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죽음 앞 ‘지금-여기’ 응시

탄생한 모든 것에 적용되는 죽음
경험할 수 없기에 괴로움이 된다
육체의 소멸일 뿐 그 이상 없어
미리 죽음을 생각해 글을 써보자

죽음 앞에서 지금-여기응시하기는 당신의 생애 끝에서 지금 이 순간을 조망해보는 글쓰기다. 탄생이 있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끝지점. 한 시간 후가 될지, 1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모를 당신의 생애 끝 의식으로 지금-여기의 삶을 굽어보자는 제안이다.

당신에게 죽음은 무엇일까. 모든 생명에게 죽음은 생애 가장 크고 특별한 사건이다. 스스로 경험해보지 않았음은 물론 타인의 경험 또한 신뢰하기 어려운 이다. 나의 죽음은 상황도 아니고 상태도 아니며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완전한 소멸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당신이 확인할 수 없는 추측이다. 삶의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는 지칭 또한 무의미해진다. 죽음의 순간, 당신은 죽음의 주체인 듯하면서 주체가 아니고 객체인 듯하면서 객체도 아니다. 죽음의 순간 당신은 사람도 아니고, 사람 아닌 것도 아니다.

죽음은 살아생전에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괴로움의 대상이다. 삶이 삶일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을 아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죽음은 당신이라는 생명의 중단을 입증해 줄 아는 마음조차 소실된 상태이다. 당신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는 있어도 정작 그 순간에는 스스로 알 수 없다. 스스로 알 수 없음은 경험의 생략이고, 경험 없음은 있지 않은일이다. 당신의 죽음은 뒤집힌 접시물과 같아서 이승에 남아서 당신의 주검을 씻고 닦는 자의 몫이다. 당신은 당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다.

살아있는 당신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일까 아니면, 외면하고 싶은 그 무엇인가. 두려우니까 외면하고, 외면하다보니 두려워지는 걸까.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한다면 그 이유는 뭘까. 아직 애착 대상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못다 한 사랑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거나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 가보고 싶은 곳, 누리고 싶은 세상뿐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생명 전체를 끊어낸 그 무엇이다. 생애 마지막 호흡에 이른 순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당신에게 충분히 예고됐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친지의 죽음은 곧 나의 한 부분이 죽은 것이다. 내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이며 현재 삶에 대한 반성이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의 매듭이기 때문에 엄숙할 수밖에 없다. 삶에는 한두 차례 시행착오가 용납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는 그럴만한 시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잘 죽는 일은 잘 사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 본생경

붓다는, 죽음은 두려움이나 외면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은 육체의 소멸일 뿐 마음의 사멸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죽음은 재생연결식으로 가는 다음 생의 시작 지점이다. 그것은 밤에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는 과정을 닮았다.

실제적 측면에서 죽음은 타인의 죽음을 통한 간접 경험일 뿐이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만 놓인 존재이다. 당신은 이미 이 사실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어렴풋이 눈치 챈 끝없는 과정은 당신 의식 깊은 곳, 어두운 심해(深海)의식이다. 물론 누구나 깊고 지극한 수행을 통해 심해의식을 만날 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의식은 대체로 표피적이다. 당신의 표면의식은 몇 미리미터(mm) 두께도 안 되는 피부가 육신을 감싸고 있듯 당신이라는 존재 전반을 가까스로 감싸고 있다. 바람과 햇빛 따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피부처럼 당신의 표면 의식은 판단과 분별거리 앞에서 수선스럽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판단과 분별심에 포착되는 세상은 당신의 다양한 신경다발에 연결되어 온갖 심인성 질환을 만들어내곤 한다.

당신은 판단과 분별의 울타리 안에서 웅숭그리고 앉아 질병이나 돌발 사고를 앞세우고 밀려오는 죽음의 기미 앞에서 오그라든다. 당신의 표면의식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 앞에서 종잡을 수 없이 휘둘리곤 한다.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배면에 어슬렁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내쫒지도 못하고 씻어내지도 못하는 체념의 다른 형식이 두려움이나 외면이다.

당신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늘 현재형이라는 사실. 처음부터 죽음의 그림자를 스스로 휘감고 온 존재라는 사실. 죽음의 그림자는 수시로 그것의 존재성을 체험하게 해준다는 사실. 죽음의 그림자는 한 호흡 지간, 한 걸음, 건널목 건너는 순간, 밥 한 숟가락 삼키는 순간, 저녁 잠에 드는 그 순간에도 긴 흔적을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

당신이 지금 이 순간 죽음을 직시한다면 삶은 어떤 모습이 될까. 죽음 앞에서 지금-여기응시하기는 그 해답을 구하는 글쓰기다.

- 자신의 죽음 앞에서 낭독할 추도사쓰기.

- 자신의 묘비명을 10, 20, 50자로 정리해본다.

- 자신의 장기 기증서, 지갑용 유서, 묘지설계도 등을 작성한다.

- 죽음의 순간으로 가서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주고 싶은 말 글쓰기.

- 내 죽음의 순간, 주변의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말 적기.

- 죽음을 한 시간 앞두었을 때, 내가 취할 태도 적어보기.

