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 고려대장경 조성 핵심적 역할

정안이 일연 남해 판각현장 초청
남해 정림사·길상암서 12년 주석
일연과 가지산문 문도 판각 동참
감수·인경·제책·보판 등 담당

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회장 김정렬)는 11월 8일 남해 유배문학관 다목적 강당서 ‘대장경과 일연 그리고 남해’를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학술심포지엄에서는 김봉윤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이 ‘고려대장경 판각과 일연선사’를 발표하고 일연 선사의 행장을 통해 고려 대장경조성사업의 연관관계를 조명했다. 본지는 학술심포지엄서 발표된 김봉윤 위원의 논문을 발췌·게재한다. <편집자 주〉

김봉윤 위원은… 1963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마산고와 동국대서 수학했으며, 해동불교신문과 남해신문에서 일했다. 그 후 여론조사기관과 정치광고기획사를 운영하였고, 남해군청과 산림청에서 비서관으로 근무했다. 현재 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과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남해안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지역사 연구와 고려대장경 판각지 복원을 위한 일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불교로 가는 길〉과 〈팔만대장경과 남해〉가 있다.

일연 선사와 남해
일연 선사(1206~1289)는 경북 장산(경산)에서 출생해 9세에 해양(광주)의 무량사로 가서 수학하다가 14세에 강원도 양양 진전사로 출가해 21세까지 머물렀으며, 22세에서 43세까지 포산(비슬산)의 보당암과 묘문암, 무주암에서 수행한 후 44세부터 56세까지 남해 정림사와 길상암에 주석했다. 56세에 남해를 떠나 강화 선월사, 영일 오어사, 달성 인흥사, 청도 운문사 등에 머물다 78세에 국사(國師)에 책봉되었으며, 79세에 군위 인각사에 주석하다가 그곳에서 84세에 입적했다.

일연 선사는 21년간 비슬산에서 수행, 득도한 후 연이어 12년을 남해에서 활동한다. 이후 강화와 개성 등지에도 잠시 머물지만 대부분 경북 일대에서 수행한다.

어린 시절 수학과 출가 직후 진전사에서의 수행기간을 빼고는 경북 일대에만 머문 일연 선사가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남해에 주석한 사정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주목해야 할 점은 비문의 기록에서 보듯이 당대의 권력실세 중의 한 사람인 정안이 대장경 판각현장으로 초청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생애 중 남해시절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 바로 대장경 조성사업과 〈중편조동오위〉의 편찬에 있다.

한민족 문화의 원류를 밝히는 최고의 사서로 추앙받는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인각사보각국사비문’을 비롯한 어디에도 일연의 저작이라는 기록이 없으며 제5권 신주편의 첫머리에 ‘국존조계종가지산하인각사주지원경충조대선사일연찬(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徑녑照大禪師一然撰)’이라는 구절이 있어 일연이 편찬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보각국사비문’에는 선사가 100여 권의 저술이 있다고 전하나 실전되어 남아있는 것은 한 권도 없다. 유일하게 일본에서 재간한 〈중편조동오위〉가 발견되어 대사상가 일연의 면모를 좀 더 가깝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일연 저술 〈중편조동오위〉
〈중편조동오위〉는 일연이 1256년 남해 길상암에서 썼지만 원본이 실전되었고 일본에서 재간한 책의 서문에 편수자의 이름이 회연으로 적혀있어 일연의 저작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다.

‘보각국사비문’에 “국존(國尊)의 휘는 견명(見明)이요, 자는 회연(晦然)이었으나, 뒤에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고 역명(易名)을 밝혀 놓았다. 일연이 남해에 주석하고 있을 때 남해를 ‘윤산’으로, 일연을 ‘회연’으로 불렀다.

〈중편조동오위〉는 혜하가 편집하고, 광휘가 해석을 붙인 〈중집동산편정오위조산간어〉를 보법선사 노겸이 소산(疏山)·말산(末山) 2가(家)의 어결(語訣)을 합편하여 중간하였다. 오자와 탈자가 많아 일연이 재차 간행한 것으로 책명만 전하였다.

〈중편조동오위〉는 1260년 남해에서 출판되어 다음해 일연선사와 함께 강화경(江華京)으로 갔을
것이다. 그 후 〈중편조동오위〉를 포함한 일연 선사의 모든 저술은 사라져 버렸다. 비문의 목록으로만 남아있던 이 서책이 7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뒤 교토대학 도서관에서 〈조동오위현결〉이라는 3권의 책으로 발견됐다.

이 책은 견성사(見性寺) 연용(淵龍)의 발미(跋尾)가 있는 1680년 일본 간본으로 원본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일본에서 재간되어 일본 조동종의 사상서로 유통되었으나 편수자가 옛 이름인 회연으로 되어있어 일연의 저술임을 몰랐던 것이다.

일본에서 이 책을 구입한 제주도 정방사 혜일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 다이쇼대학 유학시절인 1988년 도쿄의 한 고서점에 들렀는데 이 고서점의 주인이 한국 스님의 책이라며 소개했다고 한다.

