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살아서 저승길을 공부하는 거예요

우리는 왜 태어나 고통받으며 사나

질문 태초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편했을 텐데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인간까지 와서 수많은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지요.

답변 생각을 가만히 해 보세요. 바람이 있고 흙먼지가 있고 물이 있고 이건 스스로 자생으로서 그냥 생긴 거죠. 이건 자연의 원리면서 자연의 이치예요. 그렇게 생겨서 우리가 모아지고 모아지고 하다 보니깐 원기가 생긴 거죠. 그래서 생명체가 생기는 거죠. 그렇게 이날까지 진화돼서 이렇게 인간도 제일 나중에 됐다 합니다. 그런데 제일 나중에 돼서 인간이 살다 보니깐, 진화도 되고 문리도 터지고…. 지금 보세요. 의학이나 과학이나 얼마나 많이 방대해졌나.

그러나 우리가 최초에 내가 어디서 온 거를 모른다면 모두가 아주 귀한 과학자가 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학자가 아니죠. 남의 생명을 우습게 생각하고, 남의 일을 모두 우습게 생각하고 깔보는 유가 많고, 아상과 아만이 많아서 돌아보질 못해요. 지금 이 말을 했는데 왜 스님은 저 말을 하시나 이러시겠지만, 우리가 이렇게 왜 사람으로 태어났느냐. 수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곤충으로서부터 인간으로 올라오기까지 수만 년, 아니 헤아릴 수도 없는 그 세월을 이렇게 얼마나 많은 광년을 거쳐 왔나. 우리가 지금도 그 숫자가 없죠. 숫자가 없이 지금도 가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이게 곤충이 너무 성하고 악이, 너무 독이 많으면 그냥 멸하게 하거든요. 죽게 만들고, 어떻게 돌아가든지 죽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중에도 인간이 이렇게 문리가 터지고 이렇게 저거 하면 이 중세계를 벗어나게 되거든요. 중세계를 벗어난다 하는 건, 이 인간도 말하자면 곤충의 주머니예요, 이게. 곤충의 주머니. 그런데 독의 곤충의 주머니냐, 선의 곤충의 주머니냐. 이거에 따라서 이 곤충의 주머니가 벗어지고 곤충의 주머니를 더 만들고 이러는 거죠. 만약에 그러한 문제가 없었다면 우린 이 산하대지가 전부 새카만 그냥, 뭐라고 그럴까? 까만 그냥, 뭐라고 말을 해야 옳죠? 허허.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게 되겠죠. 하지만 그것이 또 불에서도 살고, 캄캄한 데도 살고 모두 사는 게 있기 때문에 어디선가 또 생기겠죠.

우리가 지금 죽으려고 깔딱깔딱할 때
옆에서 잘못하고 잘한다고
그거 참견하게 생겼습니까.

그러니까 이거는 어쩔 수 없어요, 그냥.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거니까 이 공부를 어서어서 해서 이 벗어나는 데만 노력해라. 그렇다고 해서 인정을 베풀거나 그러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버리라는 것도 아니고, 살면서 항상 베풀면서 자기 정신계의 자기, 자기를 꼭 붙잡고, 물질계의 자기는 정신계의 자기를 믿고 오직 거기다 맡기고 길을 걸어라 이거죠. 어쩔 수 없잖아요, 이왕지사 태어났으니.

그래서 자기가 태어났으니까 상대도 있고 종교도 있고 뭐,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도 있지 아, 당신이 없다면 뭐가 있겠어요? 이게 말을 하자면 그것이 얼마나 긴 말인 줄 아세요? 사람이 왜 태어났느냐. 이 말을 하자면 오늘 하루 종일 해도 못다 하고 내일까지 해도 못다 하고 모레까지 해도 못다 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왔든 인연이 있으니깐 나왔겠죠. 나왔으니깐 나부터 알아야지, 내가 없는데 어떻게 상대가 있고 종교가 있느냔 얘기예요. 그러니깐 부처님께서 아주 간략하게 “네 나무는 네 뿌릴 믿어야 공덕이 있느니라. 딴 나무에서 네 나무에게 에너지를 보내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너는 네 뿌리에서만이 네 싹을 돕는다.” 이렇게 간략하게 가르쳤어요.

