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 내 삶에 투영할 불교 실천론

불교의 이성적인 체계가 연기이며
이를 실천하는 방법론은 사성제다
무아와 무상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부처님이 설한 팔정도의 정견이다

그림=강병호

부처님께서 가르친 연기는 어떻게 사성제로 체계화 되는가? 연기가 사성제로 체계화 되는 과정은 부처님께서 가르친 불교교리, 불교의 전반적인 부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존재에 대한 인식문제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본 속성이 무아이고 무상이라고 했으며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무아와 무상을 아는 것은 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아는 것이 연기라고 했다. 즉 불교의 체계화는 근본적으로 무아와 무상에 대한 인식이 연기가 됨을 아는 것이다. 이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것은 무명이며, 아는 것은 연기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이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가 고이며, ‘무엇 때문에 모르는가’는 집이다. 모르는 이유가 집이고, 모르는 이유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고인 것이다. 여기서 고집멸도에 대해 도식화해보면 <표1.>과 같다. 

무명을 아는 상태가 바로 멸이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고 멸에 이르는 방법이 도이다. 그래서 두 세계를 나누어 놓고 보면 이것저것 모두 우리가 속한 현실세계이고 현실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즉, 깨달음의 세계로서 고집멸도는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고전적인 가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불교의 실천론인 것이다.

여기서 존재의 인식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이며, 다른 하나는 인식하는 ‘존재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우리가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불교를 안다고 했을 때 존재에 대한 인식론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연기를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12처 18계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육육법연기가 처음으로 성립된다. 다음 우리의 몸뚱이는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오온연기를 설명한다. 연기가 어떻게 끊임없이 생사를 윤회하는가? 육육법연기는 시간에 대한 연기, 오온연기는 공간에 대한 연기, 12연기는 시공간이 통합된 연기이다. “내 법은 점점 더 깊은 바다로 빠져들어 간 것 같다”는 부처님의 설법은 바로 육육법연기와 오온연기, 12연기에 대한 이해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인식론 구조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러면 존재의 인식론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행해야 하고 실천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바로 육육법연기, 오온연기를 체득하는 방법인 실천론이 사성제의 실천이다. 불교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인식구조 상부의 이성적인 체계가 연기이며, 이것을 실천하는 방법론은 사성제이다. 부처님은 연기를 터득하고 깨닫기 위한 실천방법으로 팔정도를 설명했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정견이다.

불교의 오랜 역사 속에서 부처님 당시 근본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모든 백성들이 불교를 믿게 된다. 부처님 당시에는 지식인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당시에는 계급이 철저했다. 노예계급, 서민계급, 정치계급, 종교계급, 불가촉천민이 존재했고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부처님께서 제일 먼저 타파한 것이 계급이다. 그 당시 타파되었던 계급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존재하는 곳이 인도이다.

많은 불가촉천민과 노예와 서민들에게 불교를 전하려고 하니 쉽지가 않았다. 배우지 못한 서민계급과 노예계급을 포함한 전 백성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불교가 필요하였다. 여기서 새롭게 탄생한 불교가 바로 대승불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이 대승불교이다.

지금 불교는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부처님 당시에 출발했던 근본불교 보다는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승불교에서 수많은 사람이 연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접할 수 있을까? 여기서 연기의 내용인 공으로 불교를 재도약한 것이다.

연기는 우리의 실제 생활 속에서 터득할 수 있는 새로운 진리가치인 공을 창출한다.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인 보살이 대승불교에서 만들어진다. 보살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인간상을 구현한다. 위로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하며 아래로는 우주에 있는 모든 가엾은 중생을 부처님의 세계로 이끌어가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 바로 보살이다. 이것이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보살과 새로운 가치체계인 공이 대승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승불교와 선불교
대승불교로 오면 근본불교에서의 팔정도가 육바라밀로 바뀐다. 육바라밀이 실천방법인 도가 된다. 보시, 지계, 인육, 정진, 선정, 지혜가 육바라밀이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가르침이 여섯 가지의 가르침으로 좀 더 적극적이고 실천론적으로 바뀐 것이다. 동아시아로는 근본불교가 아닌 대승불교가 전파된다.

한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이다. 부처님 당시의 근본불교가 아니라 대승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이다. 중국에는 백마사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된 것은 AD 64년이다. 64년이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후 500년이 흐르면서 불교는 근본불교에서 대승불교가 싹이 틀 무렵이다. 중국에 전래된 대승불교가 그대로 한국에 전래된다.

이렇게 전래된 불교는 중국서 교리불교로 발전하고 산스크리트어로 된 모든 경전이 중국의 한문으로 번역된다. 지구상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 중의 하나가 불경의 번역사업이다. 많은 경전의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중국불교는 교종이라는 꽃을 피우게 된다. 교종의 꽃을 피운 끝에서 중국화 된 새로운 불교인 선불교가 발생한다. 연기, 공이 불교의 근본적인 깨달음을 위해서 선불교로 구현된 것이다.

스님들은 참선 수행을 할 때 화두를 든다. 선불교의 꽃인 새로운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화두가 등장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연기가 공으로 실천방법인 팔정도는 육바라밀로 바뀌게 된다.

선불교에서는 우리에게 “참선을 하라”고 한다. 복잡한 것보다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래서 육바라밀 대신 계정혜 삼학으로 바뀐다. 계정혜 삼학이 바로 선불교의 실천방법이다. 부처님 당시에 출발한 근본불교가 대승불교를 거치면서 중국에 이르러 선불교의 꽃을 피운다.

약 7세기부터 12-13세기까지 중국에서 꽃을 피웠던 선불교는 지구상 가장 화려한 정신문화의 한 장을 마련하게 된다. 불교의 흐름이 근본불교, 대승불교, 밀교, 선불교로 흘러간 것이다.

육바라밀은 누가 어떻게 이야기 하더라도 대승불교에서 가르친 진리구나, 계정혜는 선불교에서 이야기한 진리인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불교의 실천에 대한 하부구조이고, 상부구조인 인식론에 대한 구조는 연기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대부분의 구조는 대승불교이다. 그러니까 불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존재에 대한 인식론인 연기에 대한 이해가 없어진 것이다. 엄밀하게 불교의 실천이란 시대에 따라 항상 변화할 수 있다. 수행방법과 실천방법이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근본불교의 모습을 지금은 다 잊어버리고 망각해 버렸다.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부처님 법을 만나서 ‘내가 부처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인식이 없어진 것이다.

불교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만큼 움직이게 된다. 정신적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만큼 실천방법도 병행되어야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도 대승불교에서도 끊임없이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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