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자꾸 생각하다 보면 곧장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참선을 해 나가야 하는지요

질문 이 마음 도리를 알려면 어떻게 참선을 해 나가야 하는지요

답변 우리가 콩씨를 심어서 콩이 화해서 없어지고 콩 싹으로 화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화두를 가지고 그 과거의 콩씨를 찾는다면 어디 가 찾아요? 자기가, 그 콩씨가 싹이 돼 버렸는데 어디 가 콩씨를 찾느냐고요. 싹이 있는 데 콩이 또 달리는 법이지 어디서 콩을 찾아요? 그거는 백 년, 천 년, 만 년이 가도 못 찾아요. 자기가 싹으로 돼 있으니까. 그 콩이 화해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그 콩 싹이 화한 거를 알고 무조건 그냥 콩씨를 그냥 둘 아니게 먹어 치워라 이 소립니다. 자기한테 붙어 있는 거거든요.

진짜로 믿는다면 고꾸라지든지 가든지 오든지
그런 걸 상관 안 하고 근본 자리에 턱 맡기기 때문에
괴로운 게 없어요.

그래서 예전에 이런 말을 한마디 한 게 있죠. 수박을 놓고 굴리면서, 그게 “수박을 들고” 하는 건 “화두를 들고” 하는 비유를 한 겁니다. 수박을 들고 ‘이게 뭣고? 이게 뭣고?’ 그러고는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다 보니깐 세월이, 자기 젊은 세월이 다 갔단 얘기예요. 나는 그러지 말고, 못났든 잘났든 그냥 아, 죽으면 죽고 살면 살지 뭐 그렇게 겁이 나서 못 잘라 먹어 보느냐 이거죠. 그냥 먹어 치워라 이겁니다, 그냥. 먹어 보면 그 속에 씨도 있고, 그 속의 살이 맛이 어떤가도 알 수 있고 그럴 거 아니냐 이거예요. 내가 맛을 보고, 내가 그 씨가 있어서 영원하다는 거를 알게 되고, 그 씨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 종자로 인해서 수만 수천이 벌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뭣고?’ 하고 백네 날을 가지고 굴려도 그것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그대로 화두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응아 하면 벌써 이것이 화두다. 그 화두를 누가, 어느 큰스님이 주신다 해도 그거를 이름으로 받지 말고 마음으로 받아라. 이름으로 받는다면 만날 들고 돌아다녀야 하고 마음으로 받는다면 그대로 둘이 아니다 이거예요. 자기 내면의 내면처와 또 주신 양반의 내면처가,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둘을 한데 합쳐도 그냥 하나의 주인공이죠. 만 불을 갖다가 하나로 넣어도 그것은 일 불일 뿐이고요. 그러니까 부처님 앞에 가서 빌고 기도하고 이럴 때, 여기저기 신중단이니 칠성당이니 독성각이니 또는 지장각이니 관세음이니 뭐, 그저 쫙 늘어져 있는데 그거 여러분이 공부할 때 그게 아주 치명적인 문제죠.

왜냐하면 그것을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다 알죠. 내가 아팠을 때는 약사가 돼 주고, 그러니깐 약사보살하고도 둘이 아니에요. 이것이 아리송하걸랑은 한 가정에 아버지가 됐다가 남편이 됐다가, 아들이 됐다가 사위가 됐다가, 형이 됐다가 아우가 됐다가, 친구가 됐다가 이렇게 바꿔지죠? 그거와 같은 거죠. 그러니까 아플 때는 약사가 돼 주고, 괴로울 때에는 관세음이 돼 주고, 또 명이 짧다 하면 칠성이 돼 주고, 좋은 데로 못 갔다 하면 지장이 돼 주고 이렇게, 항상. 그러니까 한데 그냥 뒤죽박죽을 만들어서 그렇게 부처님한테 가서 빌고 살려 달라고 하지 말고, 내 주인공에 모든 것을, 아프면 아프다고 관하면 그것이 바로 약사로 화해서 나투어 주시고, 또 내가 가난하고 무슨 일이 생기고, 법원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거기다 관하면 그대로 그냥 관세음보살이 돼 줘요.

