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한그릇에 자비 온도 36.5°

배식 전 팥죽을 쑤며 쪽방촌 도우미들이 손하트를 하고 있다. 추운 겨울이지만 따뜻한 죽의 온도 만큼 이들의 자비심은 따뜻했다.

“이야, 이제야 물이 깨끗해졌네. 이제 잘 삶아질 겁니다. 드디어 따뜻한 죽 한그릇 대접하겠네요.”

체감온도가 영하 3도까지 내려간 구랍 18일 오후 4시, 영등포역 6번 출구 쪽방촌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세워진 무료급식소에서는 큰 통을 채운 얼음장 같은 물에 손을 연신 넣어 팥을 씻는 봉사자들이 있었다. 손이 시려울 만도 하지만 주방용 고무장갑 하나 끼고 검게 나오는 물을 계속 비워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고스란이 모여주는 쪽방촌 골목에는 불자인 쪽방촌도우미봉사회 사람들이 삶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매주 한끼 식사를 대접한다. 쪽방도우미봉사회는 김윤석 경위가 2001년 박부득 봉사팀장과 함께 조계사 붓다맘봉사회를 비롯한 불자 봉사자들을 모아 영등포 쪽방촌을 돕기 위해 구성한 단체다. 이들은 보통 목요일이면 국수를 마련해 쪽방촌 주민들에게 점심공양을 올린다.

이틀 전부터 식재료 다듬어
새벽잠 줄여가며 준비 박차
한끼 음식에 정성담아 보시

평소 만드는 국수는 새벽부터 준비가 시작되지만 이번 공양은 배식일 전날부터 수고가 더해졌다. 바로 준비되는 음식이 국수가 아니라 팥죽이기 때문이었다.

멸치육수를 우려내 소면을 삶아 완성하는 국수와 달리 팥죽은 조금 더 많은 손길이 가는 음식이다. 이틀간의 대작전 끝에 나오는 것이 팥죽이다. 먼저 배식전날 밀가루 반죽을 하여 새알을 빚는다. 숙성될 시간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주재료인 팥을 씻고 삶아 방앗간에서 빻은 뒤 죽을 쑨다. 팥의 경우 잘 쉬는 재료로 빻은 뒤에는 쉬기 시작하기 때문에 미리 물에 씻어 불리지만 보통 배식 당일 새벽에 방앗간에서 빻는다.

그렇게 때문에 배식 전날부터 봉사자 10여 명은 배식소에 모였다. 홍두깨를 들고 밀가루 반죽을 하는 남성 봉사자들부터 반찬을 만들고 옹심이를 만드는 여성 봉사자까지 옹기종기 모여 준비하는 모습에서는 예전 시골 마을의 모습이 비쳐졌다.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었던 정이 이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배식소 바깥에서 새알을 가지런히 정리하던 김재금 씨는 “조계사에서부터 함께 오래 같이해 낯이 익다. 다들 아침부터 나오지만 힘든 것 모르고 매주 모이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 김씨는 본인도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오지만 20년 넘게 봉사팀을 이끈 김부득 팀장의 경우 새벽에 인천 집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뭐 음식 하나 만들어 보시하는게 대수냐”며 말을 아꼈다. 어떻게 어떻게 하고 누구는 여기서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모습이 마을 반장 같았다.

10여 명의 봉사자들이 도란도란 웃으며 대화를 나누며 새알을 빚다보니 어느새 700명 분의 팥죽 옹심이가 완성됐다. 빨간 바구니에 담긴 하얀 새알 옹심이들이 나란히 반짝였다.

새벽에 방앗간에서 팥을 빻는 모습.

새벽 5시, 방앗간에서 시작된 하루

여성봉사자들의 수고가 전날부터 이어졌다면 김윤석 경위를 비롯한 남성 봉사자들은 배식일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19일 새벽 5시 영등포 청과시장에 위치한 방앗간에서부터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됐다.

무료급식소에서 삶아진 팥은 바로 큰 말통에 담겨 방앗간에 도착했다. 1톤 탑차에서 팥이 담긴 통을 나르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방앗간 주인까지 장정 서너명이 함께 힘을 모아 통들을 내리고 나면 등줄기에 땀이 흥건했다. 쿵쿵거리는 방앗간 기계가 돌아가는 중에 막간에 쉬는 틈이 생겼다.

