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사 선문답법회 - 무문관 6칙·세존염화(백담사 유나 영진 스님)

서울 은평구 삼보사는 9월 22일부터 11월 3일까지 ‘2019선문답 특별대법회’를 개최했다. 다양한 선지식들이 무문관 공안을 가지고 법석을 편 가운데 10월 27일에는 백담사 유나 영진 스님이 무문관 제6칙인 세존염화를 주제로 법문 했다. 이날 선문답법회 법문을 지상중계 한다.

정리=노덕현 기자

영진 스님은… 백담사 유나로 41년간 화두 하나 들고 정진의 길을 걸어 왔다. 무문관 폐문 정진도 수년간 했다.

〈무문관〉을 가지고 법회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처님 이후에 당나라, 송나라 선의 황금시대를 이루는데 선사들의 말씀과 언어, 법문이 모아져서 1700공안이라 합니다. 이중 48가지를 따로 엄선해 만든 것입니다.

화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선방에서는 언어도단의 경지를 말합니다. 문자를 쓰지 않고 말길도 끊어진 자리가 그 자리라 하기 때문에 입을 열면 그르치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이 왜 이렇게 많아졌겠습니까.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 되는 일인데 말이죠. 중생의 근기가 다양하기 때문에 말씀도 다양해진 것입니다. 부처님처럼 친절한 분이 어디있겠습니까. 서로 입을 열면 그르치지만, 그 자리를 제시하고 가는 길까지는 친절하게 안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평소 갖고 있습니다.

선의 시작이자 원류 ‘세존염화’
‘염화’, 말 필요없는 근본 자리
禪은 시작도 끝도 말없음으로

제가 맡은 부분은 제 6칙 세존염화입니다. 세존께서 꽃을 들으셨다는 말인데, 이것은 선종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선 역사를 얘기하면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에 교화의 길에 나서셨습니다. 주로 아함12년, 방등8년, 반야21년, 법화열반8년이라고 교상판석에서 합니다. 그러나 진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처님이 영산회상, 영축산에서 법문하실 때입니다. 법문을 하시려고 할 때 여러 가지 상스러운 조짐이 일어납니다.

부처님이 꽃비가 흩날릴 때 말씀을 하지 않고 꽃을 하나 들어보이십니다. 선의 원류를 바로 여기로 삼습니다.

부처님께서 교화를 하시다가 드디어 마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 지은것을 선의 삼처전심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선종 최초의 역사이자 시작입니다.

가섭이라는 분은 부처님 제자 중에 두타제일이라고 하여 십대 제자 중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는 사리불, 목건련 등도 있었지만 마하가섭이 부처님 신임을 받는 과정이 나옵니다.

꽃을 들어보였다는 것은 말씀이 필요 없는 자리입니다. ‘염화’라고 하는데 오늘날 염화실이라고 함은 사찰에서 조실이나 방장 스님이 쓰시는 곳을 말합니다. 심인을 이은 분이 쓸 수 있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부처님이 꽃을 드니 1250명이 어리둥절했는데 가섭만이 웃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법문을 듣고 있는데 한분이 웃고 있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전한 내용이 정법안장, 열반묘심이었습니다. 열반은 부처님이 전한 최고 깨달음입니다.

열반묘심은 무엇일까?

부처님 살아 생전에 유명한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대사문이시여, 당신이 내세우는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니르바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니르바나를 얻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이 가만히 들으시고는 ‘바라문이여, 당신의 질문은 니르바나와는 관계가 없는 질문입니다’ 이렇게 하고 대답을 안 했습니다.

답답한 바라문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리불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가 나가는 바라문을 불러 세웁니다. ‘바라문이여, 저의 스승 부처님께서는 당신에게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나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대답해 주겠소.’

바라문이 사리불에게 물었습니다. ‘니르바나는 무엇입니까.’ 사리불이 답했습니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을 때 이 불꽃이 완전히 연소된 것을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즉, 탐진치 삼독심이 완벽하게 꺼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이후 재차 묻습니다. ‘니르바나를 성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리불이 답합니다. ‘나무가 불에 타고 있습니다. 당신의 질문은 나무가 완전히 다 타버린 다음에 그 불꽃이 어디로 갔는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사리불보다 못하셔서 대답을 안 하셨을까.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직접 답하기보다는 깨닫기를 유도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유도 합니다. 이후 열반이 죽음을 의미하게 된 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시면서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 무여열반했다고 하셨습니다. 육신마저도 소멸됐기 때문에 완벽한 열반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이 있을때는 유여열반, 돌아가셨을 때 무여열반이라고 해서 니르바나가 죽음도 의미하게 됐지만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본질은 무엇일까