그러니까 우리가 때에 따라서는, 공부할 때도 여러분 과목에 따라서 요거 배울 때 있고, 요거 배울 때 있고, 요거 배울 때 있죠? 한데다 놓고 뒤죽박죽을 해서 배우는 사람 봤어요? 그러니까 내가 필요할 때만 그것이 필요한 것대로 화해서 그렇게 바꾸어 준다 이거예요. 바꾸어 주는 게 아니라 바꿔진다 이겁니다, 스스로 자동적으로. 우리는 본래 자동적인 컴퓨터기 때문에, 대뇌에 우리가 자동적인 컴퓨터로 돼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고 살고 있는 게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얘기예요. 생각이 거기 들어가는데 안 됩니까? 용광로에 그냥 모든 걸 갖다 넣으면 저절로 재생이 돼 나가듯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서 ‘달이다’ 이런다면, 어떤 문제가 벌어졌다 했을 때 내가 만약에 달이 된다면, 내 마음이 이 달 속에 들어가서 내가 달이 된다면, 내 마음이 달이 됐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남을 해치지 않고 또 잘못되지 않게 할 수 있죠? 자기가 자기 죽이는 법은 없으니까. 내가 또 그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태양이 된다 이럴 땐 태양으로서 내가 맘먹고 들어갔기 때문에 태양이 타 버릴 리도 없고 부패될 일도 없지 않습니까.

또 지구 역시 그래요. 모두가 구멍이 뚫어졌다, 펑크가 났다, 에너지가 다 없어졌다 이러더라도, 내가 만약에 지구가 된다면 이 허공에 꽉 차 있는 에너지를 자동적으로 끌어들여서 쓸 수 있는 문제가 생기죠. 이 문제를 모두 놓고 볼 때에 우리가 제일 귀중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들의 금 같은 마음이에요. 굳세고 금 같은 마음이요. 빛나고 굳세고 그런 마음이요. 그 마음 하나가 우주 천하를 덮고도 남아요.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도 남아요. 받치고, 덮고, 굴리고 해도 남아요. 저 스님은 엉뚱하게 저렇게 말을 한다고 하지 마세요. 이건 사실이니까요.

여러분이 만약에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거는 없다.” 이럴 수는 없으니까요. 귀가 잔뜩 먹은 사람한테 “아! 지금 천둥이 쳤다.” 이러면 아, 이거 천둥 친 거 없다고, 이런다고 해서 그게 아닙니까? 귀가 뚫린 사람은 천둥 치는 걸 들었겠죠. 그래 소리는 들었으나 쥘 수도 없고 갖다가 보일 수도 없는 것이 천둥이고 종소리죠. 모두가 그래요. 그렇듯이 그렇게 갖다가 쥘 수도 없고 갖다 줄 수도 없고 보일 수도 없지만 있어요. 갖은 소리 다 하게 하고, 갖은 각색으로 움죽거리게 하고, 갖은 각색으로 배우게 하고, 갖은 각색으로 먹게 하고. 이거는 뭐, 말로는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귀중하고 그렇게 광대하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옛날에 사대 성인도 그랬어요. “못났든 잘났든 너 먼저 알아야 이 세상의 섭류를 알 수 있느니라.” 그러니까 가난해서 못 배운다, 바빠서 못 배운다 이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죠. 와선, 좌선, 행선, 참선 이러는데, 참선이라는 것은 일을 하거나 눕거나 앉거나 자거나 할 때에 그대로 하는 게 참선이거든요, 갈라놓지 않고. 앉아서 하는 건 좌선인데, 앉아서 관하는 거나, 일할 때에 관하는 거나, 섰을 때에 관하는 거나, 누웠을 때에 관하는 거나 뭐 다른 게 있습니까? 관하는 근본에서 나오는 건 한 자리지 두 자리가 아니거든요. 몸뚱이는 이리 움죽거리고 저리 움죽거리고 해 봤자 그것은 몸뚱이를 치는 게 아니에요. 움죽거리라고 해 놓은 거 움죽거리지 못한다면 목석이지 그게 사람이오, 어디? 그러니까 움죽거리고 그러는 자체가 그 마음 근본에서 나오는 거니까 마음 근본에서 앉든지 서든지 일하든지 그건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그래서 참선이라고 이름해서 부른다 이런 거죠.

