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훈 前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대한적십자사 창립87주년을 맞아 강영훈 총재로부터 적십자 박애장을 수여받고 있는 삼중 스님.

남북관계가 진전되거나 안좋아질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강영훈 前 국무총리이다. 3년전 작고한 강 前 총리는 군과 외교·정치·행정을 두루 거쳤다. 고인은 1921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태어나 국회의원,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다. 노태우정권 시절인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제 2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고인은 1990년 9월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켰고, 그 다음달 홍성철 통일원 장관과 함께 남한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북한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적십자사서 박애장 훈장 수여로 인연
퇴임 후 청백리 공직자로 존경 받아
아내 병수발로 주요 요직 거절하기도

고인은 5·16군사쿠데타 당시 육사 교장(중장)이었다. 쿠데타 세력이 요구한 육사 생도의 혁명 지지 거리행진을 거부, ‘반혁명분자 1호’로 낙인찍혀 구속된 후 강제 예편됐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78년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외무부에 들어갔다. 전두환정권 때인 1980년대에는 영국·로마교황청 대사 등을 지냈다.

정·관계를 떠난 강 前 총리는 1991년부터 7년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아 북한 수재민 돕기 등 대북 지원사업과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 등 남북교류 사업을 이끌었다. 1997년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을, 1998년 ‘숲 가꾸기 국민운동’ 공동대표직을 맡았다

강영훈 前 국무총리는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했다. 이는 강 前 총리가 87세에 펴낸 회고록 제목이기도 하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흔히 ‘벽창호’라고 한다. 이 말은 평안북도 벽동군과 창성군 사람 중에서 고집 센 사람을 일컫는 말로, 강 前 총리의 고향이 바로 평북 창성군이다. 압록강과 접한 국경지역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벽창호의 고향답게 창성군과 벽동군에서 기르는 한우도 예로부터 힘이 좋고 동시에 말 안 듣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회고록 제목에 나온 ‘벽창우’는 여기서 따온 것으로 자신과 이미지가 닮았다고 했다.

내가 강 前 총리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강 前 총리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됐을 무렵이었다. 1992년 10월 27일로 기억하는데 대한적십자사는 창립 87주년 기념식에서 재소자 포교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불교계에서는 최초로 나에게 적십자 박애장 훈장(금장)을 수여 했다. 실무자들이 당시 중앙일보에 연재된 나의 사형수 포교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아 후보자로 적극 추천했다고 후일에 들었다. 부끄럽게도 적십자사쪽에서는 나를 적십자 정신, 즉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인류 구원의 박애봉사 정신과 인도주의 정신 구현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실천궁행한 이로 추천받아 선정했다고 밝혔다.

상을 수상한 뒤 적십자사 총재실서 만났을 때 “일간신문서 보니까 총재님께서는 국무총리 임기를 끝내고 나오셨을 때 집에 가보니 비가 샐 정도로 청백리 공직자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실제로 그러셨습니까?”하고 묻자 강 前 총리는 “껄껄 웃으며, 제가 실세 총리가 아니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농섞인 답을 하며, 진솔한 얘기를 주고 받은 기억이 새롭다. 실제로 당시 강 前 총리 자택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동 주택가 골목에 있었다. 강북서도 조용하기로 소문난 이 동네서 강 전 총리는 1953년 휴전 이후 오랫동안 살았다.

그동안 강남개발 등 부동산 광풍이 몇 차례 휩쓸었어도 꿈쩍 않고 동네를 지킬 정도로 강직성이 돋보였다.

그리고 강 前 총리는 당신이 총리가 된 배경도 설명해 주었다. “당시 나는 13대 국회의 민정당 전국구 초선의원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12월 초 청와대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지요. 대통령께서 저더러 민정당 대표를 맡아달라는 겁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지요. 초선 의원이 어떻게 집권당 대표를 맡습니까. 그런데 그날 오후에 다시 부르시더니 국무총리를 맡으라는 겁니다. 당시 총리감으로 생각해 놓은 분이 있었는데,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제게 부탁한다는 겁니다. 나는 군대 외에 행정 경험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대통령께서 ‘하다 보면 경험도 생기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면서 극구 권하시더군요. 미국서 공부한 민주정치 발전이론을 현실에 적용해 볼 수도 있겠다 싶어 수락한 겁니다.”

이렇게 내가 30여년간 지켜본 강 前 총리는 솔직 담백하고 신사인 사람이었다. 어려운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고, 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서 주요 요직도 거절한 인간적인 풍모를 지닌 정치인이었다. 나의 절친인 구상 시인이 작고했을때도 명동성당서 거행된 장례미사서 제일 앞에 서 있을 정도로 의리도 많았다. 남북관계는 물론 국내적으로도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어수선한 시국인 요즈음 많이 생각나는 뚝심의 정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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