실상무상. 진실한 모양은 모양이 없다고 합니다. 진실한 모양은 무엇일까요.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모양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육조 혜능 스님은 무상무체라 했습니다. 모양은 없는 것으로 본질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이 법당에 가득한 이들은 저에게 보입니다. 하지만 모양 이전의 본질은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으로 말하자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법신으로 ‘본질’입니다. 원만노신 노사나불은 원만한 상호를 갖춘 ‘상’입니다.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은 화신입니다. 변화한다는 것으로 나투는 것입니다. ‘작용’입니다.

체상용은 중국의 원리지만 이전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모양이 없다. 일단 모양은 있습니다. 그러나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 무상입니다.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상은 모양을 초월한 것입니다. 모양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크다해도 안과 밖이 있으면 크다고 하지 않습니다. 진짜 큰 것은 모양이 없습니다.

실상은 가장 큰 근원 자성자리입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지혜의 눈, 진리의 눈, 부처의 눈으로 안목이 열려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마무리 모양으로 볼 수 없어도 작용은 나타납니다. 우리가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도 실상입니다. 사계절이 오고감도 실상입니다.

어떻게 보면 실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법당이 원래 법당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많은 건축자재가 모여 법당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법당의 주인이 무엇일까요. 앉아 있는 대중, 법문하는 저, 이 자리를 연 지원 스님 등이 주인공입니다. 이 주인공의 가치는 동등합니다. 있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 실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의 안목으로 보지 못하고 중생의 안목으로 보니 차별상이 보이고 긴 것 짧은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진리의 눈으로 보면 실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모양에서 떠난 자리마저도 중생의 눈으로 보면 모양입니다. 어느쪽으로 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법

미묘법문은 열반에 있는 올바른 가르침이 있는데,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고 합니다. 교 밖에 달리 전한다고 하니 선입니다. 바로 마음으로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서산 대사는 ‘선시불심’ 선은 부처님의 마음, ‘교시불허’ 교는 부처님의 말씀, ‘계시불행’ 계는 부처님의 행이라 정리하셨습니다.

선은 말없음으로 시작해서 말없는 곳에 이르는 것입니다. 교는 말 있음으로 시작해서 말없는 곳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도달점은 같습니다.

가르침이라는 것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입니다. 진짜 달은 저기에 있다는 겁니다. 손가락으로 달이 있는 곳은 알아도 달이 내 것일 순 없습니다. 선수행을 통해 달이 내 것임을 아는 것이 참선입니다.

불립문자 교외별전은 실상의 자리로 글로 표현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직접 맛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설명을 통해 근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럼 궁금합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교설한 이유는 부처님 당신이 하지 않고서는 중생구제를 할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위치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선의 종지를 깨달은 제자로서도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세상입니다.

무문관을 지은 무문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면구담이 방약무인이라. 압량위천하고 현양두매구육 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황면구담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이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고 양민들을 천인으로 삼고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하가섭에게 정법 안장을 전하노라 하셨다는 겁니다. 문제 있다는 겁니다. 무문 스님의 내 안목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만약 그때 대중이 모두 웃었다면 정법을 어찌 전했을까라고 합니다. 이어 가섭이 웃지 않았다면 정법을 어찌 전했을까 합니다. 만약 정법안장이 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 부처님이 세상 사람을 속인 것 아닐까. 또 정법안장이 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 어찌 가섭 한 사람에게만 허용했을 것일까란 의문을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저도 무문 스님의 새까만 후배로서 무문 스님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진리의 세계에 만약이 어디있소란 말입니다. 선은 유추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이란 가정은 필요가 없습니다. 대중이 모두 웃었다면 역시 필요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문 스님도 이걸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자비심에 친절하신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하자면 무문 스님은 화두를 하나 더 던진 것입니다.

선방에서는 저 사람 머리 굴리는 소리가 자갈밭에 수레가는 소리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선은 유추하지 않습니다. 화두도 어째서 그럴 것이다 유추하는 순간 사구가 됩니다. 마른똥막대기라고 하면 똥 속에도 부처님이 있고 법계에 충만하신 것이 부처님이라고 유추하는 순간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시심마입니다. 부처님이 마하 가섭에게 심인이 무엇일까란 화두로 제기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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