바쁜 돈벌이 속에서도 참선이 될까요?

질문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인생을 의미 있게 살고 싶은데 가끔씩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참선이 될 수 있을는지요.

답변 우리가 넓게 생각을 한다면 풀 한 포기 하나도 스승 아닌 게 없어요. 부처님만 스승이 아니에요. 이 세상을 살아나가려면 강도짓 하는 사람을 보고도 깨닫는 게 있어요. ‘나는 저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풀 한 포기도 돌 하나도 물 흘러가는 것도 다 스승이에요. 그렇게 스승 아닌 게 없으니까 그거를 한데 합쳐서 주인공이라고 그러는 거죠.

모든 일체 만물만생 또는 삼세, 과거·현재·미래를 한데 합쳐서, 삼심·삼세 모든 것을 한데 합쳐서 주인공이라고 한 거니까, 그 주인공 하나만 생각하면 뜻으로다가 그냥 둥글려지죠. 그렇게 간단하게 하세요. 이것저것 자꾸 생각하다 보면 곧장 들어갈 것도 못 들어가요. 그러니까 그렇게 한데 모으셔서 그 자리에 맡기고 지켜보는 그런 참선자가 되세요.

진짜로 믿는다면 고꾸라지든지 가든지 오든지 그런 걸 상관 안 하고 거기다 턱 맡기고 그냥 진짜로 아무 괴로움이 없어요. 돈이 많이 벌려도 걸림이 없고요, 돈이 안 벌려도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거기다 놓기 때문에 괴로운 게 없어요.

모든 도리를 간단히 생각하세요. 돈을 수만억을 번다 하더라도 걸림이 없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것도 자기 혼자 갖는 게 아니잖아요. 혼자 번 것도 아니고, 혼자 가질 것도 아니고, 혼자 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많이 버니까.’ 하고 ‘내가’라는 생각으로 나를 내세우는 게 있기 때문에 그게 걸리는 거지, 한마음이라는 주인공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가 많은데, 일체가 다 나 아님이 없는데 구태여 왜 거기 걸립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무조건 믿고 거기 맡겨 놓고 지켜보시고 그러세요. 그리고 거기에 걸림이 없어야 됩니다. 몇만 냥을 벌더라도 또 욕심을 내서 ‘저걸 벌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나도 당신 혼자 그런 생각이 난 게 아니에요. 수십억의 의식들이 한데 모아서 그렇게 생각을 한 거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돼요.

되고 안 되는 건 믿음의 문제 같아요

질문 되는 것도 법이고 안 되는 것도 법이라는 말씀을 새기면서 자유롭게 생활하려고 하고 있는데, 저의 경험으로 보면 안 되는 것은 믿음에 대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정말 진실로 100% 믿는 일은 되었지만 조금이라도 의심이 붙는 경우는 안 됐거든요. 그런 생각들이 옳은 생각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그것은 믿는 자에게만이 화해서, 더러운 게 깨끗한 걸로다가 화해서 나올 수 있죠. 믿지 못하는 자에게는, 만약에 서류를 줬다 뺏었다, 줬다 뺏었다 하면 오고 가면서 그것이 흐지부지해지지 결정적인 문제가 되질 않듯이 결정적으로 허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질 않죠. 되는 것도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 안 되는 것도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양면을 다 놓고 그저 진실로 믿고 맡길 수 있는, 정말이지 열쇠를 가지고 행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라야 합니다. ‘되고 안 되는 건 너밖에 할 수 없다.’ 내가 마음을 ‘되게끔 해야 내가 사니깐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그냥 맡겨 놓아야지, 맡기면서도 의심이 나고 또 맡겨 놓고 조금 지내다 보면 또 의심이 나고, 그래서는 맡길 수 없는 거죠. 맡길 수 없는데, 결정을 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저 자생 중생들이 화해서 보살행을 합니까?

