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것들과 마주하는 곳 … 잊힌 선지식의 공부 궁금해
깊어가는 것들과 마주하는 곳 … 잊힌 선지식의 공부 궁금해
  • 글·사진=박재완 기자
  • 승인 2019.11.0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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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충북 제천시 보덕암(寶德庵)

 

 

수미산에도 가을이 있을까. 단풍과 낙엽, 높아진 하늘, 깊어진 바람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이 사바의 가을만 할까. 이 고단하고 지난한 삶에서 한 번 쯤 하늘을 보게 되는 시간, 번개처럼 지나가는 이 짧은 계절만 할까. 수미산 끄트머리, 사바는 지금 가을이라는 시절에 물들어간다. 문 밖의 모든 것들이 깊어간다. 하늘이 깊어가고 숲이 깊어가고 바람도 깊어간다. 이제 우리가 깊어가야 할 시간이다. 이 짧은 시절에 우리는 하늘보다, 숲보다, 바람보다 깊어져야 한다. 말마다 글마다 걸음마다, 무엇을 바라보든 무엇보다 우리의 두 눈이 더 깊어야 한다.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보다 우리의 가슴이 더 무거워야 한다. 이 가벼운 삶에서 이 짧은 시절은 얼마나 무거운 시간인가. 그리고 또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 한 시절만이라도 우리가 단풍보다는 붉어야 하지 않을까. 저 푸른 하늘보다는 깊어야 하지 않을까. 저 헐거움을 누리고 있는 숲보다는 더 많이 뒤돌아봐야하지 않을까. 나누는 말마다, 적고 싶은 글마다, 걷고 있는 걸음마다 ‘나’ 있는 곳에 한 번 쯤 다녀와야 하지 않을까. 저 깊어가는 것들과 함께 더욱 깊어가야 하지 않을까. 깊어가는 것들과 조용히 마주할 수 있는 곳, 보덕암으로 간다. 수미산에도 없는 가을과 마주하기 위해 월악산으로 간다.

산은 산, 물은 물
울긋불긋한 산봉우리들이 여름내 지었던 숲을 허물고,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충주호가 가을햇살에 빛나고 있다. 물은 늘 빈 곳을 채우고, 산은 늘 계절을 품고 있다. 산은 산, 물은 물이다. 선사의 안목을 떠올리며 월악산(해발 1,095m)을 오른다.

보덕암은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으로 가는 길목(해발 500m)에 있다. 영봉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처럼 서있다. 영봉으로 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보덕암을 볼 수밖에 없지만 들르지 않으면 그야말로 이정표에 불과하다. 스쳐간다면 영봉으로 가는 이정표일 뿐이지만 잠깐이라도 발길을 멈춘다면 깊은 가을로 가는 이정표다.

한국의 5대 악산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월악산은 달이 뜨면 달이 영봉에 걸린다고 해서 ‘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삼국시대에는 월형산이라 불렀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궁을 지으려다 무산되어 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봄에는 다양한 봄꽃과 함께하는 산행이 좋고, 여름에는 울창한 수림을 즐기는 계곡산행이 좋다. 가을에는 충주호와 연계한 단풍 및 호반산행이 좋고, 겨울에는 설경산행이 매력이다. 동서로 이어진 8km의 송계계곡의 월광폭포와 자연대 등의 송계팔경과 16km에 달하는 용하구곡의 폭포·천연수림 등이 명소로 꼽힌다. 그 밖에 덕주사, 신륵사, 중원 미륵사지(사적 제317호) 등의 도량과 사자빈신사지석탑(보물 제94호), 중원 미륵리 삼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제33호), 중원 미륵리 석등(충북유형문화재 제19호), 제천 신륵사 삼층석탑(보물 제1296호) 등의 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보덕암으로 가는 길
본격적인 등반이 아니라면 보덕암으로 가는 길은 힘들지 않다. 해발 500m에 위치한 보덕암이지만 도량 100m 전까지 차량으로 갈 수 있다. 길은 다소 급하고 외길이지만 차량으로 갈 수 있다. 십여 대의 차량이 주차할 수 있는 작은 주차장이 있다.

차 문을 열면 완전히 다른 호흡이 시작된다. ‘산’이라는 공간적 이동과 ‘가을’이라는 시간적 이동이 호흡에 빛깔을 불어넣는다. 울긋불긋한 호흡 속으로 산새들이 드문드문 운다. 시간은 그렇게 가끔씩 흘러간다.

다소 경사가 급한 계단길 100m 정도를 오르면 이내 보덕암의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가을이 물씬 느껴지는 나뭇가지 사이로 보덕암이 다가온다. 경내로 오르기 전 작은 전망대에 서면 지나온 월악산 봉우리들과 충주호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절경이다. 길은 걷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멈춰서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잠시 절경 속에 머물면 길이 보인다. 지나온 길이 보인다. 봉우리들 사이의 길과 길을 거슬러 가슴 속에 봉인되었던 깊은 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살아온 날들의 무게와 살아갈 날들의 무게가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그렇게 가끔 절경 속에 서는 것도 공부인 듯하다.