우리가 지금 절에서 공양 올린다 하는 것도 이게 전부 가르치는 도의 길입니다. 말은 그럭하면서 그 뜻이 뭔지 몰라서 걱정이죠. 예를 들면 “꽃공양” 이러는데, 어떻게 이 세상이 벌어질 때에 꽃만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나무도 생기고 전부 생기고 난 뒤에 그것이 생겨 가지고 자꾸자꾸 진화됐으니깐 무척 오래 있다가 인간이 나온 거죠. 그 기간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그걸 벗어나려면 이게 모두가 공해서 공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려야, 한마음으로서, 공심으로서 공양을 올려야 공덕이 되지, 공심이 아니고 그냥 갖다가 삐쭉…. 이거를 올릴 때는 딴 생각 없어야 돼요. 그런데 벌써 머리에 떠오르는 게 내 아들, 내 남편 뭐, 뭐 뭐 이런 게 생기지, 이 꽃공양을 한다는 거는 생각지도 않아요. 이거 갖다 그냥 놓으면서 말입니다. 아니, 그러니 이게 적응이 됩니까. 이게 공덕으로 적응이 되느냐고요.

이 마음도 그래요. 벌써 쌀을 갖다 놓고 초를 켜고 그럴 때 이 촛불을 켜는 게, 내 마음의 불을 켜고 나면 내 이 몸이 타서 깎아지는 듯한 그 애처로운 마음으로써, 그 공심으로써 공양을 올려야지, 부처님께서 공심인데 내가 공심이 아니면 어떻게 맞아 들어가겠어요? 이 발우공양도 공양이라고 그러죠. 왜 공양이라고 그랬느냐. 스님네들만 앉아서 먹는 게 아니잖습니까. 스님네들은 곤충의 바가지에요. 중생들의, 즉 말하자면 주머니들이죠. 주머니가 그 주머니 구녁 뚫린 데로 그거를 넣어요. 허허. 주머니 구녁 뚫린 데로 넣는다고요. 거기서들 죄 발라서 제가끔들 모두 먹어요. 그러고 자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라느냐. 이 사람 하는 행동 따라서, 의식도 다 거기에 따라서 가거든요. ‘먹기 싫어도 주는 대로 먹어.’ 그러고선 넣어 준단 말입니다. 살기 위해서 그냥 살아가니까, 살아가니깐 “살기 위해서”라는 것도 없고 그냥 살았으니깐 살기 위해서 우린 먹는 거죠. 그런데 그게 주머니라는 걸 몰라요, 모두. 곤충의 주머니라는 걸 하나도 납득을 못 해요. 그래 그 구녁 뚫린 데다가 넣어 주는데 어떻게 내가 먹는 겁니까? 이 주머니가 먹는 겁니까? 이 주머니 속의 곤충들이 먹는 거지.

그러니까 악의 독이 있는 곤충의 주머니냐, 독이 없는 곤충의 주머니냐. 여기에 따라서 또 많은 문제가 생기죠. 독이 있는 주머니에서는 독성이 생산이 되는 거고 독이 없는 주머니에서는 독성 있는 데 잡아먹히고 이러더라도 선의가 발생되는 거고 그런 거죠. 우리 인간만 그런 게 아니에요. 옛날에 인간이 아주 적었을 때는 어디 가면, 하다못해 까마귀들이나 이런 벌들, 개미들 이게 뭐, 거꾸로 메달려서 하는 거 뭐죠? 박쥐! 허허. 난 이름도 모르지만 그런 것들도 사람만 만났다 하면 금세 와 덤비죠. 그러면 금세 없어졌답니다. 그 박쥐는 박쥐대로 먹고서 그래도 뼈다귀는 남기니까, 껍데기는 남기고 그러니깐 뭐, 딴 것들이 먹고 이렇게 하지만, 이 개미라는 거는 뼈다귀 속에까지 들어가서 다 먹어 치워요.