유마힐 거사가 병을 앓고 있는데, 병문안을 간 문수에게 어떠한 말을 했어요? 여러분은 다 잘 아시죠? 중생들이 병이 다 나아야 내 병이 낫는다고 했습니다. 그거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몸뚱이 속에 생명들이 다 작용을 해서 병이 나아야 내 몸뚱이가 건강하지 않아요?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어떻게 중생들이 다 나아야 내 병이 낫는다고 하니까 죄 외부의 중생들이 다 나아야 내 병이 낫는다고 하는 줄 알고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그 잇속 없는 생각들을 하십니까. 내 자생 중생들부터 건져야 화해서 나투면서 웅신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 하다못해 벌레들에게까지도 응해 주시는 것이 천차만별로 보살 응신으로서 나툰단 말입니다. 그러니 내 자생 중생부터 제도해야 된다 이런 말이에요.

이 들고 나는 마음을 놓는 것도 여러 가지 있죠. 이 내 마음을 진짜로 믿고 거기다 놓아야 이 자생 중생들한테 통신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통신이 안 되거든요. 그렇게 절대적으로 믿지 않으면 통신이 되질 않아요, 절대. 통신이 되질 않으니까 작용을 못 해 주죠. 안에서는 안의 작용을 하고, 이 세포에서는 바깥으로 모두 나투면서 마음 조절을 하면서 작용을 해 주는데, 이건 신호가 들어가지 않는데 무슨 작용이 됩니까? 그러니까 “잘되는 것도 너의 마음의 법, 못되는 것도 마음의 법이니, 믿으려면 믿고 안 믿으면 안 믿고 마음대로 해라. 자유다, 그것도.” 이런 거죠.

자유라는 그 자체는 바로 누가 자유를 찾느냐. 그건 여러분이 모두 자유를 찾아야 돼요.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누가 잘 먹는 사람이 대신 먹어 준다고 해서 내 배가 부르진 않거든요. 대신 먹어 주는 건 공덕이 하나도 없고 영원히 그 무명의 굴레에서 빠지지 못해요. 그러니깐 뭐든지 불바퀴에 그냥 놔 버리는 겁니다. 놔 버려요, 그냥. 놔 버리면 그냥 아무것을 다 놔도 불바퀴에서는 타 버리게 돼 있어요. 무조건 오면은 무조건 타 버려요, 믿고 놓으면. 무조건 그것이 타 버리고 무조건 생산이 되는 거예요, 그냥. 자동적으로 생산은 되는 거예요. 네 마음이 금이면 금이 생산이 될 거고, 무쇠라면 무쇠가 생산될 거고, 넝마라면 넝마가 생산될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자유예요?

관하는 것과 자신과 대화하는 것

질문 관하는 거와 자신과 계속 대화하는 것이 다른가요? 저는 나름대로 방에 앉아서 주인공과 대화를 하는데 너무 생각으로 짓고 있나 하고 약간 허한 생각이 들어서요.

답변 그것도 그냥 거푸장스러운 생각이라고 볼 수 있죠. 그렇게 광대하고 넓고 천차만별로 나투고 이러는 도리를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든요. 믿지 못하니까 허전하지, 믿어 보세요, 허전한가.