죽음은 당신이 평생 엮어온 인연과 재산과 자연과 시간을 한 순간에 공()으로 돌린다. 죽음을 주제로 글 쓰는 일은 허공을 배경으로 글 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뜻한 피, 밝은 눈, 단단한 근육, 민감한 혀, 촉촉한 입술. 생명의 활력 속에서 죽음을 상정하는 일은 가당찮아 보인다. 귀에 들리는 소리, 혀를 적시는 침의 느낌, 피부의 여러 감각들을 일시에 떨궈내는 일은 상상조차도 간단치 않다. 살아온 나날 속에서 타인의 추도사를 들었거나 읽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어떤가.

여기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분이 하늘의 부름을 받아 이제 먼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당신이 이와 유사한 문구를 기억할 수 있다면 자신의 죽음에 바치는 여러 방식의 글쓰기 영감은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이다. 잠시 몸과 마음을 멈추고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라. 자신의 생과 사를 기록하는 묘비명, 장기기증서, 묘지 설계도를 적어가는 동안 당신의 지금-여기가 홀연하고 선명하게 일어설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글쓰기명상과 자기상담은 세상에 알려진 여러 명상법에 대한 이의제기다. 명상이 이렇게 추상적이어서야 원! 명상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원! 명상이 이렇게 예사롭지 않아서야 원! 툴툴 대면서 찾아 나선 결과다. 전통적인 좌선이나 행선, 염불선, 사경 등의 방식으로는 명상 세상이 더 환하게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조바심의 결실이다.

배운 게 문자이고 못 배운 게 좌선이나 경행인 극초보 수행자를 위한 수행 접근은 없을까. 혹시 글쓰기를 통해서 본격 수행으로 가는 계단을 밟게 할 수 있지 않을까. , 사람들은 지고지순한 진리의 말씀보다 본인에게 익숙하고, 쉽고, 간편하고, 평범하고, 재밌고, 가벼운 것에게 마음이 먼저 가는 것일까.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모바일 폰에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표현하기를 더 좋아할까.

삼삼오오 모인 자리를 눈여겨보면 답이 보인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지우고 들어보라. 그들의 표정이 보이고 몸짓이 보이고 마음이 보인다. 물고기가 동료의 꼬리치는 모습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꼬리를 흔들며 물결을 거슬러가기 위해 떼 지어 모인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언어를 토해낼 때 가장 힘차다.

그들은 말하는 존재, 드러내는 존재, 침묵 깨기를 좋아하는 존재다. 그들은 침묵하는 존재, 은인자중하는 존재, 우주의 거대 질서를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전철에서 시끄럽게 통화하고, 3~4일씩 야근하면서 인생의 폭폭함을 체득하고, 침묵이 버거운 사람들이다. 나의 고민은 이 지점에서 오래 머물렀다. 쉽고 가볍고 통상적인 이웃의 손을 잡고 수행의 길을 가는 것이 나에게 떨어진 몫이 아닐까. ‘문자라는 보편적 도구로 말하고, 드러내고, 질서와 무질서를 넘나드는이들과 함께 수선떨며 가는 것이 내 몫 아닐까, 생각했다.

글쓰기명상과 자기상담은 타인과의 소통 열풍을 자신과의 소통으로 전환하는 심리공사(心理工事)이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이 지면에 열성을 녹여 넣었다. 그동안에도 대한민국은 손바닥만한 소통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글쓰기 열풍에 휩싸여 있다. 생각만으로도 등판이 따뜻해질 만큼 놀랍고 유쾌한 일이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바람이 생겼다. 타인과의 소통 언어 대부분이 자신의 내면 드러내기임을 당사자가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 그 차이만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글쓰기명상과 자기상담35개의 주제를 다뤘다. 이 주제는 세상의 많은 관심거리 중 100분의 1도 되지 않지만, 그나마도 심리적인 어려움을 거드는 데 도움 될 만한 주제를 골랐다. 35가지 주제 글쓰기를 하면서 자신의 기억이나 생각을 잘 드러나게 하는 데 초점 맞춰 설명을 달았다. 누구나 썰매 타듯이 글로써 자신의 내면을 잘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얹혔다.

글쓰기명상의 대원칙 하나는 자신이 쓴 글을 아무하고도 나눠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나누는 게 좋지만 나누지 않는 것이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글을 타인과 나누지 않을 확실한 방법은 즉시 파기나 소멸시키는 것이다. 굳이 나누지 않는 이유는 뭘까? 솔직해지기 위해서다. 나는 암만 생각해도 자신한테조차 솔직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나눔이 전제된다면 그 버릇이 도질 것 같다.

두 번째는 글쓰기명상과 자기상담을 통한 반성의 근육 기르기이다.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스스로 확인할 겨를 없이 사라지곤 한다. 심지어, 방금 내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 반면, 내가 손으로 제작한 문자는 여기에 오래 머문다. 재확인이 가능해서 되돌아볼 수 있다. 나는 이 놀랍고 신비한 문명의 기술을 활용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이 기분을 나누고 싶었다. 당신의 성찰 게임. 글쓰기명상이 그것을 즐기는 데 도움 되기를 기원한다. 글쓰기명상을 명상의 가로와 세로 길이가 확장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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