이게 곤충의 주머니예요. 이게 곤충의 주머니에서 한번 벌어졌다 하면 정말…. 그래서 요즘 내가 이렇게 말을 하죠. “정신계에서 정신을 뺏어 먹고 사는 거니깐 정신을 뺏기지 않으려면 정신계의 내 주인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 이런 거요. 정신을 뺏어 먹고 정신을 뺏기고 이렇게, 육이 있는 거는 육을 뺏어 먹고 죽이고 살지만 이 사람들은 정신을 뺏기고, 정신을 뺏기곤 그때서는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다가 그냥 스러지는 거죠. 이게 현실이에요. 그냥 옛날 얘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와 같이 우리의 곤충의 주머니를 다 벗어 버리기 위해서 모든 거를 그대로 놓고 가야 한다. 그대로 남을 섭섭지 않게 해야 한다. 말을 항상 조심해서 해야 한다. 똑같은 말이라도 이쪽이 성을 내고 하면 저쪽도 감촉이 좋지를 않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도 저거 하면 이 곤충이 빨리 진화되지 않죠. 그래서 이것이 빨리빨리 되려면 그렇게 해서 이게 둘이 아니어야 한다.

이 마음공부 하는 분들은 반 이상이 벌써 다 줄고, 어떤 분들은 반이 줄고, 어떤 분들은 삼분의 이가 줄고, 그냥 요만큼 남고 다 줄어 버리고 없고 이런 분들도 많아요. 이거는 누가 일러 줘서 아는 게 아니라 벌써 이게 통하거든요. 감촉으로 다, 다 통해요. 악성은 악성대로 통하고 선의면 선의대로 통하는데, 악성은 악성대로 왜 선의로다가 이끄느냐. 독을 빼면 선의가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독성을 빼기 위해서 이런 거를 저거 하면 독성이 다 없어지면서 이것이 99%가 부처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에 이 중세계를 떠나게 된다 이런 거죠.

그런데 왜 태어나게 돼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그랬는데 지금 세상이 이러니 세상대로 따라가려니까 얼마나 고초가 많습니까. 하여튼 여러분들, 이 사람으로 치지 마시고 곤충의 주머니로 치시고 항상 ‘그 곤충 주머니나 곤충이나 둘이 아니고, 우리도 이런데 모두 딴 사람들도 다 둘이 아니겠지.’ 하고 모두가 둘이 아니라고 생각을 할 때에 바로 그 믿어지는 거, 그 방망이 하나면 이 온 우주를 때려잡고도 남음이 있어요. 이거, 이 방망이요. 이 주인공이라는 자기 뿌리인 불성 말이에요. 이거면 이 세상을 다 잡고도 남음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세요.

금생에 꼭 깨달음을 얻으리라 했는데…

질문 안녕하세요. 저는 처음엔 금생에 꼭 깨달음을 얻으리라 다짐했는데 갈수록 마음을 다스리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아직 화나는 마음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어떡하면 이 마음의 힘이 단단해질 수 있을는지요.

답변 그런데 이 진짜 즉석으로 들어가는 이 공부는 줬다 안 줬다, 잘했다 안 잘했다 이런 논의가 없어요. 따귀를 맞았으면 맞은 대로. 또 줬으면 준 대로 내가 준 것도 아니고 내가 맞은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관여를 왜 합니까. 금방 요기서 요렇게 따귀를 때렸는데 금방 돌아갔으면 그게 없어지죠. 여기서 잘못됐다고 꼬집고 착을 두고 그냥 애쓰지 말라 이겁니다. 이건 금방 또 없어져요.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데 어느 때에 그것을 때렸다고 하며 어느 때에 내가 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를 부처라고 세울 수 있을까요? 공부를 했다고 떳떳하게 세울 수 있을까요? 이름해서 세울 게 뭐 있겠습니까? 묵묵히 걸어가면서 바로 그렇게 물 한 그릇 마시면 대장부 살림살이 족할 것을 말입니다. 아까도 시를 한 수 읊었듯이

“음지 양지 없는 천지

한 손 들어 삿갓 쓰고

해와 달을 석장에 걷어 메고

푸른 산 한 발 딛고 물 한 그릇 떠 마시니

대장부 이만하면 족하지 않을까.”

책을 읽어서 수많은 팔만대장경을 외로 읽고 거꾸로 읽고 이래도 이 자기의 참 생명수는 맛을 못 봐요. 책이 자길 보고 자기가 책을 보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글자를 볼 때에 글자를 외우고 외운 채로 말을 합니다. 몸 떨어지면 글자도 말도 다 떨어질 것을.