그런데 과학적으로 지금 벌어지는 일들, 그렇게 모르겠어요? 마음으로 하는 건 빛보다 더 빠르게 단축하는 거고, 지금 과정에 있어서 그거는 한계가 있는 거지마는 팩시밀리 왔다 갔다 하고 인공위성 띄워서 모두 전파가 되고 이러는 거 느끼지 못합니까? 그러면 그거 보이지 않는 데서 그렇게 해서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움죽거리게 하는 거,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리고 또 대화를 누가 하랬습니까? 관하랬지!

자기가 있는 데에 자기가 있는 겁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예전에도 그렇게 살아왔어요. 제 놈이 있다면 절도 지을 거고 제 놈이 없다면 못 지을 거니까, 난 탕평 살았어요. 왜? 믿으니까. 제 놈이 있다는 거를 믿으니까. 제 놈이 할 수 있다는 거를 믿으니까. 어떠한 거라도 할 수 있다는 거를 믿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믿지 못하니까 그렇잖아요? 왜 자기 끌고 다니는 자기 영원한 친구를 못 믿습니까, 자긴데! 자기 몸뚱이는 집이에요. 자기 영원한 친구의 집. 집하고 둘이 아니에요. 물건을 해서 끓여 내면 오븐에 넣어야 끓여 내죠? 그 오븐도 집이란 말입니다. 물건 해내는 집.

그러니까 대화를 하되 대화가 아니라 관하는 거 ‘야, 네가 있다면, 진짜 있다면 이거 지금 급한데 너밖에 할 수 없지 않겠느냐.’ 하고 거기 맡겨 놓고 지켜보는 것. 그렇다고 해서 꼭 앉아서, 방 안에 들어앉아서 문 걸어 잠그고 지켜보라는 게 아니에요. 방 안이나 방 바깥이나, 들이나 산이나 똑같은 자리에요,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가. 그래서 공부한다고 뭐, 저 산속으로 들어가고 이러는 거는 거푸장한 짓들이라고 봐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이 소립니다. 마음이 산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달라지고 들로 나오면 마음이 달라지나요? 마음이 있는 자리는 자기 몸뚱이 있는 자리에 그냥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의사로서 역부족을 느끼는데…

질문 저는 산부인과 의사인데요, 병원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길 때, 예를 들어 산후 출혈이 너무 심해서 위험해지거나 분만 중에 진통을 견디지 못해 애한테 이상이 생기는 등, 이런 경우에 저도 간절히 관하지만 역부족일 때가 있습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이 지금 주인공이다 이럭하는 것도 이름이며 방편입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그거는 내가 한다 안 한다 할 게 아니라 그대로 인식이 돼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냥 이런 건 위험하니깐 아예 이렇게 해야 되지 않나 하는 거 말입니다. 아주 관하고 그렇게 되지 않게끔 하라고 그거 단정 지어서 결정을 지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말입니다, 자기 공체에 들어 있는 자기 원소가 진짜로 자기라는 걸 믿고 알아야 되겠죠. 근데 딴 생각을 하면서 딴 데로 이렇게 빠지면서 이렇게 저거 하다가는 그것이 100% 믿어지지가 않죠. 그러면 내가 믿지 않는 이상에 환자도 믿지 않게 되죠, 서로가.

