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에 난 어떻게 존재하는가

안이비설신의는 무상이고 고이다
변화하고 그 끝에는 멸하게 되니
나라고 주장할 만한 주체는 없다
그러므로 6근은 무아이기도 하다

그림. 강병호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를 인식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시간적인 관점에서 존재를 이해 하는 방법과 공간적 관점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또 시공간이 통합된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오온 연기는 공간적 관점에서 연기를 보는 것이며 12연기는 시간적 관점과 공간적 관점을 통합해서 이해하는 방법이다. 

연기에 대한 인식 
시간연기에 대해서는 <금강경> 제18장 일체동관문에 잘 나타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부처는 육안이 있느냐?”

그러자 수보리는 “예 육안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후 석가모니 부처님은 천안과 혜안, 법안, 불안이 부처에게 있는지를 물었다.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라는 것이 12처에 대한 이해와 6근과 6식의 이해가 바로 육안에 대한 인식이다. 삼법인의 속성이 이해되면 천안이 열렸다고 한다. 부처의 혜안은 시간연기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되면 혜안이 있다고 한다. 법안이란 오온연기에 대한 인식의 이해이다.

수십억 겁을 수행해야만 부처가 된다고 하고 있다. 부처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어렵고 힘든 수행과정을 거쳐 부처되고 나를 아는 것이 바로 12연기에 대한 인식과 이해이다. 오온에 대한 인식과 이해와 시간연기에 대한 이해가 절대 쉬운 것이 아니다.

시간연기의 발생양식
시간연기를 산스크리트어로 표현하면 ‘프라티아트야 우뜨파다’ 이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기대어 일어남 연하여 일어남’이며 이를 한문으로 간단히 표현한 것이 ‘연생(緣生)’이다.

기대어 일어나다, 연하여 일어나는 것이 시간연기의 발생양식이다. 시간연기의 기본적인 형태는 기대어 일어나고 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바로 연생인 것이다.

‘프라티’는 ‘~에 대하여, ~을 향하여’이며 ‘아’는 ‘가다’. ‘트야’는 ‘~하여, ~향하여 가서’이다. ‘우뜨’는 ‘위로, 위로는 일어남’을 뜻하고 ‘파다’는 ‘가다’의 뜻이다.

즉, 시간연기의 발생양식은 기대어 일어나고 연하여 일어나는 연생이라는 뜻이다. 기대어 일어나고 연하여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내가 눈을 통해서 부처님을 본다고 하자. 눈을 통하여 그 대상을 보면 대상에 대한 어떤 식이 생겨난다. 이것이 연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다른 것이 뒤이어 일어난다는 것이다. 뒤에 오는 행위가 이어서 일어나려고 하며 반드시 선행하는 것이 있어야 그것에 의해서 그 다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연하여 일어난다. 기대어 일어난 다는 것은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 앞에 것이 없으면 뒤에 것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데 기본이 되는 ‘안이비설신의’가 있다. 이 6근에 대한 대상이 항상 존재한다. 예를 들어 눈이 있어야만 건물이 보인다. 지금 강의를 듣는 것은 귀가 있어 가능하다. 다른 것으로는 들을 수가 없다. 귀가 있어야만 들을 수가 있다. 냄새를 맡는 것은 코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코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맞는 것만 가능하다. 맛을 느끼는 것은 혀가 있어 가능하다.

누가 손을 만졌을 때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는 것은 몸뚱이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총체적으로 대상에 대한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6근에 대한 대상은 6경으로 이루어진다. 6경은 색성향미촉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6근과 6경이 합해서 12처가 된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12처니라‘라는 말처럼 부처님은 존재하는 것을 표현할 때 12처로 표현했다. 6근과 6경이 합해지니 6식이 생긴다. 눈으로 인해서 대상을 보는 작용인 안식이 생기고 소리를 듣는 것으로 인해서 이식이 생기고 안이비설신의까지 6식이 생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이 몸뚱이는 끊임없이 변해왔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무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간다.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는 것은 없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이다.

우리 몸뚱이도 1백 년을 쓰고 나면 허물어져 버린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가고 변해가는 끝은 멸이며 죽음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6근을 무상하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것의 마지막은 멸로 끝나고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고(苦)라고 하였다. 왜 ‘고’인가. 그 이유는 마지막 종착역이 멸이며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6근은 무상이고 고인 것이다.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변해가는 끝은 멸하므로 무상이며 고인 것이다. 나라고 주장할 만한 주체성이 없다. 그러므로 6근은 무아이기도 하다. 나라고 주장할 만한 독립된 주체가 없는 것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나라고 주장하는 독립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인 것이다.