그런데 이 선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마음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데서 선맥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손들을 기를 때 얼마나, 그 자손이 만약에 물에 빠지게 됐다거나 공부를 못해서 영 낙오가 됐다거나 이런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픕니까. 그 사랑하는 고 마음. 고것이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세세생생에 꺼지지 않는 불! 누구나가 감춰진 불이 다 있어요. 중생도 불이 있고 부처도 불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눈이 없으니까 보지 못해서 그 빛을 발하지 못할 뿐이지 중생이라고 해서 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서 자기 마음을 자기가 지키지 못하고 모르니까 바로 자기 빛을 자기가 못 보는 것뿐입니다.

어느 스님이 가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어엿하게 가다가 고만 어느 뱀소굴로 들어가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잡아서 다시금 또 사람 사는 데로 인도를, 인도환생을 시켜 놓고 껄걸 웃으면서 “내가 지옥으로, 나는 천당으로 가지 않고 지옥으로 가서 이렇게 건지려고 했더니 지옥도 천당도 둘이 아닐세. 삼라만상 내 마음에 다 들어 있으니 나지 않는다, 난다 개의할 게 없노라.”

그것은 보이는 모습을 가져야 산 게 아니거든요. 모습을 안 가졌어도 나 아님이 아니니 모두 내 모습이에요. 모두가 내 모습, 내 마음. 모른다 할지라도 한번 자기가 돼 볼 수 있는 아량과 지혜를 갖는다면 분단이 생기지 않고, 의리가 깨지지 않고, 화목하게 되고, 이해가 되고 슬기로워지고, 바로 이 도의 심을 알게 되는 거죠.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급하게 화가 나면 남을 생각할 여지가 없죠. 그러나 한번 숨을 들이쉬면서 안으로 굴리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는 말도 공손하게 나가고, 또 한번 저 사람이 돼 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이랬을 때 바로 화목한 것입니다.

화목을 모르고 공한 도리를 모른다면 우리가 지금 천차만별로 돼 있는 생한 도리를 모른다 이겁니다.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하나도 가질 게 없어서 나는 공부를 했는데 하나도 버릴 게 없더라. 그러면 가는 데마다 나고, 가는 데마다 내 자리고, 가는 데마다 내 아픔이고, 가는 데마다 내 웃음이고 즐거움이고 그러니 구태여 내 몸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또 어떻게 낙오가 될까 걱정하고, 내가 부처가 되려고 앨 쓰고, 내가 깨달아야지 하고 앨 쓰고, 그렇게 발광 안 해도 되지요.

그것이 깨달으려고 앨 쓰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모든 것을 한데 주인공에서 나온 거 주인공에다가 모든 거 일체 다 놓을 줄을 알아야 사방이 터지지요. 이거는 문이 많은 데서 문을 찾으려니까 어렵고 문이 하나도 없는 데서 문을 찾으려니까 또 어렵다 이겁니다. 이 모두가 그러한 거예요. 우리가 생활하면서,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이 자체가 그대로 참선이인 거예요. 우리가 앉는다고 하고 앉고, 선다고 하고 서는 그런 사람, 공부 백 날이 가도 못 합니다.

관하는 걸 기복으로 하는 것 같아요

질문 제 주변 사람들을 보면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참된 깨달음보다 늘 자기 가족의 안위나 개인적인 문제 해결에만 집착하여 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걱정이 좀 됩니다. 큰스님께서는 늘 기복으로 하지 말라 그러셨는데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기복이 아닌지요.

답변 기복이라기보다, 당신이 만약에 늙어서 죽을 때에, 죽을 때 남 걱정하게 됐소? 내가 부지런히 지금 급해서 길을 간다면 옆에서 싸운다, 옆에서 나쁜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냥 그 길을 급하게 달려가지 여기서 참섭하고 그 급하게 지금 가서 일할 거를 폐지시키겠소? 그렇죠? 그럼 극치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죽으려고 깔딱깔딱할 때 옆에서 잘못하고 잘한다고 그거 참견하게 생겼느냐고요?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게 자기가 나왔던 구녁으로 다시 들어가서 공부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왔던 구녁에다가 자꾸 관하니까 거기에서 자꾸 힌트를 주는 거죠. 힌트를 주고 어떤 때는 잘되게 했다가 안되게 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되게 하는 거를 그대로 ‘안되게 하는 것도 너다.’ 그러고 거기다가 놔야 될 텐데…. 그게 굴려 놓는 거거든요. ‘안되게 하는 것도 너니깐 되게 할 수도 있잖아!’ 하고 거기다 놔야 굴려 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된다 안 된다를 다 놔 놓고 자기가 생각 그 자체를 그냥 지금 현재의 생활을 판단해 가지고, 자기 분수도 생각해서 거기다 정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도 빠질 게 없어요.

