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가끼루마 스님

이총 앞에서 사죄하는 ‘가끼루마’ 스님. 그는 일본에 있던 이총, 비총, 울산동백, 북관대첩비를 한국으로 이전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2년 나는 일본 형무소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강연을 했다. 함께 동행한 김도영 장군이 통역을 맡아 줘서 언어의 장벽 없이 성공적으로 강연을 마쳤다. 김 장군은 강연이 끝나자마자 내 손을 잡고 급히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동경으로 갈것을 재촉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채 나는 김 장군의 안내로 동경 시내 외딴 골목에 있는 다락방 2층으로 안내되었다. 작고 허름한 방 작은 책상에 명패 하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세계만국평화회 총재’라고 적혀 있었다. 그 너머에는 초라한 차림의 스님이 앉아 있었다. 얼핏보아 분위기가 꼭 사기꾼 행색 같았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은 모르는 것 같다. 그 스님이 훗날 죽을때까지 평생 도반이 된 가끼루마 스님일 줄이야.

임진왜란때 만행 일본인 손으로 사과
이총, 비총, 울산동백 등 귀향 큰 공헌
11월 17일 ‘가끼루마’ 헌창비 제막 예정

김 장군이 한국서 온 스님인데 일본인 형무소에서 재소자들을 위한 강연을 했다고 소개하자, 가끼루마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연발 감사하다고 합장 반배를 해댔다. 하지만 꾀죄죄한 첫인상에 가끼루마는 정이 안갔다. 그래서 첫 만남 이후 나는 그를 잊었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고금석 사형수 때문에 그 충격으로 만사가 귀찮았다. 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과 대화하기도 싫었다. 한 여관방에 홀로 앉아 울고 또 울었다. 내가 교화의 공을 들였던 고금석의 죽음으로 다가선 고통은 당시엔 참지 못할 정도였다. 내가 여관방서 전전긍긍하고 있을때 일본인 가끼루마 스님이 서울을 방문했다. 하지만 나는 그 스님이 싫었다. 스님은 꾀죄죄하고 가난했다. 가난해서 싫어한 건 결코 아니다.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고집이 대단한 스님이어서 피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인 통역을 통해서 나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 했던 모양이다. 스님이 다른 일이 있어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굳이 만나게 해 달라는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3년 동안 만난 사형수의 집행을 보고난 후 여관에 틀어 박혀서 울고 있다’는 사실을 통역자가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 가난한 가끼루마 스님이 돈 오만 엔(50만원)을 주면서 자신은 한번도 본적 없는 죽은 사형수에게 향초라도 사서 피워달라고 전했다. 그 일로 나는 가끼루마 스님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 가끼루마 스님의 도움으로 나는 여관방을 나왔다. 그리고 가끼루마 스님에게 그 유명한 일본의 이총에 대한 실마리를 꺼냈다

고금석의 죽음이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갈망한 역사적인 이총의 영혼을 모국인 한국으로 옮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사스럽고 역사적인 일이 벌어졌다.

2009년 11월, 일본인 가끼루마 스님이 부인 도시마에게 유언을 남겼다.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가진 게 없이 떠나는 이 사실을 후회하지 않는다. 당신은 남은 인생을 착한 일 많이 하다가 오너라. 미안하다. 남겨주어야 할 물질에 집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회 없이 깨끗이 살다 간다.”

가끼루마 스님은 말기 암으로 병원에서 퇴원조치를 내렸다. 집에서 세상을 떠날 때는 편안히 웃으면서 빈손으로 떠났다. 나는 가끼루마 스님이 곧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해 봄에 그의 얼굴을 보니 시간적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건강하나만 믿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열정을 쏟았다. 불같은 불심 하나로 뭉친 그는 흔히 말하는 일본의 양심이었다. 그에게는 절, 집, 사무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가끼루마 스님이 죽고 나니 더 존경스러워졌다. 한국을 위한 그의 마지막 열정으로 북관대첩비를 북한으로 넘기고 떠났다. 북관대첩비 인도가 결정되는 마지막 시기에 그는 암 진단을 선고받았다. 수술을 하자는 의사의 권유를 뿌리쳤다. 임진왜란 때 우리의 뼈아픈 치욕을 일본인 손으로 사과하려는 마음에서 그는 자신의 암수술도 거부했다. 임진왜란 당시 치욕인 이총, 비총, 울산동백, 북관대첩비까지 가끼루마 스님의 열정에서 성공적인 귀향을 일궜다.

가끼루마 스님은 자신의 최대 업적 ‘이총’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일본인들은 육체보다도 영혼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북관대첩비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암수술을 결정했으나 이미 늦었다. 수술을 포기했다. 그 후 그는 경북 사천에 힘겨운 걸음을 했다. 일생을 담은 ‘이총’의 안장식에 참석했다. 호흡이 어려워 조그만 걸어도 힘겨워했다. 그는 삼중 스님에게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했다. “이총의 안장식까지 마무리 지어주어서 고맙다” 그의 자서전 출판기념일 2008년 1월, 나는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죽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 인생의 자랑거리인 이총, 비총, 울산동백, 북관대첩비 등 많은 업적들에는 한국에 대한 사랑이 넘쳐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갔다. 하지만 그는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부인이 대신해서 나왔다. 암수술을 뒤늦게 해봤으나 수술경과는 그리 좋지 않다고 했다. 부인은 6개월 이상 견디지 못한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한국인 한 사형수가 만들어서 선물해 준 염주를 머리에 대고 누워있었다. 내가 방안에 들어서니 그가 일어났다. 예의가 깍듯한 그는 겨우 일어나서 나를 반겼다.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가끼루마 스님을 생각하면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아픈 역사를 대변해준 그의 은덕에 존경심이 절로 솟는다. 평소 내가 가끼루마 스님의 얘기를 자주해서 그 스님의 위대한 행적을 알고 있는 내 제자 현도 스님이 큰 마음을 냈다. 올 11월 17일에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경주 자비정사 마당에 가끼루마 스님의 현창비 제막식을 준비중이다. 생면부지 알지도 못하는 가끼루마 스님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스승의 마음을 헤아려 세우는 제자의 그 마음이 가을하늘처럼 곱고 아름답다. 갈등이 증폭된 한일 양국 관계에 가끼루마 스님의 이야기가 화해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지하에서 가끼루마 스님도 그것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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