김 경위는 “무거운 것을 나를 일손이 필요하면 이 곳 저 곳 도와줄 곳에 연락을 넣는다. 본인들 일정도 바쁘겠지만 잠시나마 도와주러 나오는 이들이 있어 일이 돌아간다”고 전했다.

방앗간에 곱게 빻여져 나온 팥을 다시 탑차에 실어 무료배식소에 도착한 시간은 8시. 보통의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시간이지만 이때부터 배식소는 바빠진다.

기다렸던 봉사자들이 팥을 삶았던 솥에 다시 불을 당기고 밑반찬 준비도 빠르게 진행된다. 서서히 죽을 쑤기 시작해 걸죽하게 팥죽이 완성되면 어느덧 배식시간인 12시가 되어 간다. 팥죽이 거의 완성되면 전날 빚어 논 새알옹심이가 솥 속에 투입된다.

다들 10여 년 넘게 호흡을 맞춰서 인지 솥을 책임지는 남성 봉사자들부터 주방에서 재료를 다듬는 여성 봉사자들까지 손발이 척척 맞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이 고소한 냄새를 내기 시작할 때면 무료배식소 바깥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다. 아예 집에서 쓰는 그릇을 챙겨온 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김 경위는 “보통 두 그릇 이상씩 잡숫고 가신다. 국수의 경우 많이들 드시기 때문에 그릇도 아예 큰 걸로 준비한다. 이분들 사이에도 거동이 힘든 분들이 있는데, 대신 나와서 전달해주는 분들도 있다.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서로 보듬어 안는 정이 살아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배식 전날 봉사자들이 팥을 씻으며 불리고 있다.

소박한 희망, 새해를 열다

“어서 많이들 드세요. 넉넉하게 준비했으니 천천히 체하지 않게 드세요.”

이윽고 배식시간인 12시가 다가오고 첫 팥죽을 이들에게 전하며 봉사자가 건넨 말 한마디에는 쪽방촌 사람들을 위한 이들의 모든 노력이 응축돼 있었다.

연말연시 선물을 사기 위해 인근 대형쇼핑몰에 줄을 선 모습과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이 5분 거리를 두고 우리 사회에도 상반된 모습이 같은 동네에도 공존함을 느끼게 했다.

이들의 새해 희망은 소박했다. 몸을 크게 다쳐 일할 수 없게 되어 쪽방촌에 왔다는 김OO 씨는 “새해에는 몸이 건강해져서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력시장에서도 몸이 불편하면 일거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며 어려움을 호소한 김 씨는 “작은 일이라도 정기적으로 할수 있는 일이 많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황OO 씨는 “새해에는 날씨만 조금 좋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배식까지의 모든 일정에는 탤런트 윤서현 씨 등이 참여했다. 그동안 후원자로만 있었던 윤 씨는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봉사자로 동참했다.

윤 씨는 “평소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이웃이 많다고만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나와 보게 되니 저는 그동안 편하게 살았구나를 느끼게 된다. 앞으로 조금 더 주변을 보살피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직접 나와서 돕다보니 체감이 많이 된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조금 더 따뜻한 마음을 내는 계기가 만들어 졌으면 한다”고 미소 지었다.

옆에서 듣던 김윤석 경위도 한마디 거들었다. 김 경위는 “쪽방촌도 최근에는 매년 봉사자들이 나이를 먹고 젊은 봉사자들이 줄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대가도 못 드리는데 이렇게 나와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 경위는 이어 “여러 사람들의 노력 끝에 지난해 무허가 건물이라고 철거까지 진행되던 배식소가 벌금을 내는 수준에서 그쳐 참 다행”이라며 “새해에는 불자들 사이에서도 봉사가 수행이고,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일이라는 마음에 모두들 주변을 돌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죽을 담은 그릇이 쉴새없이 오가는 동안 어느덧 오후 2시가 가까워졌다. 배식소 앞에 길게 섰던 줄도 사라졌다. 따듯한 죽 한그릇 먹고 다시 힘을 얻어 돌아가는 이들을 보며 배식소 봉사자들의 마음에는 새해를 맞는 또 다른 힘이 생겨나고 있었다.

쪽방촌 주민들에게 직접 배식하는 김윤석 경위(사진 오른쪽)
배식 전부터 길게 줄을 선 쪽방촌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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