그런데 그거를 남이 그런다고 하는데 남이 그러기 이전에 남 걱정하는 것도 끄달리는 거거든요, 그게. 죽어가는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참견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어서 지금 죽은 저승엘 가는데. 그러니까 그거 조심하고요, 모든 거를, 보기에 안 되는 거 같고 보기에 좀 트릿한 거 같고 못나게 보이고 또 그러더라도 ‘어, 내가 전자에 그렇게 못났을 때의 내 모습이로구나!’ 하고 자기 탓으로 돌려야 돼요, 모든 걸. 그러지 않으면 살아서 저승에는 갈 수가 없으니까 말이에요.

여러분한테 그걸 잘 알게 해 주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살아서 저승길을 공부하는 거예요. 저승길을 알아야, 우리 물질세계에 살아서 사는 거는 다 알았으니까 저승세계에 들어가서 알아야, 양면을, 삼세를 둘 아니게 다 안아야 내가 누구를 건져 준다, 뭘 한다 하는 거죠. 지금 신도님들도 자꾸 그냥, 그대로 믿고 자기한테 하면서 그대로 옆의 사람, 꼭 이거는 돌봐 줄 사람, 즉 말하자면 돌봐 주지 않을 사람이나 돌봐 줄 사람이나 자기한테 인연이 되는 사람한테 그렇게 관해 주고, 또 일러 줄 수 있는 사람은 관하라고 일러 주고, 그러지 못할 사람은 그냥 관해 주고 하는 거죠. 오다 가다가도 그렇게 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하다가 보면 “아유, 당신이 일러 줘서 참 감사합니다.” 하고 “아유, 다 나았습니다.” 이러고 하고 잘됐다고 하고, 이렇게 감사하다고 그러는 사람도 있고, 아주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런 소리도 또 안 하죠. 그렇지만 남을 건진 건 사실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두가, 아픈 사람이든 어떻게 극난에 빠져 있는 사람이든, 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에요. 듣는 사람이 괴로워서 자기 편안하자고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나는 따지고 보면 내가 당신네들을 해 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괴로워서 괴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고, 한다고 말도 할 수가 없다.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깐 말입니다. 그게 부처님 법이에요. 그게 부처님의 공법이라고요. 우리들도, “부처님은 공법이 있고 우리는 없나?” 그러지만 벌써 우리들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하나하나가 다 공법이에요. 그 많은 생명들이 다 한데 더불어 같이 살면서 같이 행하니까 공법입니다.

집안 우환이 산소의 영향인지요

질문 집안에 우환이 자꾸 생겨서 조상님 산소에 문제가 있을까 하여 천도재도 지내고 그랬는데 정말 산소의 영향이 있는 걸까요?

답변 그것도 마음에 달려 있어요. 어떤 때는 신도들이 와서 산소를 잊어버렸다고 할 땐 그 애로를 없애 주기 위해서 ‘어떡하나?’ 하다가 “그, 이렇게 가면 그 무너진 산소 보이지 않아?”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서들 보는 거는 고 장소만 보지만 이 부처님 법으로 이 안에서 주인공 자체 자불이 보는 거는 아주 세밀하게 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산소를 잘못 썼다 이래도 영혼만 건져 내면 되는 거죠. 몸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그 산소 탓이라고 생각질 마세요. 산소 탓은 아니니깐요. 그러니까 관할 줄 알면은, 관하고 이러면은 그게 다 없어져요.

그렇게 하는 대로, 관할 때도 ‘내가 이러지 않게 이끌어 가는 것도 너 아냐?’ 하고, ‘나를 지켜 주는 것도 너 아냐?’ 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살게 하는 것도 너 아냐.’ 하고 모든 거, ‘가정이 화목하게 하는 것도, 남한테 그 찌끄럭지로 취급받게 하지 않는 것도 너 아냐?’ 하고 ‘먹고살게 하게 하는 것도 너고.’ 이렇게, ‘귀인이 되게 허는 것도 너고.’ 이렇게만 관한다면 산이 문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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