책의 서문에 “파도가 해동에 미쳤다(波及海東), 그러나 신라에는(然有新羅), 청구에 행한 분들로(行于靑丘者)”라는 구절이 있다. 해동, 신라, 청구 등 우리나라를 뜻하는 내용이 있어 회연이라는 편수자가 한국스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혜일 스님은 1992년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서울로 가져왔으며 1997년 고향인 제주도로 오면서 〈중편조동오위〉도 함께 오게 되었다.

현재 이 책을 관리하고 있는 제주 반야사 수상 스님은 문화재로 지정받으려 노력했으나 외국에서 출판된 서적이라 지정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간행되었지만 희귀본이고 일연선사의 저술이며 국내 유일본인 이 책의 보존관리를 위해서 조속히 문화재로 지정되기를 바란다.

남해 판각 〈중편조동오위〉
〈중편조동오위〉는 ‘보각국사비문’에 기록된 저술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책으로, 서문을 보면 이 책의 집필과 출판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감동적인 일연의 육필로 만날 수 있다.

서문을 살펴보면 일연 선사는 평소에 마음먹고 있었지만 어려운 세상을 만나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1256년 여름 윤산 길상암에 머물며 한가로운 여가가 있어서 구본을 정리해 두 권의 책으로 집필하였다. 동료 승려가 원고가 없어질까 걱정하여 나무에 새기자는 간곡한 청이 있어 판각하였으며, 1260년 책을 출판하면서 12월 8일에 봉소헌에서 서문을 썼다.

〈중편조동오위〉는 일연이 서문을 쓴 1260년에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연이 남해 정림사에 초청받아 대장경 간행의 막바지 작업에 관여하였으므로 〈중편조동오위〉는 남해분사도감에서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이 때 “대장경 조성은 마무리되었으나 조판시설을 이용한 보유판 판각은 계속되고 있었다”는 주장에서와 같이 일연이 남해에 있던 시기이면서 대장경 조성이 끝난 이후인 1254년에 남해분사도감에서 〈종문척영집〉 〈중첨족본선원청규〉 〈주심부〉 등의 서적을 판각했다.

1260년 분사남해대장도감의 판각 기능을 이용하여 〈중편조동오위〉를 판각하였다는 것은 대장경 판각이 끝난 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남해에서 판각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일연 문도 대장경 판각 참여
대장경 판각사업에 개태사의 승통(僧統) 수기(守其)가 교감책임자로 참여하고 대사(大師)와 같이 승계가 높은 승려들을 포함한 비구(比丘), 사미(沙彌), 산인(山人), 화상(和尙), 도인(道人) 등 승려들의 명칭이 경판에 판각되어 있다. 국가적인 대사업에 화엄종의 균여계열과 의천계열, 수선사계통의 선종, 천태종의 백련사계열, 남해의 정림사와 가지산문의 일연계열을 비롯한 지방 군소사원의 승려들까지 포괄되는 불교계 전반이 체계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일연선사가 판각사업의 추진 시기에 정안의 원찰인 정림사에 주석하고 있었던 점과 ‘보각국사비문’에 나오는 인흥사의 선린(禪麟)이 스승인 일연을 따라 남해분사도감에서 판하본 경전을 필사한 인물로 추정된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일연과 가지산문의 문도들이 판각사업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인각사보각국사비문’의 뒷면에 대선사(大禪師), 선사(禪師), 수좌(首座), 산림(山林), 삼중(三重), 대선(大選), 입선(入選), 참학(參學) 등 법계(法階)순으로 새겨진 일연선사의 문도들과 대장경 경판에 새겨진 각수명단을 대조한 결과 혜여惠如), 조남(祖南), 유장(由莊), 인정(仁正), 양지(良之), 도한(道閑), 지현(智玄), 가홍(可弘), 효대(孝大), 득심(得心), 법기(法奇), 현조(玄照) 등 12명의 승려가 대장경 판각에 각수로 참여하였다.

비문의 음기에는 “항상 국존을 따르고 친부(親附)하여 가르침을 얻거나 골수(骨髓)를 얻었거나, 불법을 도운 모든 스님과, 실무를 담당하였던 제자, 아울러 스님의 법유(法乳)를 받은 경(卿)과 사대부 등의 이름을 갖추어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며 164명의 승려들과 39명의 관직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대장경을 판각하던 동시대를 살았던 승려로 대장경 판각지 남해에서 12년을 주석한 일연 선사의 비문에 이름을 올린 문도들이 상당수 대장경 판각사업에 각수로 직접 참여하였음이 확인됨으로써 정안이 일연을 남해로 초대한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대부분의 각수가 1243년부터 1245년 사이에 판각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장도감판과 분사대장도감판을 함께 판각하였다. 효대는 1238년부터 1248년까지 11년간 306장의 경판을 판각했으며, 득심이 87장, 혜여가 86장, 도한이 61장을 판각하는 등 12명의 일연 문도가 590장의 경판을 판각했다.

일연 선사는 대장경 조성의 마무리 시점에 판각의 현장인 남해로 와서 판각한 경판의 감수, 인경, 제책, 대장경에 빠진 경전의 입장, 보판작업의 진행 등 고려대장경 조성사업에 핵심적 소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후기의 뛰어난 학승이자 선승, 걸출한 사상가 일연이 남해에서 12년간이나 머물렀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 고려대장경 판각의 비밀이 조금씩 벗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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