경내엔 아무도 없다. 주지 스님이 출타 중인 듯하다. 낯선 발자국 소리에 후원 쪽에서 검은 개가 짖는다. 들어오지 말라는 것인지. 아니면 반가운 것인지. 알 수 없다. 논란의 공안은 해결이 되었는지. 논란의 공안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견공뿐일 텐데. 우리는 여전히 견공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신라시대 왕리조사 수행처
왕리조사 사료 거의 없어
1918년 ‘보덕암’으로 불사
1979년 중건 불사 시작
1986년 적인 스님 불사 회향

해발 500m 영봉 가는 길목
대웅전·요사·선원 단출한 도량
전탑 부재 모아 전탑 재 조성
석조연화대·광배 조각편 잔해
월악산·충주호 등 절경 조망

보덕암은 신라시대 왕리 스님이 수행한 곳이다. 왕리 스님이 수행했던 자리에 1918년 보덕암을 축조했다고 전한다.
보덕암은 신라시대 왕리 스님이 수행한 곳이다. 왕리 스님이 수행했던 자리에 1918년 보덕암을 축조했다고 전한다.

 

보덕암에서 마주한 가을
도량은 단출하다. 한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 요사채, 보덕선원, 마당 한 칸 그리고 가을나무들. 밖에서 보는 도량과 안에서 보는 도량은 달랐다. 모든 것이 그런 것 같다.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아프게 하는 지도 모르겠다. 작은 모전탑이 도량의 중심을 잡고 있다.

보덕암은 신라시대 왕리 스님이 수행한 곳이다. 왕리 스님이 수행했던 자리에 1918년 보덕암을 축조했다고 전한다. 누구의 불사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의 도량은 1979년에 불사를 시작해 1984년, 주지인 적인 스님이 입산한 후 천일기도 정진 속에서 이룬 도량이다. 관음도량인 보덕암은 왕리 스님의 법명을 따라 왕리사고도 했다. 전하는 바에는 기암 위에 탑 3기가 있었는데, 모두 멸실되어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대웅전을 다시 지을 때 절터에 흩어져 있던 150여 장의 전탑 부재를 모아 전탑을 쌓았다. 전탑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마당 왼쪽으로 보덕선원과 맞은편으로 보덕암 당우가 있다. 선원 위쪽 산자락에는 약사여래불입상을 모셨다. 경내에는 단엽 복판의 연화좌대 2기와 두 동강으로 갈라진 화염문을 새긴 광배 조각편, 단엽 복판을 조각한 방아확 등의 석조 유물들이 있다.

왕리 스님의 기록은 전하는 바가 거의 없다. 이름뿐이다. 선지식의 전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사라진 도량의 흔적만큼이나 아쉬운 일이다. 폐사지처럼 흔적으로 남아 있는 스님의 법명이 아쉽기만 하다. 그 법명 위에 이루었던 많은 공부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 어딘가에 있을 조사의 공부가 궁금해진다.

선원 뒤쪽의 작은 언덕으로 오르면 도량이 또 한 번 한 눈에 들어온다. 도량은 또 한 번 달라진다. 붉은 숲 속에 보덕암이 깃들어 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보물섬 지도 위에 와 있는 듯하다. 잠시 비경 속에 머문다. 논란의 공안이 해결됐는지 개 짖는 소리가 언제부턴가 들려오지 않는다. 모든 것의 논란들이 우스워진다.

전망대에서 보았던 먼 풍경과는 또 다른 모습의 작은 풍경이다. 지붕 세 개와 나무 예닐곱 그루,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늘이 전부인 작은 풍경이다. 그 풍경 속에서 뜻이 있는 것이 있다면 객과 검은 개뿐이다. 계절을 만나러 온 객과 뜻을 알 수 없는 검은 개는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같은 가을을 보고 있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 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 한다. 〈중략〉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생자필멸, 회자정리, 그런 것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노상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중략〉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법정 스님이 가을에 쓴 글(가을 이야기)이다. 그렇다. 고해 속에 던져진 우리가 한 번 쯤은 하늘을 보게 되는 시절, 이 가을은 특별한 계절이다. 한 사람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계절이다.

언덕을 내려와 다시 도량에 선다. 개가 다시 짖기 시작한다. 그랬다. 견공은 다시 짖기 시작했다. 이 가을이 가면 나와 개는 어디에 있을까.

작은 전망대에 서면 지나온 월악산 봉우리들과 충주호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작은 전망대에 서면 지나온 월악산 봉우리들과 충주호가 한 눈에 들어온다.

 

보덕암 가는 길
길은 쉽다. 보덕암 주차장까지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다. 충주호를 끼고 달리다보면 월악산을 마주한다. 길은 외길이고 경사가 급하다. 주차장은 넓지 않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보덕암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차량을 이용한다면 시간대를 살펴서 결정할 일이다. 주차장에서 100m 정도 계단길을 오르면 보덕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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