시간 연기의 전개
6근은 기본적으로 삼법인의 속성과 의지적 작용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6경은 색성향미촉법이다. 색경, 성경, 향경, 미경, 촉경, 법경인 6경도 삼법인의 속성을 갖고 있다. 6근의 대상인 6경도 똑같이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진다. 일정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몸뚱이가 삼법인의 속성을 갖고 있듯이 대상인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삼법인의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6경도 결국은 무상이다.

지금 우리가 건물을 지었다 할 때 천 년이 지나고 나면 허물어져 버린다. 목조건물을 예를 들어 1000년이 지나면 보물이 되고 국보가 된다. 잘 보존하여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귀하게 되어서 보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 년이 지나고 나면 다 허물어져 버리고 없다. 허물어지고 난 끝이 멸이기 때문에 고인 것이다. 그러므로 6경도 무상이고 고이고 무아인 것이다.

6근과 6경이 삼법인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삼법인의 속성을 갖게 된다. 여기서 6경은 필연적인 반응의 속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을 이해해야 된다. 무상의 기본인 속성은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한다. 예를 들어 술을 놔두면 식초가 된다. A술이 B식초로 변하게 된다. 술을 놔두었더니 시간이 지나서 보니 식초가 되었다.  A는 없어져도 B는 남아있다.

처음에는 술이었다가 뒤에 식초가 되었다면 앞에 것은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은 식초이다. 존재는 인식이라고 했다. 그런데 술이 발효되어서 식초가 되었고, 변화된 상태에서 인식하는 것은 식초밖에 없다. 변화의 끝인 식초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B는 존재하지만 A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A는 없어졌으므로 A는 멸했다고 한다. 없던 B는 어떤 시간을 기점으로 나타나게 되며, 이 시간을 기점으로 볼 때 A는 멸했고 B는 생한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배웠던 연기로써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인 것이다.

무상하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화를 한다. 이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술A가 식초B로 변한 것이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변화 속에서 술은 없어져 버리고 식초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6근과 6경이 부딪쳐서 생긴 6식의 기본적인 속성은 변화인 것이다. 우리가 인식할 것은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죽는 다는 것을 지금 받아들인다면 즉 내일 죽는다면 오늘을 맞이하는 우리는 어떻겠는가? 죽음을 인정한다면 현재의 삶이 훨씬 더 진지하고 긍정적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릴 때의 내가 다르고 자랄 때 내가 다르고 나이 들어서 내가 다르듯이 성장함에 따라서 내 모습이 변해간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통일체이지만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즉 변화의 기본적인 속성은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6근과 6경에서 보았듯이 무상의 기본적인 속성은 변화이다. 이것이 부딪칠 때 6식이 생기고 이 식을 의지가 판단하고 생각을 한다. ‘식’의 기본적인 속성이 바르게 인식하는 것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식인 것이다.

삼사 화합- 6근·6경·6식
6식을 바탕으로 한 시간연기는 연하여 일어나므로 6식은 6촉으로 연하여 일어난다. 촉은 일반적으로 시간연기에서 설명한 탐진치로 인하여 생기게 된다.

이제 다르게 인식하는 6식까지 왔다. 대상을 인식하면 행동이 따르게 되며, 6근을 통해서 대상을 판단한다. 대상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 6식이다. 6식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촉이며, 판단이 끝난 다음에 행동인 촉이 일어난다. 6촉은 눈으로 부딪칠 때, 소리로 부딪칠 때, 냄새로 부딪칠 때 맛으로 부딪칠 때, 몸으로 부딪칠 때, 뜻으로 부딪치는 것이다. 6촉에서 충돌, 부딪침, 접촉 등을 만들어낸다. 촉을 보면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촉에는 안과 색이 연하여 안식이 발생하고 또 안과 색과 식의 화합으로 촉이 된다. 이 삼사 화합이 이루어져 촉이 되는 것이다.

촉은 산스크리트어로 말하면 ‘스파사’, 즉 충돌이다. 6근·6경·6식이 결합하여 부딪쳐 촉이 이루어진다. A에서 B로 변했을 때 변하기 전 A가 나 자신인가? 변하고 난 후의 B가 나인가? 충돌이 일어나기 전의 나를 나로 인식할 것인지 충돌이 일어난 후 나를 나로 인식할 것인지 여기서 갈등이 일어난다. 갈등하는 기본의 바탕은 충돌 때문이다. 근본적인 의식의 저변에는 분명히 충돌이 일어나기 전을 나라고 했는데, 이 충돌이 일어난 후의 나를 나라고 할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촉에서 변화를 바탕으로 갈등이 생긴다.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충돌하기 전과 충돌하고 난 후의 가장 극한 상황은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충돌 전의 나는 분명히 살아있었는데 충돌 후의 나는 죽었는 것이다. 죽음 전의 상황과 죽음 후의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 많은 상황 중에 가장 극한 상황은 죽음으로 인한 충돌 전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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