옛날에 공부를 하다 보니까 이렇게 “넌 어디서 왔니?” 그러니까는 “색경을 일어나서 봐.” 그래 색경을 보니깐 내 상판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상판을 보니깐 똑같죠? 그래요. 이렇게 이게 거죽에서 볼 때는 똑같지만, 내가 너라고 할 수도 없고 나라고 할 수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정신계에서는 수없이 바꿔지는 거. 바꿔진다 이겁니다. 화해서 바꿔지니까 너는 거기에 발끝도 못 쫓아온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 뜻을 알아라 이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정말이지 아주 재주가 뛰어나고 묘법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걸 써먹지 못한다 하는 것은 이 모습 가진 나가 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그런 얘기 했죠. 모습 가진 나는 자가 되고 바로 보이지 않는 자기는 부가 되고, 자로 오면 자가 하나가 되고 부로 가면 부가 하나가 되는데 그건 무슨 연고로 그렇게 되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 부의 모습이 나로만 생긴 게 아니라 쓸모 있게 이걸 화해서 변경이 돼야 되겠다 하면은 그냥 그대로 그냥 변경이 되고 바꿔지는 거죠. 바꿔져서 그게 실천에 옮겨지는 거죠. 그러니깐 말로 할 수 없으리만큼 실천이 되기 때문에 얼른 쉽게 말해서 “참 묘하다. 그건 도깨비장난 같구나.” 이렇게도 선지식들이 말을 했어요.

그러니깐 만약에 진짜로 선생님의 원소 자체 주인공을 믿는다면 그런 걱정은 하나도 할 게 없죠. ‘주인공. 그렇게 하면 안 되니까 끝까지 이렇게 해.’ 하고. 이런 사람도 있었죠. 어린앨 낳고 그렇게 해서 피가 나오는데 코로도 나오고 이게 전부 하혈을 하게 되니깐 다 죽게 돼서 여기다가 뭐, 숨 쉬는 거 꽂고 이러고는 있는데 내가 뭐라고 그런 줄 아세요? 내일 퇴원하겠느냐고 물었어요. 내일 퇴원시키겠느냐고. 그러니 미쳤다고 그러지 그거 성했다고 그래요? 그래 퇴원시키겠다고 그러고 그 병원에서 나와서는 바로 5분이나 됐나? 그게 다 멎은 거예요. 그러니 그걸 말로 어떻게 합니까. 그건 말로 할 수는 없잖습니까. 어디가 어떻게 되고 어디가 어떻게 됐다는 거는 다 알겠지만 그건 말로 해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건. 선생님 한 찰나의 한 생각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 속에서 나빠진 애들이나 거꾸로 되어 있는 애기나 그런 얘기가 많거든요. 그러면 그럴 때 한번 돌아서 바로 서게끔 되는 것도 자기 원소가 다 해야죠. 그래서 그 “태교를 해라. 태교를 해라. 태교를 하면서도 자꾸 관해라.” 그럽니다. 그래서 애기 원소한테 통신이 되면은 그 애기 원소가 애기가 아니니깐, 애기를 이끌어 주는 원소니깐 그 에너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니까 그 주인공이 자기를, 그 애기를 잘 나오게 하죠. 순산을 하게 하죠. 그런데 그렇게 순산하게 하는 것은 태반 옆에 애기의 그 발이 뒤꿈치가 거기에 딱 닿으면서 거길 누르고 나오거든요. 그래야 빨리 그게 산모도 힘이 생기고 애기도 힘이 나고 그래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어린애 발뒤꿈치가 거길 닿아서 그렇게 하는 거는 그 어린애가 스스로 그렇게 돼야지 억지로 그렇게 하는 건 아니죠. 그렇지만 스스로 그렇게 돼요. 관해서 통신이 되면은.

관해서, 즉 말하자면 애기의 원소하고 산모의 원소하고 그렇게 선생님이 관하는 그 마음하고 동시에 같으면 아주 그냥 애기가 힘이 생기고 절대로 나쁘게 되지를 않죠. 그리고 빨리 순산될 수가 있죠. 그러나 더디다 해도 더딘 대로 좋은 수가 있거든요. 지혜능단을, 지혜의 그 정신력에 대한 문제를 덜 가지고 넣어졌다 이러면 조금 쉬는 동안에 그 정신력을 거기다가 되집어넣을 수도 있으니깐요. 이 정신력이 아니라면 우린 송장 됩니다. 이걸 말로 하려니깐 힘이 드는군요. 그게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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