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순간까지 기개 살린 윤의사가 그립다”
“죽는 순간까지 기개 살린 윤의사가 그립다”
  • 정리=김주일 기자
  • 승인 2019.08.04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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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윤봉길 의사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서 순국

암장된 유해 발굴해 1946년 조국에 봉환

1992년 12월 19일 ‘암장지적’ 비석 조성돼

2001년 12월 19일 69주기 추모제 봉행해

나는 효창공원을 자주 찾는다. 그곳에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가 모셔져 있어서다. 25살 꽃다운 나이에 역사속으로 장렬히 산화한 윤봉길 의사의 묘역을 찾을 때마다 나는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내가 윤봉길 의사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속에서다. 윤 의사의 의거 장면은 말만 들어도 영화속 한 장면처럼 감동과 긴장이 전해졌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상해 총영사 무라이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 윤 의사는 앞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라카와의 면전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이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도 적극 성원했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졌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현장서 붙잡힌 윤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 발굴을 부탁했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했다. 같은 해 6월 16일 서울로 유해를 옮겨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됐다. 3년 후인 1965년에는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됐으며, 기념사업회 역시 설립되었고, 12월 19일에는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비위를 서울 조계사서 발족하기도 했다. 이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윤봉길 의사는 내 가슴속에 항상 큰 자리로 존재해 있다.

2001년 12월 19일 나는 윤 의사의 얼과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 동경서 기차로 3시간 걸리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교외에 있는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를 기리는 ‘암장지적’(暗葬之跡) 비석이 세워진 장소로 향했다. 이곳은 윤봉길 의사가 암매장됐던 흔적을 남기고자 1992년 12월 19일 조성됐다. 12월 19일은 윤 의사가 순국한 날이다.

가나자와에 있는 ‘윤봉길 의사 암장지 보존회’는 당시 윤 의사의 유해가 일제에 의해 인근 육군묘지에서 벗어난 언덕 밑으로, 사람이 드물게 왕래하고 쓰레기 하치장으로 가는 통로에 묻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일제는 암장지가 묘지임을 알지 못하도록 아예 묘비나 묘표를 세우지 않았고, 봉분이 없는 평토장 형태로 만들어 행인들이 함부로 밟고 지나다니도록 방치했다고 한다. 당시 윤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이 조직된 것으로 안다.

노다야마 공동묘지의 한쪽 길로 접어들자 계단이 놓인 길옆에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이라 쓰인 비석이 눈에 띄었다. 그 앞에는 윤 의사를 기리는 꽃이 놓여 있었다. 암장지적비 왼쪽 옆에는 윤 의사에 대해 “장렬한 24세 6개월의 짧은 생애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체(유해)는 형법의 절차를 무시하고 비밀리에 암장돼 묘비도 없이 많은 사람의 발에 짓밟혔다” 등을 설명한 안내판도 있었다. 암장지 근처에는 1992년 4월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윤 의사 의거 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세운 순국기념비도 있다.

당시 나는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얼이 서린 현장에서 69주기를 추모하는 추모제를 스님들과 신도들, 교포 들과 함께 여법히 치렀다. 사실 나는 윤 의사의 친동생인 윤남의씨와 친분이 있었다. 40여년전 서울 인사동서 자주 만나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기회가 있었다. 동생의 기억에 의하면 형인 윤봉길 의사가 자신의 고향인 충남 예산 수덕사에 주석하신 만공 스님을 찾아가 처사계를 받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나는 그날 하루종일 추모제를 지내면서 일본의 서슬퍼런 협박과 고문에도 죽는 순간까지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던 윤봉길 의사의 순국 정신을 깊이 또 깊이 새겼다. 다음주 광복절이 다가오니까 더욱 윤봉길 의사가 그리워 진다. 건강이 좀 나아지면 다시 효창 공원을 찾아야 겠다.

2001년 12월 19일 가나자와서 윤봉길의사 69주기 추모제를 지낸 후 사진촬영을 한 삼중 스님(사진 오른쪽).
2001년 12월 19일 가나자와서 윤봉길의사 69주기 추모제를 지낸 후 사진촬영을 한 삼중 스님(사진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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