 걸 넘어서 개발이라는 구실을 붙여 어머니인 땅을 더럽히고 무너뜨리며 끊임없이 못살게 구는 이들이 하도 많다 보니 하신 드잡이다.

아마존이 불타고 있다. 지구별에 사는 우리가 마시는 산소 20%를 샘솟게 하는 ‘허파’ 브라질 아마존 밀림이 거듭 불타고 있다. 아마존에 거듭 불이 나는 까닭이 어디 있을까? 아마존환경연구소에 따르면 건조한 기후 때문이 아니다. 기업농들이 나무를 베고 숲을 태우고 나서 불길이 지난 자리에 커다란 풀밭과 콩밭을 만들어 소를 키우려고 하기 때문이란다. 2019년에 유독 아마존 화재가 많은 까닭은 2019년 1월 정권을 잡은 극우파 보우소나루 정부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문제는 그 뒤에 금융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데 있다. 브라질원주민협회(APIB) 대표 ‘소냐 과자자라Snia Guajajara’는 ‘아마존 파괴에 앞장서는 기업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가장 나쁜 은행 목록’을 들춰내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이름을 올린 은행은 블랙락(BlackRock), 뱅가드(Vanguard), JP모건 체이스, 스페인 산탠더(Santander), 프랑스 BNP 파리바스, HSBC은행이다. 이번 화재로 아마존 생태계 20%가 망가졌단다. 무너져 내리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열대우림이자 커다란 허파만은 아니다. 지구온난화를 늦출 버팀목 가운데 하나인 아마존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원주민 목숨과 보금자리도 모질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환경 위기와 인권 위기’가 한꺼번에 몰아치고 있다는 얘기다. 영리한 바이러스는 임자몸(숙주)을 죽이지 않는다는데…, 스승 말씀처럼 가진 것에 가짐을 당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알람이 하나 뜬다. “화력발전소 멈추니 당진 배추밭엔 석탄재가 사라졌다”는 기사 알림이다. 충남에는 우리나라에 있는 석탄화력발전소 60기 가운데 절반인 30기가 빼곡하다. “작년에는요, 석탄재가 배춧속까지 파고 들었잖유. 수도권에 전기 대느라고 여기 당진 사람들이 고생 많았슈.” 당진화력발전소를 마주 보며 이인수 당진시 에너지 센터장이 한 말이다. 당진발전소가 멈춘 것은 지난 10월 국가기후환경회의가 겨울(12~2월)엔 9기에서 14기, 봄(3월)엔 22~27기를 멈추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덕분이다. 이 기사를 쓴 24일에는 8기가 멈춰있단다.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해야 하나?

기업은 말할 것도 없이, 이곳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쓰는 수도권 사람 모두가 이곳 사람들에게 멍에를 지우고 있다는 말씀이다. 석탄화력발전소가 다 없어질 때까지 거듭 빚지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억지로 떠넘긴 것도 아니고 내라고 하는 돈을 내고 쓰는 것인데 어째서 우리를 나무라느냐고 하실 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생각 거리가 있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거나 무엇을 사서 쓰면서 값을 치르고 있다고 여긴다. 참으로 제대로 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새겨볼 일이다. 잘못된 돈 노름을 멈추라! 그 돈 물꼬를 틀라! 지구 어머니 숨통을 막는 짓을 그만두고 그 돈으로 선량한 보통 사람이나 서툴고 여린 사람을 보듬어야 한다. 이 노릇을 새기라는 우레가 바로 ‘무소유’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무소유를 가리켜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 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하셨다. 무소유를 소유하다? 본래무일물, ‘가질 수 없다는 뜻’을 새기라는 말씀이다.

변택주 작가는

길상사서 펼쳐진 법정 스님 법석 사회를 12년간 보며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에 들어가 세상과 자연과의 어울림을 배웠다. 법정 스님으로부터 지광(智光)이라는 법명을 받은 그는 ‘배운 것을 세상에 돌리지 않으면 제구실 하지 않는 것’이라 한 스님 말씀에 따라 꼬마평화도서관 건립을 위해 전국 곳곳을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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